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민
1. 개요
前 한화 이글스의 포수. 주로 포수로 출장했지만 외야수도 겸업했으며, 은퇴한 후로는 경찰 야구단의 배터리 코치가 되었다.
고교야구 시절 강민호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엄청난 포텐셜을 갖고 있었지만, 기회도 없었고[1] 코치진도 무능해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매우 아쉬운 선수.
2. 선수 시절
공주고 시절 팀의 주전급 포수였으며, 당시 이정식, 강민호와 함께 포수 3대장으로 꼽혔었다.
200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한화에 지명되었는데 당시 한화의 포수는 모두 20대 후반 및 30대 이상에 다들 뭔가 하나씩 부족한 면이 있어서, 포수 전력을 보완하고 몇 년 뒤부터 시작될 포수들의 대량 은퇴 이후를 위해 박노민을 지명했다.[2][3]
그러나, 주전포수 자리 경쟁에서 SKH 1, 2호기 선배들과 경쟁해야 했다.[4][5] 그래도 2군 무대에서는 상당히 활약, 핵심 포수로서 가능성 인정받았다. 그리고 05시즌 종료 후 과감히 상무를 통한 군 입대를 선택한다. 고졸 출신으로 프로 데뷔 2년만에 군에 입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현명한 선택으로, 2011년 현재 한화 차세대 주전포수로 군필인 박노민이 가장 유력하다.
상무 제대 후 2008년 신인지명을 받은 이희근이 1군 백업포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해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그래도 전통적으로 포수가 약한 한화의 핵심 포수 유망주라, 대부분의 전지훈련에는 모두 참가할 정도로 기대를 받고 있으며, 2군을 거친 대부분의 투수들과도 호흡이 좋다.
2009시즌에 1군에서 총 46경기를 뛰며 가장 많은 출장을 기록했으나, 2010시즌에는 한대화 신임 감독이 신경현-이희근 체제를 선택하면서 출장회수가 21경기로 줄었다. 이는 2011시즌에서도 마찬가지라 신경현이 부상일 때 1군에 콜업되고, 이희근이 가벼운 부상을 입은 직후 2~3경기에서 선발출장했으나 신경현이 1군에 복귀하자마자 도로 2군으로 내려갔다.
2.1. 2011 시즌
몇 안 되는 2011시즌 1군 경기에서 투수들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으나, 이는 하도 2군에 있어서 1군 붙박이 투수들과 배터리를 맞춰본 적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 그런 점을 감안하고 보면 상당히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양훈과의 배터리를 짠 경기에서 양훈이 완봉승을 했다는건 생각해볼만한 요소였다.
그러던 중, 이희근의 부상으로 1군에 콜업되어 다시 기회를 부여받던 7월 1일 경기에서 발 빠른 '''안치홍'''과 '''이용규'''의 도루를 모두 막아내며 2아웃을 잡아내고 어려운 파올플라이까지 처리, 1이닝을 혼자 막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수비능력이 많이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11시즌 전반기 내내 신경현과 이희근의 환상적인 도루저지능력(…)에 좌절했던 한화 팬들은 드디어 포텐이 터지는구나 하고 칰레발중.
7월 5일 LG전에서도 양훈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며 9이닝을 단 1실점으로 막아내는 철벽 배터리를 보여주었다. 신경현에 비하면 상당히 공격적인 볼배합을 주문하는 모습이 인상적.
경쟁자 중 이희근과 나성용, 신경현은 각기 군문제와 나이로 팀을 떠나기에 곧 기회를 얻겠지만, 포수진 중 비슷한 공격형 포수인 정범모가 군 입대를 마치고 2011년 중순에 이르러 재활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같이 경쟁을 시작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는 상태로 각성이 필요한 상태이다.
8월 신경현의 끝없는 삽질을 틈타 기회를 잡는 듯 했으나 '''꼬리뼈''' 부상으로 아웃되었다.
이후 2011 시즌이 끝나도록 올라오지 않아 꼬리뼈에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한화팬들이 모두 궁금해 했었는데, 시즌 종료 후 들려온 소식에 따르면 꼬리뼈 부상은 다 나았고, 팔꿈치 수술 후 재활 중이라고 한다.
2.2. 2012 시즌
신경현, 최승환, 정범모 등이 타격과 수비에서 모두 만족하지 못할만한 성적을 내자 모두 박노민을 애타게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커뮤니티에서도 박노민을 찾기 시작하게 되며 그에 부응하는 듯 시즌 말 확장엔트리에 포함되어 1군으로 콜업되었으나 9월 타율 1할2푼1리(...)에 수비는 수비대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한화 팬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부상 후유증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를 보여주는 등 이래저래 한화의 포수난의 걱정만을 안겨주었다. 유리몸이 여러모로 악영향을 준 셈.
2.3. 2013 시즌
2012시즌과 달리 공격에서는 역시 변화구대처에 미흡하고, 스윙이 많이 나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한화의 포수치고는 좋은 득점권 타격으로 어느 정도 공헌을 했다. '''그러나 역시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 도루저지 면에서는 꽤나 강견으로 좋은 모습을 보인데 반해, 다른 수비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특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블로킹 능력 때문에 결국 2군으로 떨어졌다.
2군에서도 양적으로만 두터운 한화의 포수 뎁스 덕분에 지명타자 등으로만 나오다가 교육리그는 결국 외야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결국 포지션을 전환하게 될 듯.
