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현

 

'''신경현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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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등번호 42번'''
엄종수

'''신경현(1998)'''

장재혁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32번'''
임수민(1998)

'''신경현(1999~2001)'''

고지행(2003~2003.4.25)
임재철(2003)

'''신경현(2005~2013)'''

이동걸(2014)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100번'''
결번

'''신경현(2014)'''

박한길(2015)
<color=#373a3c> '''한화 이글스 등번호 92번'''
조정원(2013~2014)

'''신경현(2015~2017)'''

염진우(2018)


'''이름'''
신경현(申炅賢 / Kyung-Hyun Shin)
'''생년월일'''
1975년 11월 28일[1]
'''출신지'''
전라북도 군산시
'''학력'''
군산중앙초-군산중-군산상고-동국대
'''가족'''
아들 신지후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2차지명 1라운드 (전체 2순위, 한화)
'''소속팀'''
'''한화 이글스 (1998~2013)'''
'''지도자'''
한화 이글스 육성군 배터리코치 (2014)
한화 이글스 2군 배터리코치 (2014~2015)
한화 이글스 1군 배터리코치 (2015)
한화 이글스 2군 배터리코치 (2016)
한화 이글스 1군 배터리코치 (2017)
한화 이글스 육성군 배터리코치 (2017)
북일고등학교 코치 (2018~ )
'''응원가'''
Village People 《Macho Man》[2]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시절~2008년
2.2. 2009년
2.3. 2010년
2.4. 2011년
2.5. 2012년
2.6. 2013년
3. 지도자 시절
3.1. 2014년
3.2. 2015년
3.3. 2016~2017년
3.4. 2018년
4. 평가
5. 응원가
6. 그 외
7.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한화 이글스의 前 1군 배터리 코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포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시절~2008년


군산 출신으로 군산상고동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한화에 2차 1순위 지명된다.
군산상고 시절에는 탁월한 신체조건과 공격과 수비 모두 뛰어난 천재형 포수로 평가받으면서 '군산야구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서 고교 졸업 당시 쌍방울은 그를 입단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대학행을 막지는 못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신경현이 이 때 바로 프로에 왔다면 오늘날의 박경완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에도 대학 최고의 포수 중 한명으로 자리잡으면서 만능포수라는 평가를 받았고, 96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리그에서 동국대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대학 최우수 포수상을 받았다. 국가대표선수로도 뛰면서 그 성적을 입증한 신경현은 한화에 2차 1번으로 지명, 큰 기대를 받으면서 프로에 입단한다. 현대 유니콘스의 등장 이후 계약금이 급격하게 올라갔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포수 유망주가 2억 6천의 계약금을 받은 것으로 그 기대치를 알 수 있다. 심지어 한화 이글스가 신경현을 지명하기 위해 고의패배를 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이러한 큰 기대를 받고 입단한 신경현이었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고 강병철 감독은 신경현의 몸 상태를 탐탁지 않아했기에 2주 내에 10kg를 감량하라는 명령을 했다. 실패시 벌금 200만원을 내는 조건을 붙였는데 연봉이 고작 2,000만원일때라 필사적으로 감량하다가 그만 허리에 부상을 입고 만다. 이 부상은 이후 커리어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는 요소 중 하나가 된다. 부상으로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한데다 선배 조경택을 밀어내지 못한 그는 2001시즌 종료 후 상무에 입대한다.
상무 야구단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그는 곧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 제대하자마자 한화의 주전 포수자리를 차지했다. 밀어치기 위주의 타법으로 안정적인 타율을 기록하면서 수비력에서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이도형심광호와의 주전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였다.
2006년 팔꿈치 부상을 입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 주전자리를 지켜내 한화 포수들 중 최초로 연봉 1억을 넘기기도 했으며, 2007년에는 4할의 도루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었으며 2008년 올림픽 브레이크 이전까지 팀의 호성적과 함께 부동의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20대부터 각종 부상에 시달리다보니 성장이 정체되어 기대치만큼의 성장을 이루진 못했으며 나이가 30이 넘어가면서 부상이 만성화되자 조금씩 기량이 떨어지며 수비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2.2. 2009년


