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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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OB-두산 베어스와 한화 이글스의 포수. 현재는 두산 베어스의 코치.
2000년대 중반 한화 이글스의 전성기 시절 주축으로 활약하며 많은 사랑을 받은 타자다. 또한 불합리한 FA 제도에 후배 선수들을 위해 자신의 선수 생명을 걸고 저항한 의미있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코치로서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그 이유는 배터리코치 시절에는 김태군이 입대하기 전까지 백업 포수를 단 1명도 키워내지를 못 했을 뿐만 아니라 타격코치로서는 2017 시즌 투수진의 활약에 비해 부진한 타선을 양산하는 문제점을 보이더니 '''2018 시즌에는 결국 역대급 물타선을 만들고야 만 장본인'''이 되었고, 이는 두산으로 옮긴 2019 시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2. 선수 경력
OB-두산 베어스에 있다가 2002년 1월 17일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3] 같이 OB-두산에 있던 김인식 감독이 2004 시즌을 마치고 한화에 부임함에 따라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됐다.
데뷔 시절만 해도 공수 겸비의 유망한 포수로 괜찮은 활약을 보였다.[4] 그러나, 후에 OB에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 등 국가대표 출신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바람에 포수 자리에서 밀렸으며, 1997년에는 '''시즌 중 현역으로 입대'''해야 했다. 그나마 지명타자 자리조차도 최훈재, 타이론 우즈, 강혁 등 줄줄이 강타자가 들어오는 바람이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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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현역 시절.
그러한 바람에 1999년에 제대하여 복귀하고 나서도 기회를 많이 잡지 못해, 2001 시즌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후 강인권를 상대로 현금 트레이드되어 포수 자리가 부실했던 한화 이글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한화의 주전 포수를 맡으며 뜬금포도 한 방씩 쳐주는 등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2004년 어깨 부상으로 포수로서의 활약은 접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장타력으로 지명타자로 들어서게 돠었다. 그러한 상황에 힘입어 2005 시즌에는 20홈런도 돌파하고 2006 시즌에는 팀의 주장을 맡는 등 한화에서의 입지가 나름대로 탄탄해졌다.
2007 시즌에는 이도형을 포수로 돌림으로 신경현-심광호-이도형 간의 경쟁을 통해 한화 포수의 질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신경현의 약진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되고, 이도형은 되려 부족한 타격훈련 탓에 그 해 1할대 타율을 찍는 등 그나마 장점이었던 타격부문에서조차 밀리고 말았다. 그 뒤 김인식 감독이 키우겠다던 정범모 등의 신인 포수, 그리고 지명타자 후보에도 김태완, 이영우 등이 있어 이도형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으로 보였지만 2009년에는 오히려 비중이 더 늘었다. 지명타자. 포수, 1루수 등 전천후로 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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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의 놀라움은 가공할 만한 타석 대비 병살타로써, 일설에 따르면 어떤 상황에서든 병살타를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질 정도. 그래서 이러한 그의 재능은 전형적인, 안 뚫리는 한화 야구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타 팀 팬들에게 더욱 사랑받고 있다. 한화 팬을 포함한 야구 팬들은 이러한 이도형에게 애증을 담고 있으며 야갤에선 특별히 그의 능력을 기려 ''''도형신', '병살의 마스터피스', '비밀번호 463[5]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사실 643이라고 해야 맞는데 우타자인 그는 전형적인 풀히터로 땅볼타구가 거의 3-유간에서 형성된다. 워낙 당겨치기 때문에 643 못지않게 543 병살도 많고, 200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무사 만루에서 초구를 당겨쳐 523 병살로 팬들을 뒷목잡게 했다.
