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희

 


'''박보희'''
朴普熙 | Bo Hi Pak
[image]
'''생애'''
1930년 8월 18일 ~ 2019년 1월 12일(향년 89세)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시
'''매장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파주원전[1]
'''가족'''
동생 박노희, 아내 윤기숙, 딸 문훈숙, 아들 박준선, 양자 박사무엘 등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0년 6월 1일~1960년대 후반
'''최종 계급'''
중령 (예비역)
'''최종 보직'''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보좌관
1. 개요
2. 상세


1. 개요


대한민국군인, 종교인, 기업인이자 한국문화재단의 총재였다.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과 사돈이자, 문선명의 오른팔이었다. Bo Hi Pak이 정식 영어 표기이다.
영어 위키백과, 러시아어 위키백과

2. 상세


1930년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났다. 1950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로 입교하였다.[2] 그러나 육사 생도가 된 지 24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생도로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제9보병사단 28연대 소속이었으며, 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 연대작전장교로까지 전쟁에 임했다. 이후 1952년 미국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에서 화학기 교관으로 일했다. 그 후, 1957년 UN군 사령부 내 미 군사고문단장 전속부관, 1960년 대한민국 국방부차관 보좌관, 1961년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중령까지 임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퇴역함.
1957년 통일교에 입교하여 문선명과 인연을 맺었다.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했기에 미국 정치인들과 어느 정도 아는 사이이며, 영어 실력이 유창하며, 특히 동시통역을 잘하기에 문선명의 총애를 받았다. 문선명의 동시통역사로도 활동했다. 통일교 2인자 소리까지 들으며 워싱턴 타임즈, 세계일보 등 통일교 계열 언론사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문선명의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조문하러 가라"는 명령으로, 남한에서 유일하게 조문단을 이끌고 방북했으며, 그로 인해 국민의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대한민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해외 유랑을 해야 했다... 2019년 1월 숙환으로 사망했다.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1978년 미 하원 청문회에 서기도 했다. 이는 애당초 통일교 자체가 코리아게이트에 깊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보고서 참고.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의 조카이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여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서영수를 포함한 6명이 1984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박보희를 납치하여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서영수 일당은 권총으로 박보희를 위협하며 몸값 1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FBI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이런 사건을 벌인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라 통일교에 불만이 많아서라고 한다.#
그의 딸인 발레리나 문훈숙[3] 문선명의 죽은 아들 문흥진과 영혼결혼하였다.
[1] 산소.[2] 1946년 입교한 육사 2기와는 다른 기수이다.[3] 원래 이름은 박훈숙이다. 통일교 교리에 따라 남편의 성을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