2009년은 정민철, 송진우, 문동환 등의 투수진의 주전 멤버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유원상, 김혁민, 안영명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해였다.
급격한 세대교체로 인해 지금까지 고참 투수들과 배터리를 짰을때는 안 나타나던 문제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고, 나날이 얻어터지는 젊은 투수들의 문제까지 겹쳐 포수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아 한화이상군 1군 투수코치와 신경현만 방출하면 우승한다는 말이 돌을 정도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세월이 흐른 시점인 현재에 당시를 돌이켜보면 사실 팀에 총체적인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신경현이 대표로 비난을 받으면서 대체자로 백업출장을 하던 박노민이희근이 주로 거론됐다.
이 당시에 주로 욕먹던 것들은 '스트라이크도 볼로 만드는 궁극의 역미트질'과 고의사구를 연상케 하는 빠져서 볼 받기, 제구력 안 좋은거 아는 신인선수들에게 바깥쪽 핀포인트 요구하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화 이글스의 주전 포수였고, 박노민과 이희근은 어디까지나 백업이었다. 특히 류현진과의 궁합이 팀내 포수들 중 최고라고 평가받으면서 류현진 등판일에는 거의 어김없이 배터리로 뛰었고, 류현진도 항상 신경현 볼배합대로 던진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를 높게 평가했다. 동료 투수뿐만 아니라 현장 지도자 및 야구해설자들에게 신경현의 편안한 리드는 항상 칭찬의 대상이었다. 다만 이순철은 깠다.
이때문에 가끔 "신경현은 무난한 포수인데 투수들이 못 따라가는거다"와 "류현진이 그냥 대단한거다"라는 토론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전자의 의견은 대체로 소수파였다.

2.3. 2010년


2010년에도 시즌 초에는 삽을 너무 푸고 수비에서 여러가지로 답답한 모습을 보이면서 욕을 먹으면서 시작했으나, 시즌이 진행되면서 감을 잡기 시작하더니 도루저지율에서도 박경완에 이어서 2위를 랭크, 안경을 쓰고 경기에 뛰기 시작하더니 놀랍게도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즌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게다가 홈런을 기록한 주요 경기들이 류현진 선발 경기들이었던지라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고, 타율이 조금 낮고 팀의 성적이 꼴지라는 치명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공격부문에선 신경현 최고의 시즌이었다.
여담으로 이 해 같은 포수 포지션의 조인성도 안경을 쓰고 커리어 하이를 기록, 두 안경쓴 포수가 동시에 커리어하이를 찍으면서 H2노다 아츠시가 한 대사[3]가 명장면으로 인터넷에서 유행하는데 일조했다.