이도형의 병살을 수치적으로 따져보면 통산 병살 수는 99개로 역대 60위권에도 못 들어간다. 하지만 100타석당 병살은 약 2.84개로 역대 10위권에 들어가기 때문에 높은 빈도의 병살을 기록한 건 사실이다. 한화시절만 따질 경우 2578타석에 76개로 100타석당 2.95개가 되니 한화에서 조금 더 많은 병살을 쳤다. 특히 2007년 100타석당 5.53개의 병살은 단일 시즌의 임팩트로는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가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한화시절에 팀의 부족한 장타력을 더해주는 등 나름 팀에 좋은 공헌을 해준 선수였고[6] 이도형보다 높은 빈도로 병살을 친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그가 병살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도형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7]
청주 경기에서의 활약이 좋아 '청주 본즈'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특히 청주에 있는 처가가 지방의 재력가인 탓에 한화 선수들이 청주로 오면 장모님이 자주 피자를 돌린다고 해서 '피자도형'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참고로 CJ 마구마구 2009 프로야구 4월 30일까지 청주구장에서 그의 성적은 11타수 9안타 2홈런 1볼넷 5타점 장타율 1.600 출루율 0.909 OPS 2.509.
그러나 2009년에는 뇌진탕에 시달리던 김태균의 공백 속에서 사실상 타선의 대들보로 활약해서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 타율 0.318(98안타 12홈런 56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유일의 3할 타율을 달성한 것. 2006년을 기점으로 명백한 하향세를 보이던 터라 그의 재기는 더욱 놀랍다. 팀 배터리진의 불안에 다시금 포수 마스크까지 쓰게 되었고, 양대 거포 김태균과 이범호가 2010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김태완과 더불어 둘뿐인 검증된 장타자로 남은 그의 활용가치는 점점 솟아만 갔다. 이건 팀의 주력이 빠졌기 때문에 반사 이익을 챙긴 것 같지만, 타자로서의 이도형의 타격 스킬 자체가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8]
특히 결정적인 두 방의 끝내기 홈런을 작렬시키며 어려운 시즌을 보내던 한화 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7월 4일 기아전에서 선발 류현진의 12탈삼진 역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던 경기에서 한기주를 상대로 장렬한 끝내기 역전 2점 홈런을 쳐 한화 이글스의 12연패에 종지부를 찍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오오 피자신!'''
그 뒤 7월 16일 사직 롯데전에서 카림 가르시아의 숄더 태클을 맞고 KO. 다음날 바로 2군으로 내려갔다가 복귀한다. 그의 뜬금포는 여전히 건재해서, 정민철의 은퇴식이 있었던 9월 12일 히어로즈전에서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으로 9점차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으며[9] 선배의 마지막 경기를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김태균과 이범호가 떠나간 2010 시즌에도 하루 2홈런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는 등 중심 타선에서 나름대로 제 몫은 해 주었으나, 김태완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포지션도 아닌 1루수로 나왔다가 수비 중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2010 시즌 통째로 시즌 아웃.[10] 이도형과 김태완이 모두 빠진 상태에서 프런트의 '''미스'''로 송광민마저 군으로 끌려가 버린 한화 타선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진짜로 타 팀( )의 1.5군~2군급 타선이 되었고, 김태완이 복귀할 때까지 '''망했었다'''. 게다가 김태완조차도 장성호의 영입 이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남은 시즌을 말아먹고 아시안 게임 출전도 불발되어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면서, 현재까지도 한화의 2010 시즌은 한화 역사상 최악의 타선을 보유했던 시즌으로 여겨지고 있다.
2.1. FA 신청과 투쟁
2010 시즌 종료 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FA를 신청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싶었고, 불공평한 FA 제도[11] 에 맞서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소속 팀 우선협상 기간 동안 계약하지 못했다.
팬들은 '''FA 제도의 불합리함에는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2010 시즌에 한것도 없으면서 뭘 더 바라냐고 성화를 냈다. 사실 이도형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리 만족할 만한 팀이 없기 때문에 과연 좋은 계약을 맺을지도 문제고, 설령 조건이 어느정도 맞는다 한들 보상선수 문제로 인해 더더욱 조건을 맞추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도형 본인은 정 안 되면 은퇴라도 하겠다는 심사로 신청한 것으로 보인다.
