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야구/2004년/신인드래프트
1. 개요
2004년 KBO 신인 드래프트 (공식 명칭: '''2004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는 1차 지명과 2차 지명으로 진행되었다.
2. 1차 지명
2003년 6월 5일까지 각 팀에서 팀별 연고지 내 고교 출신 선수 중 1명을 뽑았다.
3. 2차 지명
2003년 6월 30일 서울특별시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3층 거문고홀에서 개최되었다.
고등학교 및 대학교 졸업 예정자, 상무 소속 선수들 등 총 701명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2]
3.1. 지명방식
1라운드부터 9라운드까지 진행되며 각 팀은 최대 9명의 선수를 지명할 수 있다. 단, 지명을 원치 않는 팀의 경우 해당 라운드에서 패스할 수 있다.
지명방식은 각 라운드마다 전년도 순위의 역순대로 지명하는 방식이다.
3.2. 지명 결과
- ※표시는 지명권 포기나 대학 진학으로 인한 지명권 소멸 등으로 지명팀에 입단하지 않은 선수.
- 볼드 표시는 스탯티즌 기준 통산 war이 2 이상 되는 선수들한테 부탁드립니다.
- 볼드 표시는 스탯티즌 기준 통산 war이 2 이상 되는 선수들한테 부탁드립니다.
4. 드래프트 평가
- 삼성 라이온즈: 강민호 거르고 이정식. 당시 이정식은 국가대표 출신 포수였던 반면, 강민호는 그저 그런 수비형 포수로 평가받았다. 당시만 해도 진갑용을 대체할 백업 포수가 삼성 라이온즈에선 전무했기 때문에[9] , 당시에는 당연한 선택일 수 밖에 없었으나 결과야 뭐... 그래도 이정식은 우승반지도 4개나 있고 진갑용과 이지영의 백업으로 쏠쏠히 잘 썼기에 아주 손해는 아니다. 훗날 2017년 시즌 후 강민호를 FA로 영입하면서 드디어 삼민호가 되었다. 또한 2008년 이후 주전 3루수로 자리잡은 1차 지명 박석민과, 역시 비슷한 시기에 삼성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윤성환을 2차 1순위로 건져 냈기에 결국 이 해 드래프트는 2002년 못지않은 대성공이었다. 안태영은 방출당한 후 고양 원더스로 갔다가 넥센 히어로즈에 이적하였다가 결국 방출당했다.
- SK 와이번스: 정우람을 제외하면 2010년까지 제대로 활약한 선수가 없었으나, 2011년 후반기부터 선발 투수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윤희상이 2012년 풀 타임 선발로 자리잡고 임훈도 1군 주전까지는 아니더라도 1군 멤버로 자리잡으며 어느 정도 성공한 드래프트라고 할 수 있을 듯. 1차 지명으로 뽑은 박권수는 아무런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채 묻힌 후 은퇴했으며[10] , 김진성은 방출당한 후 NC 다이노스로 이적해 불펜 에이스로 활약중이다.
- 롯데 자이언츠: 정우람을 거르고 2차 1번으로 지명된 투수 김수화는 대차게 말아먹고 2010년 넥센 히어로즈에 트레이드되었으나, 준수한 풀타임 선발이 된 좌완투수 장원준을 1차 지명으로 뽑았고, 동세대 최고 포수가 된 강민호를 2차 3번에서 건져 냈다. 최대성은 간간히 불펜으로 등판하다 2015 시즌에 KT로 트레이드되었다. 전준우는 건국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지명권이 말소된 후 2008년 드래프트에서 다시 잡았고, 포지션을 외야로 바꾼 후 터졌다. 암흑기 시절을 달릴 동안 가장 성공한 드래프트라고 평가할 수 있다.
- 한화 이글스: 1픽인 좌완투수 김창훈은 한화에서 폭망하고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되었으나, 향후 한화의 유일한 필승조 불펜이 될 송창식[11] 과 거포 인 최진행을 픽하였다. 보면 알겠지만, 선수 지명을 말 그대로 발로 했다. 이런 소수 지명으로 인해 2012년 서산 야구장이 지어지기 전까지 안습했던 2군의 거처와 부족한 선수층으로 인해 한화는 2008년 이후 비밀번호를 찍고 있다.
- 두산 베어스: 내야 백업에 그치던 김재호가 2013 시즌에 드디어 각성. 이전에도 내야 백업으로 2루-유격수 공백을 훌륭히 메워 왔다. 2015시즌, 2016시즌에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2018시즌엔 유격수 wrc+ 1위로 늦게 터졌지만 성공한 지명이되었다. 반면 윤석민은 터질 듯 터질 듯 안 터지다가 2012년 잠시 가능성만 보여주고 2013년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 용덕한은 건실한 백업 포수로 활약했다가 크게 찍히고 나서는 2012년 시즌 중에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다. 2차 5픽 구명환은 현재 KBO 소속의 심판으로 2018 시즌에 오심으로 한동안 매우 큰 논란에 휩싸였던 그 사람이 맞다.