2.4. 2011년


전년도 커리어하이를 찍은 반동인지 1할의 타율과 1할의 도루저지율이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을 시작, 결국 자진해서 2군을 갔다가 5월 말에 1군에 복귀하나 제 역할을 못해줬으며, 류현진을 제외한 투수와 배터리를 맞췄을때는 제 몫을 해주지 못했다. 전반기 당시 부상이 악화된건지 경기를 뛰면서 상당히 몸을 사리면서(혹은 제대로 몸을 쓰지 못하면서) 경기를 뛰었는데, 대표적인 경기로 7월 3일 홈송구를 놓친 경기와 7월 19일, KIA전에서 홈송구를 놓친 경기 등이 있었다. 병살타를 치고도 1루까지 최선을 다해 뛰지 않는 산책주루에 투수의 패스트볼이나 바운드 볼시 몸을 던져 잡으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플레이 등을 보여줬다. 추가로 고질병으로 언급되던 역미트질도 여전했다.
전년도에 10홈런을 쳤던 타격도 하락세를 보여서 2할 초반에서 타율이 올라갈 기미가 없었으며 장타도 없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는 컨디션을 회복하고 다시 주전으로 출장하기 시작, 최종적으로 후반기 타율 3할을 넘겼으며 도루저지율 3할 5푼대를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2011시즌 한화 이글스의 후반기에서 이대수와 함께 방심할 수 없는 하위타선을 만들었다.
8월 20일경 두산전에서 더블스틸을 허용하면서 다시 까이기도 했으나 9월 3일 넥센전에서 손승락에게 동점타를 쳐낸뒤 다음날 4일 넥센 선발 브랜든 나이트에게 만루 홈런을 쳐내고 도루저지도 하면서 아직 팀에 기여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한동안 빠져있던 류현진이 오랫만에 선발로 나온 경기(9월 8일)에서 류현진에게 선발승을 안겨주는 결승타를 쳐내기도 했다.
시즌이 끝나고 정리해보면 평균치로 보면 성적이 크게 하락했으며, 컨디션에 따라 성적이 크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분명하게 노쇠화가 왔으며 본래 규정타석을 못 채우던 선수였긴 했으나 이젠 규정타석이 아니라 출전하는 게임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반기에는 분명하게 주전에 걸맞은 성적을 내면서 아직은 죽지 않았음을 보여줬기도 했지만, 이게 야구선수로서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 해에 유독 오른쪽 무릎에 파울 타구를 많이 맞았는데, 파울 타구에 맞고 교체된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포수요원 부족으로 무리하게 연장전에 출장하자마자 또 맞거나, 하루에 4차례 맞거나. 덩치가 커서 그런건지... 몸에 공 끌어들이는 자석을 달아놨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2011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 FA선언 의사를 밝혔고,# 11월 16일, 2011년도 FA자격자 중 처음으로 2년에 옵션포함 7억으로 계약을 맺었다.

2.5. 2012년


한상훈이 주장을 맡음으로써 3년간 맡아온 주장 자리를 내놓게 됐다. 그리고 주장자리와 함께 프로 커리어의 사실상 마지막 해를 지내게 된다.
정범모에게 주전자리를 완전히 뺏기고 백업으로 밀려났으며, 백업에서도 제 역할을 못 해줬다.
73경기 출장하여 타-출-장 0.181-0.253-0.181라는 타율과 장타율이 똑같은 비율스탯을 기록. OPS는 0.434에 불과해 김태균의 출루율 보다도 낮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홈런, 2루타, 3루타가 모두 0개로 장타도 없어졌다. 전부터 노쇠화가 심해지던 수비도 극악으로 안좋아져 도루저지율은 0.270으로 하위권에 그쳤으며 블로킹, 포구 등에서도 더 이상 주전으로 뛸 수 없는 상태임을 보여줬다.

2.6. 2013년


시즌 시작 이후 다채로운 신인 포수들의 등장과 함께 잊혀졌고, 시즌 도중 2군에서조차 출장기록이 없다는것을 팬들이 발견해 의구심을 자아냈다. 얼마 뒤 구단 측에서 신경현을 공익근무중인 선수들에 대한 전담 코치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사실상 선수로서는 은퇴로 보여지며, 코치로서의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FA 연봉을 그대로 수령하는 꽤나 비싼 코치다. 포스트 신경현의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갑작스런 퇴장을 아쉬워하는 팬들이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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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3년 8월 29일 은퇴를 결정했으며, 9월 14일 삼성과의 홈경기를 통해 16년 현역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은퇴식을 가졌다. 선발투수 데니 바티스타가 1회에만 2실점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타선이 끈기있게 따라붙어 4:3으로 역전승을 만들어내는데 성공, 팀 선배의 은퇴를 빛내주었다. 본인은 은퇴 후 지도자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9월 25일에는 엠스플의 류현진의 선발등판 경기 리뷰에 등장하였다.
10월 7일 류현진의 첫 포스트시즌 선발경기에 SPOTV에서 해설로 데뷔했다. 해설 신인이라 약간 버벅거리기는 하지만 의외로 말솜씨가 좋은 편이며 해설에 있어서도 투수의 볼배합을 읽어주는듯 상당히 좋은 해설을 하였다. 10월 15일 류현진의 NLCS 경기에 앞서서도 류현진은 같은 실수를 두 번 연속 반복할 선수가 아니라고 말했고, 정말로 류현진은 그 모습을 보여줬다.
11월 13일에는 류현진과 인연으로 인해 이병규, 김현수 등과 함께 같이 런닝맨에 출연했다고 한다. 방송은 11월 24일에 나왔으며, 류현진과 같이 팀을 짜고 초능력 야구를 하였다. 출연 야구선수 게스트들 중 가장 예능감을 폭발시키며 일명 인생경기를 했다는 드립들이 나왔다.
후반기 들어 류현진 관련 경기에 리뷰/해설로 등장하고 류현진과의 인연으로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기 때문에 은퇴 후에도 류현진에게 업혀가는 느낌을 준다는 평가도 있다.