2011 시즌 FA 자격자 계약 시한인 2011년 1월 15일 5시까지 계약이 되지 않았기에, 최종적으로 최영필과 함께 FA 미아가 되었다. 한화 구단은 한 번 만나서 계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1월 14일 마지막으로 만나서 팀의 현장 직원을 제안했으나 이도형은 개인 사업(후술하는 사회인야구장 사업)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앞으로 1년 간 KBO에서 뛸 수 없으며, 나이를 생각할 때 사실상 선수로서는 은퇴다. 이미 한화 구단에서는 마감 시간 전에 이도형과 최영필의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넘긴 상황이었다.[12]
이로써 최영필과 이도형은 2006년의 노장진(전 롯데), 차명주(전 한화)에 이어 KBO에서 FA 미아 사례가 된 3번째, 4번째 선수가 되었다.[13]
그리고 KBO를 상대로 법정 싸움에 들어갔다. FA 계약의 보상규정 및 계약제한 기간 규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 드디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셈이다. 물론 승소 여부를 떠나 앞으로 야구계로의 복귀는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판결 결과에 따라 KBO의 커트 플러드[14] 나 장 마르크 보스만으로 기록될 수도 있던 상황.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류근관 교수는 2012년 1월 24일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칼럼에서 이도형 선수의 사례를 언급하며, 당시 프로야구의 FA 제도를 비판하였다.
가처분이 수용 되더라도, 이도형 개인에게 혜택이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대가 KBO라 어느 구단이 미움털 박힌 선수를 영입하려 들지 않을 것이며, 그동안 운동을 쉬었기 때문에 제 실력 발휘하기도 힘들 것이지만 이도형은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총대를 맨 것. 그리고 결국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져서 FA 협상에 대한 조항이 바뀌게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기사가 나왔다.#
마침내 이도형의 정당한 요구는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FA협상 실패시 1년간 자격정지 조건은 사라졌다. 큰 발전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감이 있지만, 사실 준척급 FA 선수들에게 강요되었던 진짜 독소조항은 자격정지가 아니라 2015년 현재에도 건재한 보상선수 규정이고,[15] 그동안 자격정지 철폐로 혜택을 입은 선수가 없다시피한 것만 봐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도형도 이 부분을 가처분 신청에서 함께 다루었으나 최종 판결에서는 쏙 빠진 것이다. 갑질을 투쟁으로 이겨냈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실질적으로 해결된 건 없는, 찝찝한 상태로 판결이 마무리 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이도형의 투쟁으로 불합리한 FA규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보상선수 규정 개선에 대해선 대부분이 동의하나 실제 제도개선 논의에서는 각 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결국 매번 어물쩡 넘어가는게 문제였기 때문. 또한 이적이 쉽지 않은 준척급 선수들 입장에서는 FA 협상에서 1년을 쉬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고, 구단 입장에서는 선수들을 옥죌 수 있는 수단 하나가 사라진 셈이니 이도형의 사례로 인해 어느정도 선수들의 숨통이 틔워졌다.
그리고 많은 야구 팬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선수협이 제대로 한 일은 없다.
3. 은퇴 이후
2011년 초 계약이 불발된 이도형은 선수 복귀 생각은 거의 없다고 하여 사실상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대신 수도권에 사회인 야구 전용 야구장을 지어서 사회인 야구 팀들에게 대여해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11년 난관을 겪었던 선수협 문제에 대해서도 소신있는 목소리를 내며 동료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이듬해 선수협 사무총장 선거에서도 박충식에 이은 2위의 득표를 기록하는 등(139표, 당선자 박충식은 183표) 선수들 사이의 신망도 두터운 듯.
2012년 9월 olleh tv 한화 편파중계에 등장했다. 그렇게 모진 대우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한화를 향한 애정은 식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깨알같은 어록.
