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크니스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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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t Knispel''', 1921년 9월 20일~1945년 4월 28일
1. 개요
'''168대의 전차(공식기록[1] )를 격파한 독일군[2] 1위의 전차 에이스'''
독일 국방군의 전차 에이스이다. 쿠르트 크니스펠(Kurt Knispel, 1921.09.20~1945.04.28)은 주데텐란트(Sudetenland) 출신의 독일 육군 전차 탄약수, 포수, 그리고 전차장이었다. 그는 요하네스 뵐터(Johannes Bölter), 에른스트 바르크만(Ernst Barkmann), 오토 카리우스(Otto Carius),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과 더불어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알려져 있다.
대다수의 전차 에이스들이 위관인것과는 달리 에른스트 바르크만과 더불어 '''부사관'''이었다. 최종계급은 육군 기갑상사이다. (후술할 일화를 보면) 나치 사상과도 거리가 멀었던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인물이었다. 탑승차량은 2호 전차, 3호 전차, 4호 전차, 5호 전차 판터, 6호 전차 E형, 6호 전차 B형이다. 그야말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일반 전차들은 다 타본 셈.
하지만 그가 이루어낸 공식 1위의 전차 격파 스코어(포수시절포함)를 생각하면 굉장히 아이러니할 정도로 낮은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대표하는 전차 에이스로 유명한 오토 카리우스나 미하엘 비트만 이상의 격파 스코어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낮은 유명세에 대해서는 크니스펠에게는 미하엘 비트만의 빌레르보카쥬 전투와 오토 카리우스의 마르나파 전투같은 드라마같은 전투가 없었던 것을 원인으로 꼽기도 하며 대전 중 사망하였다는 점을 꼽기도 한다. 또한 나치 수뇌부에 대하여 반항적인 성향 때문에 당대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이용되지 않았던 것 역시 낮은 인지도의 원인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요하네스 뵐터나 상술한 알베르트 에른스트 같은 에이스들도 대전 후까지 생존하였음에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음으로 증명된다.
2. 유년기
쿠르트 크니스펠은 1921년 9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지방의 추크만텔 근처의 작은 마을 잘리스펜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니콜라스도르프에서 보냈고 1940년 자동차 공장에서의 수습 과정을 마치고 독일 육군 기갑부대에 지원한다.
기본 훈련을 위해 크니스펠은 질레시아(Silesia)의 자간(Sagan)에 있는 전차 전환 교육대대(Panzer Replacement Training Battalion)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기본 보병 훈련을 거쳐 1호 전차(Panzer I), 2호 전차(Panzer II), 그리고 4호 전차(Panzer IV) 운용 교육을 받았다. 1940년 10월 1일 그는 제12 기갑사단 29 기갑연대 3 중대로 배치되었다. 크니스펠이 훈련받은 분야는 4호 전차 탄약수와 포수였다. 훈련은 1941년 6월 11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자간과 푸틀로스(Putlos)를 오가는 과정도 포함되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냥 평범한 독일군의 성장과정 이겠지만 이후 그는 '''뛰어난 전차 에이스로써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3. 제2차 세계 대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크니스펠은 헬만 소위가 지휘하는 4호 전차의 포수였다. 헬만 소위의 전차는 당시 아돌프 프리드리히 쿤첸에 의해 지휘되던 제57군단[3] 에 소속되어 있었다. 크니스펠의 전차는 야르체보에서 스탈린그라드 입구까진 진격했으며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타흐킨까지 활동하였는데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에베르하르트 폰 마켄젤의 지휘를 받을 당시에는 캅카스까지 갔었다. 이 때부터 전차 에이스의 자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43년 1월 말에 추가로 12대의 전차를 격파한 그는 푸틀로스로 귀환해 한창 활약하기 시작한 6호 전차 티거를 보급받아 포수로 배속 받게된다.
푸틀로스에 있던 집단원 일부는 파더부른의 지휘를 받는 제 500기갑대대로 재배치된다. 크니스펠은 제 503 중전차 대대로 소속되어 제 7기갑사단의 측면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 코르순~체르카시 돌출부에서 비비타, 잠폴, 카메네츠, 포돌스크에서 추가적인 전투에 참여하여 아군을 지원하였다. 동부전선에서 탈출한 그들은 이후 중대는 본국으로 귀환하여 티거 2를 지급받아 캉에서 전투를 벌여 노르망디에서 탈출하였다.
동부전선에 다시 투입된 그들은 메죄퇴르, 퇴뢰크센미클로시, 체를레드, 케체메트, 그란 교두보, 글라, 리트라, 바프 성[4] , 라 안 데어 타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보지츠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그는 다른 전차의 전차장인 슈코다 상사와 함께 중상을 입고 만다. 슈코디는 현장에서 전사했고, 시신은 후송되어 소헤를에 매장되었다. 크니스펠은 우르바우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1945년 4월 28일 2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사망한 날이고, 그로부터 '''불과 10일 뒤에 나치 독일은 멸망한다.'''