3. 지도자 시절



3.1. 2014년


본래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코치 연수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한화 포수진이 리빌딩이 당장 시급한 관계로 2014 시즌부터는 육성군 배터리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2014년 4월 24일부로 분위기 쇄신차원이라는 명목으로 전종화 코치가 육성군으로, 조경택 코치가 1군으로 가게 되면서,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2군으로 이동했다.

3.2. 2015년


김성근 신임 감독이 부임하는 가운데 한화 코칭스태프의 적폐를 상징하던 인물인 조경택 코치를 비롯한 많은 칰무원들이 짐을 싸게 되었지만, 신경현 코치는 이상군, 임수민 코치와 더불어 한화에 남아 팀의 2014년 마무리훈련에 동행하게 되었다.
한편 9월 4일부로 1군에 승격되어, 같은 소속에 속했던 현역선수 절친과 마주보는 일이 생기게 된 것도 덤이다.

3.3. 2016~2017년


2016 시즌에는 2군에서 배터리코치를 역임하다가 시즌이 끝난 후 1군 배터리코치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짐을 싸게 되었다.

3.4. 2018년


아들이 있는 북일고등학교에서 코치를 하게 됐다.

4. 평가


커리어를 정리해보면 신인시절의 허리부상으로 인해 장타를 포기하고 밀어치기 위주의 단타만을 보여줬지만 타율 0.250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공격력은 갖추고 있던 타자였다. 또한 '투수 리드[4]에 문제가 있다'라는 팬들의 의견과 다르게 현장에서 신경현의 볼배합에 대해 크게 의문을 표하거나 투수들의 불만이 표출된 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젊은 투수들이 신경현과 배터리를 맞추기를 원할 정도로 볼배합에는 일가견이 있는 포수였다. 한편 후배 투수가 실수할 때마다 째려봐서 기를 죽인다고 일명 '신경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욕을 먹기도 했으나 이에 관련된 내용은 후술되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이 사실이었다면, 젊고 어린 신인급의 투수들이 과연 신경현과 호흡을 맞추려 하였겠는가를 생각 해 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비의 핵심인 송구 능력도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큰 편이었지만 전성기에는 주전 포수가 내야할 성적은 내줬다. 유리몸이라 300타수를 넘긴 시즌이 단 한번밖에 없었으나 의외로 경기 숫자는 100경기 이상씩은 꼬박꼬박 출전해줬으며, 커리어의 마지막을 찍을때까지도 70경기는 넘겼다.
정리하면 '''전체적으로 겉으로 크게 두드러지는 장점은 별로 없었지만 반대로 겉으로 크게 두드러진 단점도 없었던''' 선수였다.
이러한 애매한 성적은 팬들이 기대했던 성적은 아니였기에 항상 질타와 비난을 받았으며, 09년 이후로는 투수 유원상과 함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김동수, 박경완, 진갑용, 조인성으로 시작하는 같은 세대의 선수들부터 한 세대 아래의 강민호에 이르기까지 그가 있던 같은 시대에 걸출한 선수들이 많았던 것도 그에게는 불운이었다.
게다가 야구가 다시 인기를 얻고 자리를 잡은 2008년 올림픽 이후에 한화는 꼴지팀으로 몰락해 각종 인터넷에서의 비난여론도 크게 활성화된 상태였는데, 하필 투수진도 제몫을 해주는 선수들 대부분이 은퇴하고 김혁민, 유원상 등 반쪽짜리 역할밖에 못해주던 젊은 투수들이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투수진들을 신경현이 이끌어야했고, 이에 따라 투수들이 부진한것에 대한 비난도 동시에 받아야 했다. 또한 부상악화로 인한 수비에서의 불안정함[5]도 이러한 비난 여론에 한 몫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체할 선수가 나오지 않으면서 그는 꾸준히 자리를 지켰는데, 이 때문에 한때 한화가 성적이 안나오는 원인으로 꼽히는 기량발전이 없는 4명의 선수인 의 한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속에서도 꾸준히 자기 자리를 잡고 팀에 기여해왔고 결국 한화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신경현의 선수시절을 다시 돌아보면 한화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남긴 것을 알 수 있다. 신경현이 주전으로 자리잡으면서 빙그레 시절의 주전포수였던 김상국 이후로 공수에서 수준이하의 포수진밖에 없었던 한화 포수진이 10여년만에 안정되었으며, 빙그레를 포함한 이글스 역대 포수 중 10년 가까이 주전을 차지한 유일한 포수였다. (8년)
