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살리나 발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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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4. 관련 문서


1. 개요


로마 제국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셋째 부인이자[1] 황후, 서기 25년~48년.

2. 생애


그녀의 어머니는 대 안토니아[2]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딸인 소 도미티아이다. 더 따지고 가자면 그녀의 사촌이 바로 네로[3]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당시 황제였던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주선으로 어머니의 이종사촌오빠인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다. 이 당시 메살리나의 남편이 된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의 작은아버지로 48살의 상당히 많은 나이였다. 선천적으로 경미한 뇌성마비 증세와 소아마비로 걸음걸이가 불편했던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었음에도 일찌감치 제위계승서열에서 밀려난 인물이었다. 메살리나가 클라우디우스의 세번째 결혼 상대자가 되어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시 황제 칼리굴라가 갑작스레 살해당하여 클라우디우스가 황위에 오르자 황후가 됐다.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와의 사이에서 1남 1녀(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를 낳았다.
오늘날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은 사람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왜냐하면 황후가 된 이후, 메살리나가 보여준 부도덕하고 음란하며 비열한 행동 때문이다. 그녀는 사치를 일삼고, 자신이 원하는 저택과 토지 등을 얻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워 죽였다. 또 결혼 생활 중에 여러 남성들과 불륜을 저지르면서, 중혼까지 한 까닭에 그녀에 대해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방탕하고 음란한 황후'''라는 평가를 내린다.
메살리나의 기행은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 제국브리타니아 정복을 기념하는 개선식에 보란 듯이 참가해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든 사건이 있다.[4] 당시 개선식은 전쟁에 참가한 장군과 휘하 병사들에게만 주어졌고, 제정시기에 들어와서는 오로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브리타니아 정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어린 황후는 실제 전쟁에 참전해 승리를 거둔 황제, 장군, 병사들을 들러리 세우면서 마치 자기가 주인공인마냥 대놓고 설치고 다녔다.
어린 나이부터 지위를 이용해 치맛바람을 휘두른다고 비난받은 메살리나는 금전욕이나 물욕도 강해서 사치도 꽤나 심했다. 그녀는 단순 사치만 심한 정도가 아니라 한번 눈독을 들인 재물은 갖가지 음모를 짜고 누명을 씌우고 사람을 죽여서라도 가로챘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메살리나의 이런 행동들은 상당히 집요했고, 그 대상은 누구라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메살리나의 거짓기소와 음모들은 남편 클라우디우스의 명성과 업적을 흠집냈다. 따라서 메살리나에게 누명이 씌워졌다가 클라우디우스의 꼼꼼한 재검토로 풀려난 귀족이나 부자들은 “아내한테 휘둘리는 늙은 얼간이”, “본인이 누명을 씌우고 풀어주는 행동을 저지르는 이중적인 인간”이라고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뒤에도 비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악명을 높인 것은 정도가 심한 불륜행각과 성욕의 분출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뭔 짓을 해도 황제가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채자 그녀는 곧바로 쾌락에 몸을 던졌고, 궁정 안의 은밀한 방을 밀회 장소로 만들어 애인들과 육욕의 향연을 벌였다고 한다. 심지어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비서들도 가까이 했다고 한다.[5] 물론 격무에 시달린 황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메살리나는 물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처럼 성욕을 위해서 악랄한 행동을 거침없이 저질러 비난을 받았다. 황후는 자기가 마음에 든 원로원 의원 아피우스 실라누스가 유혹을 거부하자 황제를 부추겨 죽이기도 했으며,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그녀의 불륜상대가 되길 거부한 원로원 의원들을 누명을 씌워 죽이거나 추방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원로원 귀족들은 황제가 메살리나의 말만 듣고 원로원을 공격하는데 신경도 안 쓴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가 원로원을 존중하고 황제로서 어떤 특권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황제와 원로원 사이는 나쁘게 흘러가게 됐다.
메살리나를 둘러싼 얘기들 중에선, 애인들과의 성행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가 고급 매춘부로 나섰다는 얘기도 있으며, 심지어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서 아예 천민들이 이용하는 최하층 매음굴에서 창녀로 일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여러 손님을 받으면서 온갖 음란한 성행위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6] 과감하게 남근의 고리가 달린 '류카스카'라는 문패까지 걸어놓고 손님을 받았다고. 물론 과장된 이야기일 수는 있으나, 이런 얘기가 시중에 돌 정도였다면 그녀의 방종에 대한 당대 로마인들의 시각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하게 만든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파멸의 길에 들어서는데, 그 사건은 바로 황후의 중혼과 궁정쿠데타 시도였다. 메살리나는 중년의 잘생긴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황제가 오스티아 건설을 위해 로마를 비운 틈에 궁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참금까지 낸 결혼식을 강행했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려는 반역음모까지 계획해 실행에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메살리나의 중혼과 음모는 황제의 서신 담당비서 나르키수스에게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이때 나르키수스는 "황후가 실리우스와 음모를 꾸며 황제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전했다. 자신의 최측근의 밀고와 그가 내민 정황 증거까지 나오자 황제는 실리우스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메살리나의 애원에 마음이 흔들렸던지 클라우디우스는 자꾸만 처벌을 미뤘고, 결국 클라우디우스의 측근들이 루쿨루스 별장에 숨어 있던 황후를 찾아내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3살이었다.
그녀의 소생들도 좋은 결말을 맺지 못했다. 딸인 옥타비아는 어머니와 달리 착하고 현명했으며 정숙한 여인으로 이름이 높아 로마인들의 동정과 사랑을 받았으나, 남편이었던 네로에게 냉대를 당한 끝에 간통 누명이 씌워져 죽임을 당했다. 아들인 브리타니쿠스 역시 네로의 황위를 위협하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그녀의 악행들과 몰락은 당대 기록은 물론이고, 타키투스, 카시우스 디오, 수에토니우스 등 후세 로마 역사가들의 저작에 실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녀의 방탕한 요부 이미지는 후대의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도 했고, 그녀를 소재로 한 그림들도 꽤 그려졌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녀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믿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당대 역사가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의도적으로 비방한 점과 네로나 클라우디우스가 현재 재평가 되는 점을 고려하면 메살리나의 만행이 부풀려졌다는 가설도 이상하지 않다.

3. 기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따르면, 현대 이탈리아어에서 메살리나라는 이름은 '아무 남자와 동침하는, 몸가짐이 헤픈 여자'의 대명사로 쓰인다고 한다.

4. 관련 문서



[1] 이전의 두 부인은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결혼하고 이혼했다.[2]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소 옥타비아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3] 네로는 소 도미티아의 오빠의 아들이다.[4] 로마의 개선식은 단순히 행진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아서 신성을 의미하는 붉은 안료를 칠하는 전통이 있었다.[5] 이러다 해방노예 비서진의 일원인 폴리비우스가 죽임을 당하자 관계가 틀어졌다고.[6] 사후 기록말살형을 받은 만큼 구라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