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비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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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Wittmann, 1914년 4월 22일 ~ 1944년 8월 8일
1. 개요
2. 연혁
3. 기타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차 에이스들인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과 더불어 적 전차를 가장 많이 격파했던 전차 3대장 에이스 중 한 명이자 오토 카리우스와 더불어 전설적인 티거 에이스이다. 하지만 SS무장친위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현재 독일 연방군은 그의 전과는 물론 존재 자체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탑승차량은 SD.KFZ 231 8륜 장갑차, 3호 돌격포, 3호 전차, 그리고 '''티거'''이다.

2.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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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가운데의 인물.[1])
최종 계급은 SS 대위(최상급돌격지도자)로 '''전차 138대, 대전차포 132문을 격파'''했다. 독일군 전차 에이스 순위에서는 5위이며, SS만으로는 1위이다. 하지만 대전차포와 합계를 내면 1위이다.[2]
하지만 상술했듯 국방군이 아닌 SS(정확하게는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던 이유로 오토 카리우스와는 달리 현재 독일 연방군에서는 비트만의 기록은 물론, '''에이스로서의 존재를 부정한다.''' 물론 다른 군종도 그 당시에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고 국가유공자 취급을 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는 인정하는데 친위대 소속은 아예 그것도 부정된다는 이야기다.
본격적인 활약은 독소전쟁중인 1941년 7월 우만 포위전에서 LSSAH사단 소속으로 당시 탑승차였던 3호 돌격포 A형으로 6대의 T-26 경전차를 격파한 것이 시작이다. 당장 이것만 해도 상당한 전과인데, 본질적으로 선회포탑이 없는 돌격포를 가지고 경전차지만 선제사격으로 돌격포를 맞추면 격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T-26을 여러 대 격파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이후 1942년 초까지 돌격포를 타고 싸우다가 부상으로 후송, 완쾌 후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1942년 겨울에 3호 전차 전차장으로 전선에 돌아왔다.[3] 이후 사단에 티거 중전차소대가 배치되면서 소대장으로 선발, 19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티거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시작했다. 티거 소대는 곧 중대로 확대, 제1SS전차연대 13중대로 명명되어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일련의 활약을 거듭했으며, 비트만은 13중대 3소대장으로서 1943년 중반~1944년 초반을 보냈다. 특히 1944년 1월의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비트만은 단 3주 만에 50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 도합 100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세웠다. 이 때의 공적으로 1944년 2월에 중위가 되었다.
원래 13중대는 1943년 10월에 제101SS중전차대대로 개편이 예정되어있었다. 당시 SS는 기갑군단 직할 독립중전차대대를 편성하기 위해 각 사단의 중전차중대를 차출해서 대대로 확대 개편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급박한 전황 때문에 제대로 개편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체르카시 포위전이 끝난 후 독일로 이동, 본격적으로 대대 재편성을 받았다. 이때 비트만은 2중대장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44년 4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에 머물렀고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전장으로 이동했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주(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이 때 탑승했던 티거는 212호 설과 221호 설, 222호 설 등이 있고 다른 차량이라는 설도 있다. 과거에는 231호라고 알려져있었으나 사실이 아닌걸로 판명되었다.)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여기서 비트만은 6파운드 대전차포에 궤도를 피격당해 전차를 버리고 탈출하기 전까지 단독으로 전차 10여대(셔먼 2량, 크롬웰 4량, 파이어플라이 1량, 스튜어트 경전차 3량 포함)와 2문의 대전차포외에 유니버셜캐리어와 병력수송용 하프트랙, 트럭등을 포함한 차량 10여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전차 27대 단독 격파로도 알려져 있는데 트럭이나 하프트랙 같은 차량들도 전차격파로 카운트해버린 경우다.) 빌레르보카주 전투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그를 관저로 불러 공적을 치하하고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 공적으로 대위로 승진하게 된다.

빌레르보카쥬 전투 직후 6월 13일 저녁에 무장친위대 소속 종군기자인 디터 메닝어(Dieter Menninger)가 인터뷰하고 당시 독일의 라디오 방송국인 "제국 방송" (Reichs-Rundfunk-Gesellschaft)으로 송출 된 미하일 비트만의 육성 자료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료 중 미하일 비트만의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보인다. 전투가 끝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굉장히 상세하게 당시 전투 상황을 묘사하는 미하일 비트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희귀하면서도 가치가 높은 육성 인터뷰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영문 번역이 되어있으니 들어보도록 하자.