또한 타팀에서의 이적[6] 없이 순수하게 이글스에서 키워낸 첫번째의,[7] 그리고 이후 그 뒤를 잇는 포수가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보면 유일한 포수였으며, 이것은 이글스의 포수육성이 그동안 얼마나 답이 없는지에 대한 반증도 된다.
최종적으로 보면 '''리그 최고의 포수는 아니였지만,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고자 노력한 포수'''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은퇴한 이후, 한화의 유망주들인 박노민, 정범모, 이희근, 이준수, 한승택 모두 공수에서 적정수준을 넘지 못하고 주전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결국 조인성, 허도환, 차일목 등 외부 인력을 활용, 팬과 코치진들에게 절망과 공포를 주면서 신경현을 욕했던 팬덤에서도 "신경현이 우리가 생각했던것보다 좋은 포수였던거 같다", "이럴땐 신경현이 보고싶다"라는 이야기가 가끔씩 나오기도 한다.
2016년 한화 포수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신경현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나마 2017년 최재훈의 영입으로 한화도 포수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차일목이 묘한데서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최재훈은 결국 신경현의 뒤를 이어 한화의 안방을 책임지고 있고, 18시즌 지성준이 드디어 한화 출신으로 오랜만에 제몫을 하는 포수가 나왔나 싶더니 20시즌 전에 장시환과 맞트레이드되고 대형사고를 쳐버려서 아직도 한화출신 주전포수는 먼 이야기이다.

5. '''응원가'''



일단 들어보자. 소리가 크니 조심.
신경현의 응원가는 빌리지 피플마초맨을 개사한 곡으로 쉬운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로 따라부르기에도 좋고 신나는 응원에 최적화된 응원가계의 전설급 노래로, 신경현의 은퇴소식이 들려오자 은퇴 자체보다 응원가를 더 못듣는걸 아쉬워 한 팬들도 있을 정도였다.[8] 게다가 '''특유의 엄한 몬더그린'''덕에 야구 밖에서 알려진 것도 한몫했다. 일각에서는 홍창화 응원단장의 많고 많은 업적 가운데에도 신경현의 응원가 선곡을 최고로 꼽고 있다.
별명 및 애칭도 응원가에서 따와 최고의 포수, 혹은 살짝 비꼰 채고(체고)의 포수가 되었을 정도이며 순전히 이 응원가 때문에 항상 역대 최고 포수 논쟁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박경완의 응원가 가사가 최고의 '''타자'''인 탓이 크다.
같은 멜로디가 넥센으로 간 박병호LG시절 응원가에도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9] 이후 김재율이 쓰다가 KBO 리그 응원가 저작권 사태로 인해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쪽은 정상적인 걸 넘어서 꽤 좋은 응원가로 기억되고 있다. 들어보자.
전근표, 정현석의 응원가와 함께 응원가계의 전설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15시즌 등장한 신인 신성현의 남동생과 동명이인에다가 포지션도 같은 포수라 만일 한화로 온다면 이 응원가를 다시 들을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팬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야구를 접고 공부에 열중한다고 하여 들을 일이 없게 되었다.
결국 '''신경현의 응원가는 2017년 한화 포수 공통의 응원가로 부활하며 불멸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인성, 차일목, 지성준의 이름을 넣어 3가지 버전을 새로 녹음했다.