4. 시신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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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9일, 체코정부는 브루보베츠[5] 의 한 교회에서 15구 가량의 독일군 유해를 발굴했고 고고학자들은 '''제 15기갑보충대대 4중대 812번'''이라고 적혀 있는 군번줄을 발견하여 신원이 확인되었다. 이후 유해는 브르노의 군인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
크니스펠은 격파전적을 제외하고서라도 '''3km 밖에서 T-34를 격파'''[6]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탄약수, 포수, 전차장을 모두 경험했으며 50대를 격파할 당시 1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100대를 격파할 때는 은색 기갑기장을, 126대를 격파했을 때는 독일 황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당시 국방군 보도방송에서 보도한 유일한 '''부사관'''이었으며 이후 티거, 티거 2를 운용하면서 42대를 추가로 격파하였다.
그는 무려 4번이나 추천 되었음에도 끝내 다른 전차 에이스들이 가지고 있는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전차장들과는 달리 그는 훈장이나 공적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며 덕분에 그는 인후염[7] 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겸손하기로도 유명했는데, 전적 문제로 다른 전차장들과 충돌이 발생하면 그는 기꺼이 '''한발 뒤로 물러나 공적을 양보하였다.[8] 이에 불평하는 동료 승무원들에 대해선 웃으면서 달래주었다고 한다.
크니스펠의 진급이 더뎠던 것은 크니스펠 본인이 전공에 관심이 없어서 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나치 당국의 높으신 분들과의 충돌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나치즘을 좋아하지 않았고, 한번은 동부전선에서 소련군 포로를 학대하던 '''아인자츠그루펜 장교를 폭행한 적도 있었었다.'''[9] 그리고 위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용모도 불량한 편이었는데 정리되지 않은 긴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문신을 하고다녔기 때문이었다는 .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번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의 뛰어난 능력과 전공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정치성향은 거의 중립에 가까웠는데, 상술했듯 나치즘을 싫어했지만 공산주의는 더더욱 싫어했으며, 연합군인 미국과 소련, 영국도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지하거나 관심을 표한 정치정당도 없었고, 총통 히틀러에 대해서도 딱히 부정하거나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동료들과 유가족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냥 정치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정치적으로는 모호했던 인물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쿠르트 크니스펠은 명예와 전적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던 모습과 오히려 화를 내는 동료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 위인전에서나 볼법한 사람의 인성과 성품이다.
6. 수훈 내역
- 1급 철십자상
- 은색 기갑기장
- 금색 도이치 십자장
라고 언급되었던 바 있다.'''"중전차 부대의 부사관 크니스펠이 1942년 7월부터 1944년 3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약 101대의 전차를 격파했다."'''
7. 기타
- 게임 월드 오브 탱크에서 그의 이름을 딴 훈장이 있다. 적에게 입힌 피해량과 적에게 받은 피해량의 총합에 따라 4급으로 나뉘어 지급된다.
- 본문은 다음에 기반하여 쓴 것이다. 추가적인 참조문으로는 쿠르트 크니스펠 워 썬더 뉴스를 보라.
- 게임 로드 투 발러:월드워2에서 동독 진영 영웅으로 나온다. 커트 크니스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성능은 상당히 좋다.
[1] 비공식 기록은 '''196대'''[2] 국방군, 친위대 모두 포함.[3] 나중에 57기갑군단으로 개명한다.[4] 밥 캐슬, 이 때 크니스펠은 이 전투에서 24차례나 적 전차에 피격당했다는 무전을 보고했다.[5] 구 우르바우[6] 당시의 원시적인 저배율 조준장치로는 2000m 이상은 매우 운이 좋은 것이며, 3000m면 저게 전차가 맞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거리다.[7] 기사 십자상에 심각하게 신경을 쓰는 독일군 사이의 은어[8] 이것이 대단한 것인게, 국적과 소속을 불문하고 이러한 전과기록 때문에 동료끼리 싸우는 경우도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태평양 전선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수송기가 격추됐을 때, 두 P-38 파일럿이 서로 자신이 격파했다고 주장하며 싸운 사례가 유명하다. 이 때문에 비공식 기록은 무려 196대로 추정된다. 실제로 그와 같이 싸웠던 동료들은 그가 공식기록 보다 더 많이 격파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9]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천하의 개쌍놈들 집단에다 높으신 분들의 실드로 국방군, 심지어 같은 무장친위대 내에서 조차 독일군의 수치라며 매우 싫어했던 인간 쓰레기들이다. 그런 놈들을, 심지어 그 중에서도 장교를 폭행했다는 것.[10] 다만 다른 사진들을 보면 제대로 군복을 입고있고 깨끗히 면도한 사진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위 사진이 찍혔을 당시에는 급박한 전선으로 인해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