2013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의 육성위원으로 위촉, 활동하였다. 팀이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7월부터 한화 공홈에서 준비한 편파중계의 해설위원으로 한화 팬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팬의 심정으로는 그저 고마울 따름.
2014년에는 일간스포츠에서 런칭한 스포츠 매체인 베이스볼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매체의 성격에 걸맞게 깊이있는 분석과 심도있는 인터뷰 등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4월부터 정규시즌 마감까지 6개월 가까이 아프리카TV에서 오승환이 속해있는 한신 타이거스 편파 중계 해설을 하기도 하였다.
4. 지도자 경력
4.1. NC 다이노스 배터리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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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코치 시절.
2014 시즌 후 강인권 배터리코치가 두산 베어스로 옮기자, 1군 배터리코치로 보직이 변경된 최기문의 후임으로 NC 다이노스의 2군 배터리코치로 발탁되면서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 여담으로 2002년 1월 두 선수가 1:1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었던 적이 있다.[16]
4.2. NC 다이노스 타격코치
4.2.1. 2017 시즌
2017년부터는 코치진 개편에 따라 1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5월 중순까지 팀 타격지표가 하위권에 쳐지면서 팬덤에서 평가는 나쁘다. 다만 코칭의 문제라기보다는 박석민과 김성욱 등 주요 타자들이 초반부터 부진한 것이 크므로 지나친 비난은 삼가야 할 듯하다. 일단 6월 들어서는 공격력이 전체적으로 살아나고 있는 상황이다.
허나 여름 이후 다시 타격진의 기복이 심해지고 잔루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팬덤에서의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는 중. 특히 2연전 일정이 시작되고 나서 팀 타격지표가 하위권을 맴돌면서 코치 책임론이 커지고 있다.
2017년 8월까지는 사람은 좋은 것 같은데 코칭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NC 팬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코치라면 선수들의 성적이 좋지 않을때 문제점을 캐치하고 실력을 끌어 올려줘야 하지만 초보 코치라 그런지 이러한 위기관리 능력이 아직까지는 전무한 수준.[17]
그래도 시즌 막판과 포스트시즌에 타선이 다시금 폭발하면서 팬덤에서도 좋은 평가가 나왔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10개 팀 중 리그 3위의 타격 지표를 남기며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냈다. 팀 기록만 보더라도 가장 타선이 좋았던 2015, 2016 시즌 다음가는 성적을 기록했다. 다만 시즌 중에 워낙 널뛰기가 심하다보니 기록에 비해서는 박한 평가를 받은 시즌이 되었다. 2018 시즌에는 커리어 하이를 찍은 선수들의 기량 유지와 부진했던 박석민과 김성욱 등등의 부활 여부에 따라 본인의 평가도 달라질 듯하다.
코칭 스타일은 일단 기술적인 부분보단 휴식을 통한 컨디션 유지를 강조하는 지도자인 듯 하다.#
4.2.2. 2018 시즌
2018년 초반 팀 전체가 끔찍한 공격력을 보이면서 비난 여론이 다시금 나오고 있다. 매 경기마다 공갈포스런 홈런으로만 점수를 내는 모습만 보이고 있으며, 볼넷은 개나 주라는 듯한 타격으로 출루가 안 되고 있고, 기껏 주자를 모아도 삼진이나 땅볼, 병살타로 흐름을 끊어 놓으니 팬들은 미칠 노릇. 4월 종료 기준 팀 타출장은 .241/.301/.354로 모든 지표가 압도적인 10위이며 BB%도 6.3%로 꼴지다. 반대로 K%는 20.4%로 네 번째로 높다. 득점으로 넘어가면 더더욱 심각한데, '''4월 한 달 동안 5득점 이상 한 경기가 4번밖에 없다.''' 선수 몇몇이 부진했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번에는 팀 내 선수 대부분이 2할 초중반에서 1할대에 머무르고 있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사실 BABIP이 다른 팀들이 다 3할 찍을 때 NC 혼자 2할 후반대니 운도 어느 정도는 없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거야 타구질이라도 좋아야 먹히는 소리고...