6. 그 외


  • 얼굴을 자주 찡그리는 탓에 '신경질'이라는 별명도 붙었는데, 사실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시력이 좋지 않아 생긴 버릇이지 신경질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거기다 안구 건조증이라 라식 수술도 못 받는다고... 이해해주자. 안경 쓰고 나온 경기에서도 계속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눈에 띄지만, 이 역시 습관이 몸에 밴 탓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 한화에 신경현과 함께 백업포수로 심광호가 있었을 시절엔 둘의 이니셜이 같다는 것에서 착안해 신경현은 SKH 1호기, 심광호는 SKH 2호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심광호가 트레이드된 이후로는 1호기라는 별명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반면 심광호는 트레이드 된 이후로도 쭉, 심지어 은퇴한 지금까지도 당시의 팬들에게 2호기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 류현진이 201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LA 다저스로 건너간 이후 류현진과 단짝으로 배터리를 맞추는 주전포수 A.J. 엘리스에게 엘경현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더불어 신경현 특유의 '밀려치기' 타법을 류현진이 줄곧 선보여 옛 한화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 MLB에 간 류현진이 등판하는 날마다 문자를 보내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기사
  • 어째서인지 은퇴식날 경기를 다뤘던 야구친구에서 MVP로 선정해주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날 은퇴한 선수는 물론이고 복귀한 선수, 통산 기록을 갱신한 선수, 심지어는 심판의 오심에 항의하기 위해 등판(...)했단 이유로 김응용감독도 MVP로 선정해줬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 다만 삼성-한화전 리뷰 밑에 신경현의 은퇴와 관련된 동영상 링크를 첨부하긴 했다.
  • 은퇴에 발 맞추어, 마구마구 유저들 사이에서 신경현 레전드 카드 출시에 관한 떡밥이 돌고 있다. 체고의 포수를 비꼬기 위한 우스갯소리로 시작된 듯 하나, 기존의 레전드 카드 중 '왜 이 선수를 레전드로 출시해?' 라는 의문 부호가 붙는 카드들을 근거로 들며 신경현의 레전드 카드 출시를 옹호하는 유저들이 생겨나고 있다. 체고의 포수는 통산 600안타 언저리에 30홈런 정도 친 선수지만 레전드 카드 능력치 상한선에 의해 최소 70-77의 파워-컨택트 능력치를 받을 수 있어 이글스 계열 덱을 가진 유저들로 하여금 나온다면 롯데 올스타의 김민재 레전드만큼이나 엄청난 환영을 받을 듯 하다. 물론 기대 반 의심 반이다. 결국 출시가 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은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나버렸고 이도형도 한 때 레전드 카드 떡밥이 돌았으나 이 역시 출시가 되지 못하였다.
  • 2015년 정범모의 삽질 때문에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좋은 의미에서의 재평가가 계속 이뤄지고 있다.
  • 지금 신분은 코치인데도 사인 요청하면 "이건 선수한테 받으셔야죠?" 하면서도 사인 다 해주신다(...).
  • 아들 신지후도 야구선수이다. 2017년 북일고에 진학해 코치인 아버지와 한솥밥을 먹고 있으며, 포지션은 아버지와는 달리 투수. 아버지와 달리 포수를 안 한 이유는 아버지가 '포수는 힘드니 하지 말라' 조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투수로서의 재능이 출중한지 2020년 1차 지명자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지역 야구계에서는 신지후 군의 한화 1차 지명 가능성이 꽤 높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신지후가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으며 KBO 리그 사상 세 번째로 아버지가 뛰었던 팀에서 아들도 뛰는 사례가 만들어졌다.[10]
  • 프로 진출은 하지 않았지만, 신성현의 동생 이름이 신경현이다. 포지션도 포수.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8
한화
8
7
.000
0
0
0
0
0
0
0
1
.000
.125
1999
11
7
.000
0
0
0
0
1
0
0
1
.000
.125
2000
37
71
.155
11
2
0
2
5
4
0
5
.268
.211
2001
23
40
.325
13
5
0
0
6
5
0
5
.450
.400
2002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서 군 복무
2003
2004
97
274
.274
75
11
2
5
27
27
3
23
.383
.330
2005
110
321
.277
89
15
1
4
23
38
2
31
.368
.341
2006
100
272
.243
66
11
0
2
15
26
4
26
.305
.309
2007
107
260
.250
65
9
0
2
15
33
4
18
.308
.299
2008
107
296
.267
79
16
3
3
41
27
4
28
.372
.330
2009
78
176
.256
45
4
0
2
15
19
0
28
.313
.358
2010
119
253
.249
63
13
0
10
40
29
6
27
.419
.321
2011
103
233
.266
62
9
0
1
27
18
5
25
.318
.335
2012
76
149
.181
27
0
0
0
9
10
1
15
.181
.253
2013
1군 기록 없음
<rowcolor=#373a3c> '''통산(14시즌)'''
976
2359
.252
595
95
6
31
224
236
29
233
.337
.319


