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한전석

 

1. 개요
2. 실제
3. 의문?
4. 여담


1. 개요


중국의 연회 요리.
청나라 강희제 시절, 지배민족인 만주족과 피지배민족인 한족 사이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만주족과 한족의 요리를 잔치에서 같이 차려낸 코스요리라고 한다.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이름 자체가 만주족과 한족 모두의 잔치라는 의미. 강희제가 직접 고안해서 지시했다고 전해지며, 자연히 청 대에 이르러 바야흐로 만개하고 있는 궁중요리의 전통에 입각해 '''눈이 돌아갈 정도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구성되었다고 한다. 일단 연회 자체가 3일, 4일씩 연이어지는 대규모 행사였고, 만한전석이라는 코스 요리는 '''행사 내내 이어지는 요리열전'''의 개념이었다. 한 끼에서 기승전결을 구현하는 일반적인 코스 요리와는 스케일이 다르다. 궁중요리답게 재료, 조리법, 취식 순서 등이 엄밀한 법도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만한전석은 6개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1등급부터 3등급까지는 청나라 황실 제사 요리였고, 4등급 부터가 연회에 사용되었다. 4등급은 황제의 생일, 결혼, 동지 연회 때, 5등급은 조선, 몽골,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에게 베푸는 연회, 6등급은 기타 국가의 사절에게 베푸는 연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현대 한국에서는 조선이 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을 당했기에 청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의외로 청 황실에서는 조선 왕의 의전 서열을 황제 다음으로 두었고, 만한전석 또한 조선은 5등급 요리로, 월남(베트남)이나 유구(오키나와 왕국)에 비해서 한 등급 높은 요리를 제공받았다.[1]

2. 실제


진짜 만한전석은 안타깝게도 현재는 완전히 맥이 끊긴 상태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너무 철저하게 박살이 나서 현재 남은 것이라고는 반쯤 불에 탄 책 한 권이 전부. 이에 청나라 말기 궁에서 일하던 노인들까지 모조리 긁어모아 조사했지만 결과는 '영 아니올시다'였다. 현재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내오는 것은 그냥 현존하는 중국요리 중 호화로운 고급 요리들을 끌어모은 것으로, 역사적 맥락에서의 만한전석이라기보다 '''중국 코스요리 끝판왕''' 정도의 의미로 통용되는 메뉴이다. 문혁 이후 맥이 끊긴 소위 '중국 무술'을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파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

3. 의문?


만한전석(滿漢全席)은 청나라 때 만주족과 한족 최고의 진귀한 요리를 모두 모아놓은 최고의 잔치, 청나라 황제가 만주족과 한족의 단합을 위해 베푼 화합의 잔치로 알려져 있다. 흔히 만한전석을 환상 속의 잔치로 상상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만한전석이 화려한 것은 분명하다. 음식이 아니라 조각 같고 그림 같아 젓가락 대기가 아까울 정도이고 나흘 간 지속됐다고 할 정도로 가짓수가 많았으니 좋다는 요리는 다 차렸지만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다. 아는 요리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한나라 때의 궁중음식과 명-청대의 궁중음식이 같았다고 확언할 수 있는가? 심지어 그냥 전해지는 음식 문화도 계속 바뀌었는데[2] 그게 한 왕조에 계속 이어졌을 리가 있겠는가? 적어도 만주족과 한족의 전석이라는 내용을 봐도, 옛날부터 한족의 고유한 전통으로 만한전석이 내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제비집 수프, 샥스핀, 전복해삼, 버섯, 자라탕 등이고 만주족 요리도 귀로 들어 익숙한 것들로 고대의 산해진미인 곰 발바닥, 사슴꼬리 등이다. 지금은 모두 금지식품이며, 현대판 만한전석에는 다른 요리로 대체됐다.

또 하나, 만한전석이 실제 존재했는지 그리고 지금 만한전석이라고 부르는 연회요리가 과연 만한전석이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청나라 궁중잔치에 '만한전석'이라는 이름의 잔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사(正史)인 청사고 등의 기록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야사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관청이나 민간이 주최한 연회 가운데 만한석(滿漢席)이라는 이름의 잔치가 있었다는 사실은 개인 문집에 기록으로 나온다.

그러면 궁중잔치에 실질적으로 '만한전석'에 해당하는 잔치가 없었냐고 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다. 궁중 잔치에는 어차피 지배층인 만주족과 관리 계층인 한족이 모두 참석했으니 ‘만한’이 합동으로 잔칫상을 받은 것은 맞다. 그리고 이런 잔치는 연회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만주 요리는 여섯 가지, 한족 요리는 다섯 등급으로 준비해 따로 따로 준비했다.