극 타고투저를 겪고 있는 현 KBO 리그에서 4월 말까지 팀 OPS가 유일하게 0.6대이며,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3할타자가 나성범 혼자다. 세이버메트릭스로 봐도 팀 wRC+가 65.3, 역사상 가장 낮은 293등에 위치하고 있다.[18] 타격 WAR도 유일하게 음수인 '''-0.81'''이다.[19] 도대체 스프링캠프 때 훈련이나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운 지경. 심지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는 이호준이 전화통화로 코칭해도 지금보다 낫다는 의견까지 나올 지경이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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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8년 5월 1일 부로 김민호와 함께 2군 타격코치로 강등. 대신 양승관이 타격코치로 1군에 올라왔다.
그런데 6월 4일 김경문 감독의 사퇴로 코칭스태프 보직이 대거 변경될 때 양승관 타격코치가 사임을 표하면서 다시 1군 타격코치로 복귀했다! 당연히 팬들은 이게 무슨 지거리야라는 반응을 보이는 중. 양승관 타격코치 시절에서도 타격은 리그 꼴찌였지만 이도형 코치 체제에서보다는 미약하게나마 좋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
이도형 코치는 선수 시절 포수였고 배터리 코치 출신이었는데, 1군 타격코치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팬들의 평가다.[21] 선수로서의 타격 능력은 아예 별개로 치더라도 팬들이 가지고 있는 제일 큰 의문점은 타격코치 생활을 하고 있는 2년 동안 기술적인 조언을 하는 상황이 상당히 드물다는 점이다. 어떤 선수가 맹타를 치고 인터뷰를 하더라도 "자신있게 쳐라"라고 조언했다던가, "편안한 마음으로 집중하라"고 하던가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휘두르라고" 하던가 등 기술적인 내용보다는 타자의 심리적 안정감(...)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인터뷰에 나오는 내용이 코칭의 전부는 아닐 것이고 타격에서 심리적인 부분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지만 NC 팬들은 이미 이도형 코치를 '''타격코치가 아닌 심리코치로 분류하고 있다.'''
결국 시즌 최종 팀 타격 성적은 .261/.329/.404, wRC+ 83.6, WAR 9.66, 각종 타격 지표에서 꼴찌가 아닌 것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 3할 타자가 하나도 없었던 2013년보다 못한 공격력을 보여주면서 시즌을 마쳤다. 개별 타자를 보면 노진혁이나 작년까지 1군 전력외 자원이었던 이원재 이외에는 성적이 다 떨어졌다. 특히 재비어 스크럭스가 시즌 초반부터 해맸는데도 불구하고 별 대책이나 조치도 없이 시즌 끝까지 어영부영 보내게 한 것은 심각한 수준.
시즌 후 마무리 캠프 명단에 이름이 빠지더니 선수단 명단에서도 제외되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한다고 한다.
사임한 뒤인 2019년 4월, 이동욱 감독에 따르면 히팅 포인트를 뒤쪽에 둔 것이 작년 타격 부진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밀어치기 항목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지만, 히팅 포인트를 뒤에 두면 바깥쪽 변화구 대처가 쉬워지고 그에 따라 컨택이 좋아지는 장점이 있으나, 타구에 힘을 실을 수 없기 때문에 땅볼은 많아지고 그만큼 장타가 나올 확률은 낮아진다. 2010년대 후반 MLB에서는 타자들이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면서 당겨치는 타격이 대세가 된 것을 보면 이도형 코치는 시대에 맞지 않는 코칭 스타일을 고수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4.3. 두산 베어스 코치
2018년 11월 14일, 두산에서 코치로 영입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지난 2002년 1월 이후 17년 만에 친정 팀 두산 베어스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4.3.1. 2019년
2019년 4월 5일부터 7일까지 NC가 4년만에 두산을 상대로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NC 팬들은 '피자신의 가호로 이겼다', '비밀공룡 피자신' 같은 식으로 찬양을 했다. 이 시리즈의 패인 중 하나가 두산의 공격력 부진이었던 것을 보면 마냥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듯.
