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도
1. 대한민국의 섬 이름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고군산군도) 무녀도리에 있는 면적 1.75km², 해안선 길이 11.6km의 섬이다. 선유도와 신시도 사이에 있으며, 두 섬과 함께 고군산군도의 중심을 이룬다.
'여자가 없는 섬'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무당 무(巫)'''를 써서 무녀도다. 섬의 서남쪽에 있는 주산인 무녀봉(巫女峯) 앞에 장구 모양의 장구섬과 술잔 모양의 섬이 있어 마치 무당이 굿을 할 때 춤을 추는 모습 같다고 해서 '무녀도(巫女島)'라고 한다.
2. 소설
2.1. 개요
김동리의 단편소설. 1936년에 중앙일보[1] 에 발표했다. 김동리는 1934년 시 부문에 백로가 당선되어 등단 직후 연이어 발표한 당선작 화랑의 후예(1935), 산화(1936)와 무녀도(1936)가 평단과 대중의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단숨에 유명 소설가가 된다.
2.2. 등장인물
2.2.1. 나
이야기의 화자.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2.2.2. 모화
노인이 들려주는 무녀도 이야기의 주인공. 예기소가 있는 경주의 작은 산골마을의 무녀로 가족으로는 말을 못하는 딸 낭이와 가끔씩 들르는 남편과 사생아 욱이가 있다. 어느날 절간에 맡긴 사생아 욱이와 상봉하나 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아들에게 예수 귀신이 뿥었다고 생각한다.아들에게 쓰인 예수 귀신를 쫓으려 아들이 자는 사이에 그가 집에 올때 가져온 신약 전서(신약성경이다)를 두고 굿을 벌이다가 아들이 막자 칼부림을 하다가 아들을 죽인 뒤 완전히 미쳐버려 예기소에 굿을 하다 빠져 죽는다.
2.2.3. 욱이
모화가 신내림을 받기 전에 낳은 사생아로 어릴 적부터 총명하다 하여 모화가 공부를 더 시키기 위해 절간에 맡겼지만 도망을 나와 우연히 기독교를 접하면서 점차 기독교 신자가 되고 어머니인 모화의 굿을 우상숭배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며 어머니의 숭배를 말린다.
점차 어머니와 사이가 벌어지자 평양지역의 선교사인 현 목사와 이 장로에게 도움을 청하며 경주지방의 기독교인을 찾다가 어머니가 불을 지른 것을 보고 놀라 황급히 불을 끄지만 어머니의 칼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만다.
2.2.4. 낭이
욱이의 이부여동생으로 모화네 집의 살림을 담당하는 벙어리 소녀. 욱이와 달리 모화가 신내림을 받고 무당일을 하게 된 뒤로 태어났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낭이의 아버지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상점을 운영하며 모화와 떨어져 사는데 대신 철마다 선물을 들고 찾아와 딸을 챙긴다고 한다.[2] 어렸을 땐 모화 슬하에서 이부오빠인 욱이와 함께 자랐으며 욱이를 몹시 따랐다고 한다. 이때는 어눌하게나마 말을 했는데 모화가 공부하라는 이유로 욱이를 절로 보내버린 후로는 말문을 닫아버렸다고. 무당의 딸인데다가 말을 못하는 탓인지 성격이 상당히 내성적이다. 살림을 안할 때면 집에서 주로 특기인 그림 그리기로 소일하는데 모화가 없을 때 방문객이 오면 몹시 놀라고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인다는 묘사가 나온다.
오빠와 어머니가 허망하게 사망한 뒤 한동안 앓아 누웠으나 아버지가 찾아와 병수발을 든 덕분에 어느 정도 몸을 추슬렀고 이후 말문이 어느 정도 트인 채로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떠난다.
2.3. 줄거리
도입부에서는 '나'의 시점에서 진행되다가 손님으로 들어온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설의 본격적으로 전개가 되는,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의 소설이다.
먼저 '낭이'라는 인물이 그린 무녀도라는 그림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시작된 이 액자식 구성은, 그 그림의 배경이 되는 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으로 끝으로, 본격적인 스토리로 들어간다.
