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게이트
Koreagate
1. 개요
1976년,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로비#s-2를 했다는 사실이 미국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보도된 후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외교적 마찰이 일어난 정치 스캔들로, 박정희 정권 말엽 당시 한미관계 악화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일명 '박동선 사건'이라고도 부르는데, 해당 사건의 로비스트 이름이기도 한데다, 박동선이 로비 자금으로 대한민국에서 송금된 돈 대부분을 미국 의회가 아닌 개인 용도로 횡령하는 '''배달 사고'''가 일어나 사건이 터진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1]
2. 상세
이 사건이 터지기 이전부터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미국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미국 내에 알려져 있었다. 1975년 미국 하원 의회의 청문회에서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 중앙정보부가 단지 미국 내의 반한파에 대한 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공작을 벌인다"'''는 요지의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도널드 매케이 프레이저 하원 의원은 한국의 불법적인 로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무려 10면에 걸쳐서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한국의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의회 내에 친한(親韓)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1970년대 들어 매년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뇌물을 뿌렸다"'''고 폭로했다. 게다가 이 보도가 나간 얼마 뒤에 열린 미국 대선에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CIA, FBI, NSA와 국무부, 미국 법무부 등이 총동원되어 한국의 비리를 수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하원에서도 국제관계소위원회,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가 구성돼서 청문회를 열기 시작했다.
미 의회와 국무부는 당연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핵심 인물인 로비스트 박동선의 송환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미국은 "식량 차관을 삭감하겠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 등의 외교적 압박을 가하게 된다. 특히 1977년 6월 뉴욕타임스가 "CIA가 도청을 통해 박정희가 박동선에게 미국 내 로비 활동을 지시한 정황이 포착됐다"는 보도를 내면서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혹까지 불거지며 한미관계는 악화됐다.[2]
한편 코리아게이트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3선 개헌 당시 토사구팽 당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7년 6월,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하여 박정희 정권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토사구팽 당한 후 1973년 미국으로 망명해있던 상황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에 원망이 많았던 김형욱은 코리아게이트가 터지자 한국의 불법적인 로비 현황과 박정희 정권의 비인권적인 행태들을 미국에서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먼저 1977년 6월 5일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가지며 박정희에 대해 비판했고, 그 길로 프레이저 청문회까지 나가 자기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했던 일들을 전부 폭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심지어 박정희 정권의 치부를 정리한 회고록까지 쓰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박정희는 김형욱의 배신에 "개도 주인을 알아보는데"라며 허탈해했고, 몇 번이나 미국에 사람을 보내서 김형욱의 폭로를 막아보려 했었다. 1979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을 만나기 위해서 프랑스 파리로 떠난 뒤 행방불명 됐는데, 가장 신빙성이 있는 점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 한다.[3] 행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형욱 문서 참고.
한미 양측이 박동선의 송환 여부를 놓고 줄다리기 끝에 박동선이 미국으로부터 '전면 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송환에 응한다. 결국 1978년 2월 박동선은 미국 상하원 윤리위원회에 출석해 "32명의 미 의원에게 85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박동선은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들에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미국은 동아시아 외교에서 중요한 대한민국과 완전히 척을 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미 양측은 우여곡절 끝에 타협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게이트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미 상하원 모두 1978년 말에 조사를 끝냈으며 한미 양국은 1978년 12월 31일 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박동선에 대해 미 법원은 기소를 철회했으며, 박동선에게 돈을 받은 현직 의원 1명이 유죄판결을 받고 7명이 의회 차원에서 징계를 받는 것으로 코리아 게이트는 마무리됐다.
미국 프레이저 위원회는 김형욱의 폭로를 바탕으로 1978년 10월 '''프레이저 보고서'''를 미 의회에 제출했다.[4]
대략 사건의 수순이 코리아게이트 → 미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의혹 → 김형욱의 미국 의회 출석 → 박동선의 미국 의회 출석 → 프레이저 보고서 제출 순으로 이어진다.
3. 영향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이 드러나자 지미 카터는 끊임없이 한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했으며, 주한미군 철수까지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박정희가 핵 개발을 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한미관계는 크게 나빠지게 된다.[5]
지미 카터가 1979년 여름에 한국을 방문하여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는데, 평소 주한미군 철수 문제, 인권 문제 비판 등으로 내정 간섭에 불만이 쌓였던 박정희는 카터 행정부가 한국의 상황을 모르면서 이래라저래라한다는 점과 카터 정부가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도 잘못하고 있다는 자신의 관점을 45분간 거침없이 말했다. 이에 카터도 노발대발했다.
결국 주한미군의 철수를 취소하고 한국이 GNP의 6%를 국방비를 쓴다는 결과로 갈등이 봉합되는가 싶었지만, YH 사건과 김영삼 제명 사건 당시 카터 정부는 강하게 항의했고 이러한 나빴던 한미관계는 훗날 김재규가 미국의 지시로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음모론을 낳게 되었다.
4. 관련 문서
[1] 일본은 아예 현지에 싱크 탱크 성격의 연구소 간판을 걸어두고 세미나, 강연회 같은 초청행사를 통해 의회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지일파 미국 의원들을 양성하고 있다. 로비 자금이 제대로 쓰이기만 했어도 게이트로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2] 초기에는 미국이 의혹을 부인했지만, 이후 윌리엄 포터 전 주한미대사가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3]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가 같은 해에 10.26 사건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점에서 의문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4] 김형욱의 미국 의회 출석 목적 중 청와대 도청 사건으로 인해서 약화된 미국 정부의 입지를 만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먹혀들어서 협상이 타결됐다.[5]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앞서 닉슨 시절인 1970년대 초중반 시도되었다가 이를 눈치챈 미국의 압력으로 일시 중단되었지만,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추진으로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