이후 대대는 계속 전투에 참여했으나 비트만은 특별히 추가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대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그러다가 1944년 8월 8일, 대대 지휘전차인 007호에 탑승하고 캉 남쪽 Saint-Aignan-de-Cramesnil 부근에서 캐나다 제4기갑사단과 교전을 벌이면서 최후의 전과인 전차 3대 격파를 기록하지만 그 직후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철갑탄 관통+내부포탄이 유폭해서 비트만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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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만이 전사할 당시 탑승하였던 티거 I형 007호 전차의 잔해, 이 사진은 전투 직후 찍은 것이 아닌 전투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 1945년 즈음에 촬영되었다. 전체적으론 따로 날아갔던 포탑까지 같이 찍혔다.)
그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 누구냐는 데에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의 설이 분분하다.[4] 캐나다군 셔먼 파이어플라이 전차의 협공설[5], 영국군의 공격기 호커 타이푼의 지상공격 로켓 피탄설[6] 등이 있으나, 현재는 영국군 또는 캐나다군 소속 파이어플라이의 공격에 의한 피탄, 전사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포탑을 관통한 포탄은 탑재된 탄약에 화재를 일으켰고 비트만 이하 탑승 승무원 전원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또한 이 전투의 전개 당시 비트만은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대장 대신 대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의 경과를 두고 전차장으로서는 유능했으나 중대장으로서나 대대장으로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을 한 이들이 전후 군역사가들 중 일부라는 것을 감안하면 별로 신뢰할수 없다. 실전에선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대대장 대리로 현장에 걸맞는 상황 파악능력과 지도력으로 여러번 소련군을 엿먹였다. 게다가 당시 비트만 부대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열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3기의 전차를 격파하는 활약을 펼친 것을 볼 때 단차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만큼은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팔레즈 포위전은 독일군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이어서 자신들의 부대원을 단 한명이라도 탈출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상황인데도 그와중에 연합군을 엿 먹일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비트만의 티거를 격파한 걸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인물로는 영국 노샘프턴셔 요먼 기병대 A중대 소속 파이어플라이 포수 조 에킨스(Joe Ekins)가 있고, 조 에킨스보다는 관련자료가 적지만 다른 하나로 레들리 월터스 소령이 있다. 문제는 '''래들리-월터스는 에킨스와 달리 관련증언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7]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분명 전 독일군 기갑병들을 통틀어서 탑에드는 에이스 전차장이다. 하지만 현재 독일연방정부는 미하엘 비트만의 공적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우선 미하엘 비트만이 SS 친위대 소속 군인일 뿐만 아니라 '''초기 SS 친위대에 자원 입대한 극렬한 나치주의자'''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현재 독일연방군은 전직 국방군 소속 군인들을 모집해 만들었지만, 그 계승은 절대 부정하고 있는데, 전범집단으로 분류된 친위대는 아예 논외이며 친위대 소속 군인들의 군공이 앞으로도 인정될 가능성은 없다.
다만 비트만은 직접적인 전쟁범죄를 저지르진 않았기에 군공은 인정되지 않을 지언정 전범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만약 애초에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이었다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에 묻힐 일은 없었을 것이다.

3. 기타


국내에는 일본의 밀리터리 극화 작가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강철의 사신호비스트를 통해 `90년대에 번역 출판됨으로서 일찌감치 알려졌다. 이 만화는 2014년에 길찾기에서 다시 정식으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싱글플레이 미션 중 하나인 '티거 에이스'가 비트만의 빌레르보카주 전투를 모티브로한 미션이다. 플레이어는 여기서 티거의 막강함을 느끼면서 영국군을 때려잡을 수 있다. 첫번째 미션이 끝난 후 티거가 파괴되는데 탈출한 승무원들에게 판저슈렉을 들려주고 직접 전투에 나설 수 있다. 미션을 완수하면 생전에 미하엘이 몰았다고 알려져 있는 205호 티거의 스킨을 보상으로 받을수 있다.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서 조 에킨스, 래들리-월터스와 더불어 자기 이름으로 된 업적이 있...었으나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다는 이유로 독일측에서 명칭 변경을 요청했다.
Dies irae의 등장인물 괴츠 폰 베를리힝엔카지리카무이카구라의 등장인물 천마 오타케의 모델이 이 인물이다.
홍콩의 모형회사 드래곤에서 2014년 12월, 비트만이 탔던 초기형 S04번 티거를 재현한 키트를 내놓았다. 위의 80대 격파기념 및 포수 발타자르 볼[8] 의 기사철십자상 수여 기념사진의 티거를 재현하였다. 만져본 사람들의 평가는 초기형 티거의 결정판.
[1] 1944년 1월 18일 88대 격파기념 및 포수 발타자르 볼의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를 기념하기 위한 사진이다.[2] 사실 전차보다 대전차포는 제대로 매복한 경우 발포하기 전까지는 있다는 사실도 알기 어렵다는 문제 때문에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므로, 그런 대전차포를 130문이나 파괴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다른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도 대전차포 하나 격파가 전차 두개의 가치가 있다고 자서전에서 밝힐 정도이다.[3] 만화 강철의 사신에선 3호 전차장 시절은 누락되어 있다. [4] 매체들마다 그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가 달라서 (만화 강철의 사신에선 파이어플라이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 대전 만화에선 호커 타이푼의 공격으로 전사했다고 나오는 등 여러모로 엇갈리는 상태이다.[5] 여기에서 당시 자유 폴란드군의 6파운더 대전차포가 한 몫을 했는데, 파이어플라이가 접근하기 전까지 티거를 도시 내에 묶어놓는 역할을 바로 저 6파운더가 해낸 것이다. 계속 다굴을 치니 궤도도 끊겨서 움직이지 못한 것을 파이어플라이가 와서 완전 끝장을 내버렸다는 이야기다.[6] 이 설은 영국군 작전보고서가 드러남에 따라 수십년 전부터 낭설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굽시니스트 만화에 나올 정도로 2010년대까지 끈질기게 남아있는 이유는 '''그 비트만이 적 전차에게 당할 리가 없다!'''라는 발타자르 볼등 전우들의 주장과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군사매니아들의 선입관 문제도 있다.[7] 그리고 레들리 월터스가 2015년에 타계하여 앞으로도 이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8] 애칭, 발티. 역시 티거 에이스로 100대 이상의 전차를 격파한 인물이다. 비트만의 기록을 이야기할 때 볼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활약하였다. 1944년에 사망한 비트만과 달리 볼은 당시 부상으로 본국에 후송되었던지라 1990년대까지 생존했다. 볼은 죽을때까지 "우리 비트만 형님이 파이어플라이 따위에 당했을 리 없다." 면서 타이푼 공격기의 공중공격에 당했다는 설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