무녀도라는 그림의 분위기가 그렇듯, 이야기의 중심점이 되는 모화의 집에 대한 설명도 그렇다. 그 집은 경주읍성에서 외부로 5리쯤 가서 있는 조그만 마을―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있는데, 모화의 집도 인간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 집에는 무당 모화와 그녀의 벙어리 딸 낭이가 살고 있는데, 모화가 절간에 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아들 욱이를 제외하면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모화에게 굿을 하러 오는 사람들 아니면 봄, 가을에만 찾아오는 낭이의 아버지뿐이다. 그마저도 모화는 자신이 굿할 일이 없으면 주막에 가서 술을 즐겨 마시곤 한다. 그 탓에 집에서의 살림을 꾸준히 하는 것은 기대하기도 힘들고, 그 곳에는 낭이만 집에 있었다.
모화의 사생아인 욱이가 절간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그 도깨비굴처럼 묘사된 모화의 집이 사람 냄새가 나는 곳으로 바뀌어간다. 그런데 모화는 욱이가 절간에 있다가 간만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절간에서 빠져나와 그대로 예수도(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욱이와 모화 간에 갈등이 생겼다. 욱이는 이부여동생 낭이에게 기독교 성경구절을 얘기하고 알려주는 등 기독교를 알려주지만 모화는 그런 아들이 걱정되기만 한다.
사실 무당인 모화에게 있어 예수도는 동학당과 같은 잡귀일 뿐이며, 그 종교를 믿는 아들 욱이에 대해서 미운 자식 취급을 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이는 그런 어머니 모화를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모화가 생각했던 것처럼 사귀들린 사람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어머니와의 성격 격차가 점차 벌어지자 욱이는 평양 현 목사와 이 장로[3] 라는 인물에게 편지를 띄웠고 경주 지방의 예수교인을 찾아 나섰다. 모화는 그러고 있는 욱이가 그저 집을 나가고 없으니 날이 갈수록 초조해져서 치성을 드리는데, 그 과정에서 낭이까지 영향을 받았는지 갑자기 옷을 전부 벗고 나체로 춤을 추기도 한다.
두 번 집을 나갔던 욱이는 어머니 모화의 포옹을 거르고 방에 누웠는데, 그날 밤 모화는 욱이가 품에 안고 있었던 <신약성서>를 뺏어다가 접시불 옆에 태워 버렸다. 그것을 목격한 욱이는 불을 끄기 위해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냉수그릇을 집어 들려고 했지만, 모화의 손에는 이미 식칼이 들려 있었다. 그러다가 불이 붙어서 방에까지 붙으려는 불길을 욱이가 꺼줬더니 기어이 칼빵을 먹인다. 며칠 뒤 욱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자신을 찾아온 성직자들을 만난 뒤 성경을 품에 안고 사망한다. 욱이가 죽고 나서 모화가 살고 있는 집은 처음 묘사되어 있던 그대로 복귀되었고, 그와 동시에 모화는 아예 미치광이처럼 되어 버렸다. 그 결과 과거에 모화의 굿이나 푸닥거리를 빌던 사람들조차도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며[4] 모화를 멀리하고 교회 세력에 좀 더 가까이하기 시작한다. 이로서 모화는 심리적 박탈감을 느끼고 자신의 마지막 굿을 작정하고 준비한다.
이것은 예기소[5] 에 빠져 죽은 김씨 부인의 넋을 달래는 것[6] 이며, 이 굿으로 벙어리인 낭이도 입을 열 수 있게 될 거라고도 소문이 난다. 이걸 작정하고 굿을 준비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서양잡귀를 멀리 하고 굿을 가까이 하게 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기독교 세력이 늘어나자 사람들은 오히려 모화의 초혼 굿을 외줄타기 또는 판소리 공연처럼 여겨, 전물상도 몰려오고 큰 구경을 하는 듯이 묘사가 되었다. 하지만 모화는 결국 굿을 하면서 물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결국 그대로 익사하게 된다.
그 뒤 이부오빠에 어머니까지 잃은 낭이는 한동안 앓아 누웠고 떨어져 살던 낭이의 아버지가 찾아와 그런 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어느 정도 회복되자[7] 나귀에 태워져 어디론가로 가게 되고, 모화가 살던 집은 누구 하나의 관심도 갖지 않아 버려졌다. 이후 낭이와 그 아버지는 예술가를 대접해주는 '나'의 할아버지를 찾아와 한동안 머물렀고 그동안 낭이가 무녀도를 그려 남겼다.
2.4. 비평
한국의 전통문화와 외래문물의 대립, 그 중에서 무속과 기독교의 대립이 매우 첨예하게 다뤄진 소설이다. 특히 빠른 속도로 밀려 들어온 외래문물에 의해 어떻게 토속신앙이 변질되고 망가졌는지를 아주 잘 나타낸 면이 있다.