[1] 해당 생일은 음력 기준으로, 양력 기준으로는 1975년 12월 30일이다.[2] 한화 신경현~ 최고의 포수 신경현~ 한화 신경현~ 이글스의 안방마님~ (x2)[3] '''안경 쓴 포수는 조심해야 한다구.''' 저 말을 한 본인도 안경 쓴 포수다.[4] 정확히는 볼배합[5] 시즌 전체로 보면 나쁘지 않은데 컨디션에 따라 경기력이 심하게 차이가 났다.[6] 참고로 신경현 이전의 빙그레-한화 포수들은 외부영입이 주를 이뤘다. 유승안해태 타이거즈에서, 조경택이도형두산 베어스에서 트레이드 해 왔다. 양용모강인권은 데뷔가 빙그레-한화였지만 정작 타팀으로 트레이드 되어 괜찮은 백업요원이 됐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7] 빙그레 시절부터 따지면 김상국도 있긴 하다. 하지만 김상국은 마지막 커리어 2년을 현대 유니콘스에서 보냈다.[8] 은퇴식에서도 응원가가 흘러나왔다.[9] 안타 박병호~ 날려버려 날려버려 박병호~ 안타 박병호~ 날려버려 박병호~ 안타![10] 아버지가 뛰었던 팀에서 아들이 뛰었던 첫 사례는 유승안경찰 야구단 감독과 장남인 현 KT 위즈 소속 투수 유원상이다. 아버지는 MBC 청룡에서 프로야구 데뷔한 후 빙그레 이글스에서 전성기를 맞았고 유원상은 아버지와 반대로 한화 이글스에서 프로 데뷔를 하고 LG 트윈스로 이적해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두 번째 사례는 유승안 감독의 차남인 KIA 타이거즈 내야수 유민상이다. 아버지 유승안은 프로야구 초창기 해태 타이거즈에서 잠시 뛴 적이 있고 유민상은 현재 KIA 소속 선수다. 반면 부자 야구선수로 유명한 이종범이정후 부자는 서로 겹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