2.4. 2014 시즌
6월 20일 시즌 첫 1군에 등록되었고, 5일 동안 2경기 대타로 나오는데 그쳤으며 닷새 뒤인 25일에 다시 말소되었다. 대신 올라온 선수는 정현석. 시즌 후 2군 홈런왕 자격으로 상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마무리 훈련으로 이동걸 등과 사이좋게 불참하게 되었다.
2.5. 2015 시즌
김성근 신임 감독의 지도하에 훈련을 받고 있다. 여기에 얽힌 에피소드가 하나 나왔는데, 2014년 11월 오키나와 마무리 캠프 당시 박노민이 타격훈련 때 무의식적으로 팔꿈치가 자꾸 들리는 걸 본 김성근 감독이 이걸 고치려고 줄을 가져온 후 박노민에게 "팔하고 몸을 묶어라." 지시했다. 이에 박노민은 긴장하며 머뭇거리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김성근 감독을 묶으려고''' 했다. 이에 놀란 김성근 감독이 뭐 하는 거냐 묻자 김성근 감독을 묶으려던 박노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었다. 김성근 감독은 자기가 아니라 박노민 자신을 묶으라는 의미였다라고 알려줬고, 그제서야 파악한 박노민은 자기 양팔을 몸통에 꽁꽁 묶었다.
고치 스프링캠프부터 외야수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외야수 전향은 2013년부터 이뤄졌고 실제로 2군에선 우익수로도 출장한 적이 제법 많은데, 1군에서 보인 적이 없을 뿐이다. 완전한 포지션 전향이 아닌지라 외야수 훈련 후 포수 훈련을 또 받는 상당히 빡센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팬들의 반응도 타격에만 더 전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편이다. 실제로 자체 홍백전, 연습 경기에선 홈런을 심심치 않게 쳐냈다.
6월 23일에 1군으로 콜업되었다.
7월 2일 기아전에선 5회 초에 이성열 대타로 나와 볼넷으로 나갔는데[6] 이 다음 타석이 딴 사람도 아니고 무려 '''김태균'''. 클러치능력이 그야말로 물오른 상태였던지라 이해안가는 처사로 평가받으며 박거김 이야기가 어김없이 나왔다. 1루에 간 뒤엔 대주자 장운호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물론 다음타석에 나온 김태균은 2타점 적시타를 쳤다.
7월 3일에도 6회말 이성열의 대타로 등장. 이날은 별 활약 없이 물러갔다. 팀은 승리.
7월 16일 롯데전에서 8회 말에 악송구와 관련돼 문책성으로 교체된 허도환을 대신해 출장, 9회 초에 안타 하나를 뽑아냈으나 팀은 패배했다.
7월 21일 kt전에서 대타로 나와서 스쿼즈성 땅볼로 희생타를 쳐 1타점을 추가하는 쏠쏠한 활약을 했다. 조인성이 빠지고 강경학 타석에서 대타로 나온 터라 포수로라도 써먹게 되는 건가 했더니 이후 바로 허도환과 교체해서 이날의 활약도 짧게 끝. 이 경기까지 7월 중 박노민이 나온 날은 한 경기 빼곤 전부 이겼다(...).
9월 8일 LG전에서 이시찬과 교체되었으나 무사 1, 2루에서 쓰리번트 아웃을 당하며 경기를 혼돈으로 몰고 나갔다.
2.6. 2016 시즌
한 때 조인성, 차일목, 허도환과 함께 1군에 있으며 포수로 출전하지 않을까 기대를 모았으나 내야와 외야, 대타로도 부진한 끝에 9월 20일 김태완과 함께 웨이버 공시가 됐다.
3. 지도자 생활
웨이버 공시된 이후, 2017년 경찰 야구단의 배터리 코치에 임명되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윈터 리그에 파견되었다. 2019년에는 한화 시절 동료였던 김인철 감독의 부름을 받고 청주고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다.
4. 기타
여담이지만 응원가가 없다. 2013 시즌에 새롭게 등장한 포수 한승택이나 엄태용, 정범모나 최승환도 응원가가 있는데 박노민만 응원가가 없었다.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적어도 강민호는 2006년 포수로 전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는 등 박노민과는 넘사벽으로 기회를 꾸준히 받았다.[2] 박노민이 지명을 받던 2003시즌 당시 주전포수인 조경택은 변변치 못한 성적을 내면서, 이도형이 두산에서 오자마자 주전자리를 뺏기고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백업포수인 신경현과 심광호를 보조해줄 젊은 백업도 필요한 상황이었다.[3] 이 포수지명은 이후 05 정범모, 06 최연오, 07 이희근, 10 나성용으로 이어지는 연속 포수상위지명의 첫 단추가 된다. [4] 이전 글에는 2005년에 이도형이 영입되었다고 했는데, 이도형은 2001년에 한화에 왔다.[5] 이도형이 주전포수가 되나 싶었으나, 신경현에 비해 수비가 약했고, 결정적으로 2004년에 당한 부상덕에 신경현이 주전포수가 된다. 그리고 이도형은 지명타자, 백업포수로 활동한다.[6] 보기에 따라선 거른 게 아니라 제구난조로 볼넷이 나온 것처럼도 보인다. 판단은 독자가 직접 보고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