소설 내용을 보면, 몇 해 두고 소식이 없던 아들 욱이가 돌아왔는데 상봉의 기쁨 이전에 모화가 새파랗게 질려 겁먹은 모습을 했다는 묘사가 있다. 또 아들이 예수교에 귀의했다는 것을 알게 된 모화는 그때부터 아들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고, 반대로 아들 욱이는 어머니에게 마귀가 붙었다며 기도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모자 간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져 아들의 성경을 태우는 형태로 나타나고, 이를 막으려던 욱이를 모화는 신들린 상태로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다. 이후 아들 욱이는 끝내 소생하지 못한다.
그리고 모화가 살던 마을에는 욱이의 주선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와 교회가 들어서고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비판적인 작가의 시선을 볼 수 있는데 아래와 같다.
- 이러할 즈음 이 고을에도 조그만 교회당이 서고 전도사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것은 바람에 불처럼 온 고을에 뻗쳤다.
- 읍내의 교회에서는 마을마다 전도대를 내보냈다. 그리하여 이 모화의 마을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 이 마을 방 영감네 이종 사촌 손주사위요, 선교사와 함께 온 양 조사 부인은 집집마다 심방하여 가로되 "무당과 판수를 믿는 것은, 거룩거룩하시고 절대적 하나밖에 없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죄가 됩니다. 무당이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보십시오. 무당은 썩어빠진 고목 나무나 듣도 보도 못 하는 돌미륵한테도 빌고 절을 하지 않습니까. (중략) 우리 인생을 만든 것은 절대적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올시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2.5. 을화
김동리는 이 소설을 '을화'라는 장편소설로 개작하여 1978년에 문학사상지에 발표했다. 무녀도의 줄거리를 기초로 하여 등장인물이 좀더 입체적으로 재창조되고, 여러 묘사와 설명이 많이 늘어났다.
등장인물 이름도 모두 바뀌었는데, 모화는 을화가 되고 무당이 되기 전의 이름은 옥선이 되었다. 욱이는 영술로, 낭이는 월희로 바뀌었다. 을화의 과거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밝히고, 등장인물의 관계도 추가가 많이 되어 있다. 줄거리는 약간 변형을 거쳤으나[8] 기본적으로는 그대로 유지되므로 무녀도의 확장판으로 보면 된다.
1979년에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하였다. 감독은 감자, 홍살문 등을 제작한 변장호. 을화 역에는 김지미, 영술 역에는 유장현이 배역을 맡았다.
2.6. 기타사항
해당 소설의 무대가 경상북도 경주시인 만큼 여민촌 혹은 잡성촌의 무대는 김동리의 고향마을인 성건동을 소재로 하였다. 단 성건동은 전형적인 평지 동네이지만 형산강 건너 야트막한 언덕이 있는 동네이다. 또한 작중 모화가 빠져 죽은 소 또한 근방에 존재하는데, 해당 작품에 나오는 예기소는 또한 애기(청수)소, 금장소[9] 라 부르기도 한다. 2012년에 소 위 언덕에 금장대를 복원하였다.
주인공 모화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네가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있고 기차가 서지는 않지만 모화역이라는 기차역도 있다. 한자도 毛火로 동일해서 이 지명을 염두에 둔 작명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1] 현재 중앙일보와 관계 없다.[2] 아마도 모화의 직업이 원인이었던 듯하다. 그래도 비록 아내와 별거하고 있을지언정 딸은 끔찍이 챙겼다는 묘사를 보아 아버지로서의 소임은 다한 것으로 보인다. 결말에서는 아내가 숨지자 딸을 전적으로 책임졌다.[3] 지금은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감리교회/성결교회/침례교회/오순절교회 할 것 없이 '장로'라는 직함을 사용하지만,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장로'라는 직함을 주는 교파가 장로교회 밖에 없었다. 소설 속에서 욱이가 소속된 교파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4] 욱이와 낭이가 근친상간을 저질러 낭이가 아이를 가졌다는 악질적인 소문까지 퍼졌다고 나온다. 근데 욱이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묘사가 있긴 했다.[5]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푼 길이만큼 깊은 늪이라고 묘사된다.[6] 모화가 사는 여민촌 마을의 저수지인 예기소는 오래 전 간통누명을 쓰고 자살한 김씨 부인의 한이 서린 곳이라고 언급된다.[7] 이 때 낭이는 아버지를 부르며 약간이나마 말을 하게 된다. 모화의 굿이 효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부분.[8] 일례로 모화는 죽지만 을화는 죽지 않는다.[9] 행정구역상 현곡면 금장리에 위치하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