이런 연회 중에서 흔히 만한전석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잔치가 강희제건륭제가 주최한 천수연(千叟宴)이라는 잔치다.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강희제의 잔치에는 65세 이상 만주족 문무대신 680명, 한족 관리 340명 등 약 1000명이 참석했고 건륭황제 재위 50주년 기념 천수연에는 만주족과 한족 노인은 물론 조선을 비롯해 주변국 노인까지 모두 3000명을 초대했다.

그런데 이 잔치가 과연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한 잔치였을까? 이때는 청나라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다. 화합의 잔치였다기보다는(물론 명분은 이쪽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청나라 황제가 피지배 계층인 한족을 비롯해 주변국에다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위세를 보이려는 잔치였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실제 만한전석이 유명해진 것은 1970년대 홍콩 TV가 거금을 들여 청나라 황제의 잔치에 등장했다는 요리를 재현해 TV로 중계하면서부터다.그리고 '옛날 청나라 황제가 만주족과 한족 화합을 위해 마련했던 만한전석'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것.출처
만주족의 음식과 한족의 음식이 함께 오르게 된 것 자체는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한 이후로 만주족이 한족의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로 보인다. 더군다나 청나라의 만주족은 원나라몽골족에 비해 한족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청나라 말기에는 만주족이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만 간신히 유지한 채 언어, 문화적으로 거의 한족에 동화되었을 뿐더러 한족들의 힘이 매우 비대해졌기 때문에, 청나라 말기의 만한전석은 만한전석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와는 별개로 제3자의 입장에선 더더욱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연상시켰을 듯하다.
어찌됐든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청 당시의 궁중요리 레시피들이 실전되어버린 것은 엄청난 손실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홍콩과 마카오에 당시 요리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지방에 따라 요리는 달라지며, 당연히 광둥성에서 많이 먹던 음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난징, 베이징, 충칭 등 다른 주에서의 옛 고급 음식들은 되살리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4. 여담


대중매체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국 요리 끝판왕 정도로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엄밀한 당대 요리의 지식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대의 만한전석이란 중국 요리의 자부심을 걸고 호화 요리로 도배하는 코스 정도로 통용되기 때문이다. 요리의 가짓수, 코스의 전개, 재료의 수준 등은 연회의 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기본적으로 내올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왕중왕인 요리들만 나온다고 보면 된다.
신 중화일미에도 등장하여 국내에서 만한전석의 인지도를 올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최종 결전의 과제로, 100가지 요리로 구성된 호화 코스요리로 등장한다. 원작 코믹스에서는 최종 결전의 '''예선 과제'''로 등장한다. 이쪽은 수량이 미묘하게 틀려서 108접시로, 혼자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특성상 주인공 마오가 고전할 뻔했으나 하나둘씩 등장하는 동료들의 가세로 아슬아슬하게 통과가 가능했다.
조선시대 수랏간을 무대로 한 드라마 대장금에도 만한전석이 등장하는데, 이는 명백한 고증오류다.[3] 대장금의 작중 시기는 조선 중종 때인데 청나라는 이보다 100년 뒤에 세워진 나라다. 그것도 만한전석의 이름과 의의 자체가 망한 명나라 한족들의 회유, 화합임을 생각하면 이를 명나라 사신에게 대접하는 건 단순한 고증오류를 넘어 능욕에 가깝다. 극중에서는 최상궁이 장금의 요리 때문에 언짢을 (거라고 생각되는) 명나라 사신을 달래기 위한 회심의 한 수로 준비하는데, 아는 사람은 그 아이러니에 쓴웃음이 나올 수도 있다. 이 때문인지 코미디하우스에서 대장금 패러디 코너가 방영됐을 때 사신을 연기한 개그맨이 청나라 때 나온 요리를 명나라 사신에게 대접한다고 디스했다.

[1]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2] 대표적인 예로 송나라 전까지 중국인들은 회나 유제품을 즐겨 먹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중국 전통요리에서는 이런 문화는 일부 토속요리에나 남아있을뿐 대다수 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 전통요리는 양고기 요리 및 튀김·볶음 계통이 발달했는데 양고기 요리의 발달은 한족 전통문화가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의 정복왕조인 원나라청나라의 영향이며, 튀김·볶음 계통 요리의 발달은 명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본래 고려시대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류 요리가 쇠퇴하였으나(다만 고기를 뇌물로 주고받았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아주 안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몽전쟁 이후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과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육류 요리가 부활하였다. 한국 요리에 지금처럼 고추가 많이 들어가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3] 만한전석과 관련 없는 이야기지만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본토에 있는 중국 문화와 역사 기록 중에서 훼손되거나 소실 및 실전된 경우가 많다 보니 명나라와 청나라에 관한 사료들의 경우, 중국 본토에서 직접 기록한 사료들보다 조선 왕조 당시의 한국에서 기록한 사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학자들이 명나라나 청나라와 관련된 기록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