이도형이 1군 타격코치로 부임한 이후로, 득점상황에서 점수를 못 내 패배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서 두산팬들은 경기를 볼 때마다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22] 가뜩이나 볼넷으로 출루시키는 타자가 많은 세스 후랭코프 등에게도 악영향을 주는 중으로, 정경배에 비해 심각하게 나쁜 평가를 얻고 있다. 2019년 4월 16일 공동 1위로 올라서도 타격지표는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여전히 빈약한 홈런, 늘어나는 병살타 등으로 욕을 먹는 중. 5월 들어서도 병살타가 52개로 리그 1위라, 불펜의 소모를 늘려 투수진에 큰 부담을 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5월 28일 1군 메인 타격코치로 확정되었다. 두산 팬들은 정경배 코치는 강등시키면서 이도형 코치를 냅두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의문을 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태형 감독은 코치들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그런거라고 하는데.. [23] 엠엘비파크에서도 욕을 먹는 등 이도형의 코칭에 대한 두산 팬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선두 SK와의 승차가 벌어지고, 2위 자리마저 위태롭다가 결국 팀이 전반기 3위로 추락하면서, 팀 타격 부진에 대한 이도형의 비판은 연일 높아지는 중.
말 그대로 물타선에 대한 책임은 없는듯.
그러나 후반기 들어오면서 타격감이 살아나는 중. 어찌하다보니 타격감을 살리면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에 견인을 하였다.
4.3.2. 2020년
허경민, 정수빈 등이 3할을 찍으면서 활약하고 있어 코치로서의 능력은 있음을 보여주나 작년에 이어 여전히 팀 병살 1위라는 부분으로 인해 딱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시리즈 '''25이닝 무득점'''이라는 환장할 기록에 김태형이 똥고집으로 까이고 있지만, 타격 코치인 이도형도 책임이 있다고 봐야한다.
5. 여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KBO 리그에서 '''끝내기 홈런 통산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6개).[24][25]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난세의 영웅.'''
병살로 유명한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실제 통산 병살타 수는 99개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두산 출신 선수인 안경현, 홍성흔, 김동주 등에 비해 숫자 자체는 현저히 적다. 하지만 상술한 3명은 팀의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출장이 이도형보다 훨씬 많았고 타격 전반에서 훌륭한 성적을 쌓은 반면, 이쪽은 커리어 전체나 출장 횟수에 대비해서 기상천외한 병살타가 많았기에 병살왕 이미지가 붙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서 본인 타순이 주로 5번이나 6번에 섰으며 그 앞에는 김태균같은 역시 거포 타자들이 있었기에 병살타가 되기 쉬운 조건에 있을 때가 많아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전 농구 선수인 서장훈과는 서울학동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다고 한다. LG 트윈스에서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뛰었던 투수인 전승남도 이도형과 학동초등학교 동창이다.
야구게임에선 유독 저평가당하는 선수 중 하나. 특히 포수 수비가 최악이라 거의 대부분의 야구 게임에서는 지명타자로만 굴려진다. 프야매 같은 온라인 게임은 물론이고 컴투스 프로야구 같은 모바일 야구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분명 어깨 부상은 2004년에 당했는데 어째서인지 2003년 이전의 카드들도 단체로 수비스탯들이 안좋다.
이사만루2015 KBO에서는 03 이도형이 '''밸붕급의 스탯을 자랑한다.'''
