마리아 몬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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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a Montessori
1. 개요
2. 생애
3. 아동교육에 대한 기여
4. 개인사


1. 개요


1870년 8월 31일 ~ 1952년 5월 6일. 이탈리아아동 교육학자이자 아동 정신과 의사. 교육학에 문외한이더라도 '''몬테소리 교육법'''이란 표현은 워낙 교육업체에서 많이 홍보문구로 써와서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2. 생애


이탈리아 키아라발레(Chiaraval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와 어머니의 열렬한 서포트를 업고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 의학과에 입학한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설에 따르면 의학과 재학 당시 여자라는 이유로 해부실습 수업 참여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마초 문화 경향이 강한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남초인 대학 과에 진학을 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하게 당한 불평등.
졸업 후 동 대학의 부속병원 정신병과 조수가 되었으나 여전한 차별대우 및 아이들을 학대하는 당시의 관습에 지쳐 교육학으로 전향을 결심, 1898년부터 2년 간 로마의 국립 특수교육학교에서 일한 다음 로마대학교에 재입학해 7년간 실험심리학과 교육학을 배웠다. 1907년 3~6세까지의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Casa dei Bambini)'을 열어, 이른바 몬테소리 교육법(法)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에는 이탈리아의 교육부 장관이 되었으며, 몬테소리의 학교 및 교육 방법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평화와 어린이 교육을 강조하는 등 몬테소리의 교육 방식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과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몬테소리는 공직을 사임하고 1934년 이탈리아를 떠나서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정착했다. 이후 몬테소리는 네덜란드, 영국, 인도 등을 찾아다니며 교육법을 전파하다가 1952년 네덜란드 노르드윅(Noordwijk)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3. 아동교육에 대한 기여


교사들의 권위주의적 교육에 강력히 반대하고 어린이의 권리존중을 주장하여 어린이의 신체 및 정신의 발달을 북돋우는 자유스러운 교육과, 어린이 하나하나의 활동리듬에 알맞은 개성발전교육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교육 방향이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율성과 자발성을 배울 수 있도록 하며, 자기개발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또, 감관(感官)의 훈련이야말로 모든 정신발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고, 갖가지 놀이 도구를 고안하여 감관을 훈련시키고자 하였다.
몬테소리식 교육이 자신의 유치원 운영을 통해 효능이 입증되자, 세계 각국에서 그녀의 방식을 배우려 몰려왔는데, 이 때를 계기로 그녀의 이름을 따 교구(敎具) 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의사 시절의 과거 스캔들이 걸려서 홍역을 치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사상을 사람들이 "스탈린주의 사상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라고 제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몬테소리가 설립한 유치원 '어린이의 집'이 1년(혹은 몇 년) 동안 강제 폐쇄되었다고 한다.[1] 그러나 일부에서 오해가 풀려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생각은 좋은데 시대가 뒤따라주지 못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권위주의보다 자율성에 근거한 교육방법론은 좌파들이 강조하는 교육학 방법론이다. 그렇다고 그게 틀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탄압한다는 것은 더더욱 문제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아직도 권위주의적 교육론과 어른들의 의식이 팽배한 상황인데[2] 정말 시대를 앞서 간 교육자이자 교육학자 중 한명이다.
저서로 《가정에서의 어린이 Das Kind in der Familie》(1926) 《교회에서의 어린이 The Child in the Church》(1929) 《인간 가능성의 교육 To Educate Human Potential》(1948) 등이 있다.
몬테소리 교육법에 의하여 한국 몬테소리(공식 홈페이지)가 생겨났는데, 특유의 억양 때문에 '''못된소리'''라 불리고 있다. 이후, 못된소리가 대세론을 이루자 한국에서만큼은 몬테소리 교육을 회피하는 특유의 바람이 불었다.
또한 몬테소리 교육법이 미국 등을 거쳐가면서 마치 영재를 만들어주는 기적의 조기교육 방법인양 소개되기도 했다. 위에 나왔듯이 어린이의 놀이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몬테소리의 본래의 의도를 생각하면 심각한 왜곡.

4. 개인사


미혼모이기도 했다. 당시 미혼모에 대한 시각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몬테소리는 아들을 항상 조카라고 소개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사회적 유명인 중에 미혼모인 여성을 생각해 보라. 특히 동양권에서는 한 명도 찾기 힘들 것이다. 입양의 경우는 있을 수 있더라도 말이다.
당시 주세페 몬테사노 박사와 함께 병원에서 일했었는데, 결혼하려 했지만 몬테세노 집안에서 반대해서 (여자가 의사라 집안에서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 마리오 몬테사노를 남기고 마리아 몬테소리를 떠난다.
유로화 도입 전인 이탈리아 종이화폐인 1,000리라의 모델로 차용된 적이 있었다.

[1] 스탈린주의는 획일화와 중앙집권, 효율성을 강조하는 사상인데 반해 그녀의 교육학은 자유지상적이다. 물론 소련 초기 블라디미르 레닌 시절과 신경제정책이 시행되던 초기 집단지도체제하에서는 몬테소리처럼 교육제도에서 자율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교육제도를 개편하면서 주입식 교육, 권위주의적인 지도방식이 권장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이후에는 레닌 대 교육정책의 영향을 다시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 과정에서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2] 나무위키의 급식충, 초딩 항목 등을 보면 여전히 꼰대스러운 서술이 많다. 그것도 중년 꼰대를 까는 나무위키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