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안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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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현종과 명성왕후의 적3녀.
먼저 태어난 언니 명선공주, 명혜공주가 요절했으므로 숙종에게는 사실상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이었다.
2. 생애
2.1. 탄생
1667년(현종 8) 5월 18일 명성왕후의 몸에서 태어났다. 현종이 직접 수결하고 작성한 작명 단자에 그녀의 이름이 남아있는데, 이름은 온희(溫姬)이다. 현종은 딸이 운수가 한량없이 좋기를 바람에서 작명 단자의 하단에 '기수태다재(其數太多哉)' 라는 글씨도 남겼다.
2.2. 혼인
1680년(숙종 6), 전 참판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를 부마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다. 오두인은 서인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고, 이로 인해 효종과 현종의 딸들이 모두 서인과 혼맥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는 하필 가뭄이 극심하여 나라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지경에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명안공주의 집을 성대하게 지어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청 사신이 들어올 때는 으레 은과 비단을 바치는데, 비단은 모두 공주에게 하사한 기록도 있다.[3]
2.3. 가족들의 사랑
왕실의 금지옥엽인 명안공주를 향한 사랑은 숙종만의 것이 아니었다. 김석주가 지은 명성왕후의 행장에서는 "명선(明善), 명혜(明惠) 두 공주가 서로 잇달아 일찍 세상을 뜨고, 명안공주(明安公主)도 또 어려서부터 병약(病弱)하여, 후께서 몹시 가엾게 여기시고 사랑하셨으나" 라는 언급이 있다.
또한, 궁중에 천연두가 유행해 명안공주는 어머니와 오빠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명성왕후는 섭섭하고 그리운 마음에 "(못 본지) 달포되어가니, 더욱 섭섭 그립기 무궁무궁하여 하노라" 하면서 타락으로 만든 과자를 한글 편지와 같이 보내기도 하였다.
2.4. 인현왕후전의 등장인물
한편, 명안공주는 인현왕후전의 등장인물 중 하나이다. 인현왕후가 폐출되는 날에 명안공주가 울고 불며 붙잡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박태보가 문초를 당할 때 대궐 안에서 매질하는 소리가 향교동까지 들렸다는 묘사가 있다. 당시 향교동에는 명안공주의 집이 있었다.
그러나 인현왕후전의 이러한 묘사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으나 정확성이 떨어져 신뢰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명안공주는 기사환국이 일어나기 전 1687년(숙종 13) 5월 16일에 사망했다. 이 당시 숙종은 10일 동안 수라에 올라오는 반찬을 줄이라고 했고[4] , 날씨가 무더위에 염을 하기도 전이라고 여러 신하들이 만류했으나 직접 빈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공주가 죽을 당시만 해도 숙원 장씨가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경종이 태어나기 전이었고, 인현왕후의 왕비 지위에도 문제는 없었다.명안공주 이 변을 들으시고 크게 놀라 후께 비옵고 오열 비탄하여 옷을 잡고 흐느껴 우시며 능히 말씀을 이루지 못하니, 후께서 탄식하고 위로하여 말씀하시되, "화와 복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나의 복이 없고 천한 탓인즉 다만 어명대로 받들어 모실 따름이라. 누구를 원망하리요마는 공주 이렇듯 동정하시니 은혜 잊을 길이 없소이다."
《인현왕후전》
다만, 공주의 시가도 서인이기에 인현왕후와 친밀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고, 공주의 시아버지 오두인을 비롯한 86명이 인현왕후의 폐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일이 인현왕후전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해창위 가문은 부마였기에 삭탈관직의 처분 정도로 다행히 멸문지화는 피했다.
3. 매체에서
-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2013)》: 배우 조아영이 명안공주 역할을 맡았다.
[1] 본래 박석동에 집이 있었으나 한 차례 옮겼다. [2]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醉夢軒), 사후에 문효(文孝)의 시호를 받았다. [3] 숙종실록 15권, 숙종 10년 3월 15일 신사 1번째기사. # [4] 내의원의 반대로 4일로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