앞서 서술된 것처럼 청주야구장에서의 성적이 뛰어난 편인데 어릴 때부터 청주야구장과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은퇴 후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휘문중학교 1학년 때 성인 규격 야구장에서 첫 홈런을 쳤다고 하는데 그 홈런을 친 구장이 청주였다고 한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1] 5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2] 이~도형 홈런! 이~도형 홈런! 이~도형 홈런! 이~도형 홈런! 홈!런! 이!도!형! (X2)[3] 이 때, 트레이드 대상은 강인권(현 NC 다이노스 수석 코치) + 현금 5억원.[4] 특히 1995년이 이도형이 주목을 받았던 시기다. 1995년에 14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중 12개가 홈 구장, 즉 잠실 야구장에서 친 홈런으로 당시 한 시즌 잠실 야구장 최다 홈런을 기록했다.[5] 2루수-유격수-1루수를 가리키는 숫자[6] 이도형의 한화에서 통산 WAR는 12.08로 2018시즌 종료 시점에서 역대 한화 야수 중 17위에 해당한다.[7] 참고로 이 부문에서 100병살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 가장 높은 병살빈도를 기록한 건 100타석 당 3.75개의 윤석민이다.[8] 극단적 당겨치기 타법에서 벗어나 밀어치기를 구사하기 시작하며 스프레이 히터가 되었다.[9] 역대 2위의 대역전승. 역대 1위는 당연히 이것.[10] 팔이 부러진 경기는 2010년 5월 1일 경기로, 당시 부딪힌 선수는 삼성의 조동찬이다. 정확히는 왼쪽 상완골 골절이며, 철심을 박고 1년 반이 지나서야 철심을 제거할 만큼 큰 부상이었다.[11] 18인 외 보상선수 문제로 대형 선수가 아니면 이적이 쉽지 않다.[12] 단, 후에 최영필은 이듬해 보상권리 포기로 SK 이적에 성공하였다.[13] 재밌는 점으로 해당 선수들은 모두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있다.[1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10여년간 뛰다가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원치않는 트레이드를 당했는데, 이에 맞서 MLB에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FA제도 도입의 단초가 된 선수다. 자세한 내용은 FA 제도와 마빈 밀러 문서 참조.[15] 보호선수 숫자 등 세세한 변화는 있었다.[16] 이도형↔5억, 강인권.[17] 같은 시기에 이재학과 장현식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투구폼을 바꿨고 해당 선수들이 후반기 좋은 활약을 펼치게 한 최일언 투수코치와는 대조되는 모습.[18] 이는 해체 직전의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비밀번호를 찍던 롯데 자이언츠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19] 참고로 지명타자 소멸로 잠시 타석에 서서 루킹 삼진으로 물러난 이민호가 타격 WAR 0.00으로 팀 내 10위다. 또한 팀 wRC+ 60대는 장민석과 조동화의 통산 성적과 비슷한 수준이다(...).[20] 그리고 이호준은 그 다음 해 NC 타격코치로 부임했고 팀 타선을 홈런 1위, 타율 2위, 득점 3위, 장타율 1위의 강타선으로 만들었다.[21] 물론 포수도 타격을 하는 포지션이고, 이런 사례도 있듯이 코치로서의 능력이랑 선수로서의 능력은 별 상관이 없다.[22] 포수 출신 코칭스탭 타격부문으로 보면 박경완 코치의 영향력도 있지만 SK 와이번스 타선은 터지고 있다.[23] 위에도 서술했지만 지난 시즌 NC의 타격을 본다면 정경배의 2군행 및 이도형 잔류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24] 2009 시즌 전까지 4개를 기록했다가, 그 해 끝내기 홈런을 2개나 쳐 '난세의 영웅' 인증을 하면서 기록 갱신. 참고로 공동 2위는 김태균, 마해영, 심정수, 이승엽(4명 모두 5개 기록)이다. 이 4명의 인물 모두 은퇴. 공동 6위는 4개를 기록한 송지만, 박경완, 이종범, 장종훈, 이호성이다.[25]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12개의 기록으로 해당 부문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