- LG 트윈스: 1차 지명으로 뽑은 장진용은 2군에서만 잘던지다가 어쩌다 한 번 올라오는 1군에서는 탈탈 털리는, 말그대로 2군 페드로의 모습만 보이다가 2017년 방출되었고, 그나마 LG가 지명한 선수 중 터진 선수가 외야수 이용규 하나. 그것도 데뷔 첫 시즌 후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고 나서 터졌다. 이 트레이드의 본목적이 먹튀로 전락한 홍현우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2005 시즌 후 홍현우는 KIA에서 끝내 방출당했지만 꼽사리 껴서 간 이용규가 터지며 KIA의 승리로 끝났다. 때문에 기나긴 암흑기의 한 원인이 된 드래프트였다.
- 현대 유니콘스: 전년도에 이어 1차 지명이 박탈되어 픽을 하나 날렸고, 그나마 2차 1픽 좌완투수 오재영이 2004년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문제는 살아남은 선수가 오재영 한 명뿐이라는 것. 영흥고 선수를 2명이나 뽑았는데 당시 현대 스카우트였던 노춘섭이 영흥고 출신이라 지명한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2년 전 드래프트에서 현대는 영흥고 외야수 이운영을 지명한 적이 있다.
- KIA 타이거즈: 흉작. 내야수 김주형은 만년 유망주 신세로 결국 구단도 버티지 못하고 2019 시즌 종료 직전 방출되었다. 그나마 투수 이상화가 2006년에 마당쇠로 뛰었지만 너무 혹사를 당해서 2011 시즌 후 방출당해 은퇴하고 현재는 KIA 타이거즈의 전력분석관으로 있다. 좌완투수 박정태는 2011년 11월 22일 2차 드래프트를 통하여 삼성으로 건너갔고, 박근홍으로 개명한 후 1군에 자주 모습을 비치는 중.
5. 이모저모
- 2004 신인 지명부터 2차 지명의 경우, 지명권이 2년으로 줄었다. 따라서 고교 1년 유급이나 2년제 대학교를 마치고 입단하지 않는 이상 지명권이 소멸되므로 4년제 대학으로 진학한 고졸 선수는 대학 졸업 때 다시 드래프트에 나오게 되었다. 대학으로 진학한 전준우, 김준, 오현근 등은 2008 신인 지명 때 다시 참가했다.
- 또한 이는 차후 신인 지명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전에는 고졸 선수가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지명권이 유지되었기에 9명 모두 지명하게 되었지만, 2004 신인 지명부터는 9명 모두 지명하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구단 입장에서는 장래성 때문에 고졸 선수를 선호하지만 지명한 선수가 기량 발전을 위해 대학행을 선택해 버리면 구단은 애먼 지명권 하나를 날려버리는 셈이기 때문.
그러나 이처럼 신인 지명에는 소홀히 하면서 점점 육성선수 영입이 증가하며, 프로구단은 선수가 없다면서 선수를 안 뽑으면서 한편으로는 미지명된 선수들을 신고선수를 영입해 돈을 아끼려 한다는 비판을 들었다. 그래도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이런 문제는 사라졌다.
- 또한 이는 차후 신인 지명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전에는 고졸 선수가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지명권이 유지되었기에 9명 모두 지명하게 되었지만, 2004 신인 지명부터는 9명 모두 지명하지 않는 경우가 생겼다. 구단 입장에서는 장래성 때문에 고졸 선수를 선호하지만 지명한 선수가 기량 발전을 위해 대학행을 선택해 버리면 구단은 애먼 지명권 하나를 날려버리는 셈이기 때문.
- SK에 7라운드 지명된 김웅비는 동국대 진학을 선택하였으나 2008년에 지명을 받지 못하면서 2009년 KIA 타이거즈에 육성선수로 입단한다. 그러나 콜을 받지 못하고 은퇴, KIA의 프런트 직원이 되었다.
[1] 연고지 문제로 1차 지명에서 제외[2] 주의해야 할 것은 고교, 대학 졸업 예정자들은 전원 자동 지명 대상이다.[3] 2016년 시즌 도중 오주원으로 개명[4] 중앙대학교 (2004학번) 진학 후 2004년 신인 드래프트 지명권 소멸[5] 현재는 KBO 소속 심판이다.[6] 건국대학교 (2004학번) 진학 후 4년 뒤 롯데에 다시 지명.[7] 고려대학교 (2004학번) 진학 후 4년 뒤 SK에 2차 6라운드 지명.[8] 4년 뒤 SK에 다시 지명.[9] 2002년에 입단했던 현재윤이 본격적 백업 포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되었다.[10] 딱 1군 통산 1경기 0.2이닝 뛴게 끝. 은퇴 후에는 1차지명 출신이라고 홍보하면서 야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11] 물론 송창식도 팔꿈치 부상과 희귀병으로 잠시 야구를 그만뒀다가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