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구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금호아시아나그룹 3대 회장이다. 아호는 동산(東山).
2. 상세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창립한 박인천 전 회장의 5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5회),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바로 금호그룹에 입사하여 창립자인 아버지 박인천 회장을 도왔다.
금호그룹 대표이사직에 오른 이후에는 경영에 재능이 있음을 보여줬다. 1981년에는 한 해 적자가 50억 원이 넘었던 (주)금호 대표이사를 맡아 2년만에 순이익 120억원 규모의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1984년 일본 유수의 기업인상인 이글클럽 최고경영자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금호타이어는 세계 10대 타이어 메이커로 성장했고 금호석유화학은 세계 7위의 합성고무업체가 됐다. 박정구 회장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중국 진출인데, 1996년 금호고속과 금호타이어를 국내 업체 중 최초로 중국시장에 진출, 남경에 타이어 생산 공장을 준공, 특히 남경 공장은 영업개시 3년만에 흑자를 냈었고, 2011년까지 중국 타이어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였다. 선전시, 우한시, 항저우시 등에서 벌이고 있는 고속버스 운송사업도 60여개 신설 노선을 확보하는 등 중국 성(省) 내에서 최대의 운수회사로 자리잡았다.
1996년 형 박성용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 그룹 회장직을 이어 받아 총수직에 오른 뒤 '비전 경영'을 내세우며 기존 사업을 통폐합하는 등 내실을 다지고 신사업을 개척하며 금호그룹이 재계 순위 10위권에 진입하는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2년 7월 13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의 옆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회장직은 바로 아랫 동생인 박삼구 회장이 승계했다.
3. 상훈
- 국민훈장 모란장 (1984년)
- 이글클럽 최고경영자상 (1984년)
- 건설부 장관 표창장 (1990년)
- 동탑산업훈장 (1993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6년)
- 금탑산업훈장 (2002년)
4. 여담
- '''"정직하고 깨끗하게 얻는 이익만이 가치가 있다."'''
- '''"단순히 외형만 부풀리는 거대기업으로의 일류를 추구하기보다는 의(義)로서 기업윤리를 지켜가야 한다."'''
박정구 회장의 대표적인 어록들이다.- "'''세계화, 개방화, 지방화 시대를 맞아 국내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민, 기업, 정부, 학계, 언론계 등이 5위(位) 1체(體)를 이뤄야 하고, 높은 기업문화의 부가가치를 무한대로 키워야 한다."'''
- 성격이 상당히 소탈하고 직원들과도 잘 지내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IMF 경제 위기를 맞았음에도 직원 해고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위기를 극복한 훌륭한 기업인. 바로 아랫 동생이 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릴 정도의 경영능력으로 그룹을 위태롭게 하면서 그의 빈자리가 재조명되는 중이다.
- 부하직원이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솔직하게 보고하면 크게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허위로 일처리를 한 직원들에게는 모질다 싶을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 4남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도 경영실력이 괜찮다. 대우건설, 대한통운 인수 당시 형을 말렸다고 하니 어느 정도 선구안이 있는 셈이다. 차라리 3남 말고 4남이 후임 회장이 되었다면 금호는 건실한 대기업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4] [5]
- 박정구 회장이 마흔을 넘어서 본 막내아들인 박철완은 두 숙부인 박삼구 - 박찬구 분쟁에서 박찬구와 손을 잡고 금호석유화학그룹으로 분가하였다. 금호석유화학그룹의 오너는 13% 정도의 지분을 가진 박찬구 일가이지만 박철완은 10%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주주이다.
-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과 사돈관계이다. 박정구 회장의 장녀인 박은형씨는 김 전 회장의 차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과 혼약을 맺은 사이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동생 박삼구 전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이 각각 김 전 회장의 빈소를 찾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기렸다. 또 다른 여담이지만 대우그룹 사태 이후 2005년 귀국길에 오른 김우중 전 회장이 탑승했던 항공사도 아시아나항공이였고, 박삼구 회장 역시 당일 항공편을 맡은 기장, 승무원들에게 "편안하게 잘 모셔오라"고 각별하게 부탁했다.
- 고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고인의 부모님인 박인천 창업회장, 이순정 여사를 포함 8남매 가족 전원이 불자 가족이다[6] . 고인은 어릴적부터 어머니 이순정 여사의 금타화상의 가르침을 들으며 자라왔던걸로 알려졌으며, 회사 일로 머리가 복잡해 질 때면 법련사나 칠보사를 찾아 향을 피우고 참선을 했을 정도이다. 또한 고인은 1996년 9월,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 불일범종 제작에 참여해 2억원의 불사금을 지원한 바 있다.
- 광주 유스퀘어 문화관에 그의 아호를 딴 동산아트홀이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클래식 음악 예술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 영어와 일본어 구사가 가능했고, 국내 및 해외의 유명 사회과학분야 또는 기업경영관련 책이나 잡지들을 자주 탐독하셨다. 음식은 설렁탕이나 부대고기찌개 등 대중음식을 선호했으며 특히 중국음식을 좋아하셨다. 고향인 광주에 대한 애향심이 대단하여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직도 맡으셨을 정도다. 다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이였고, 상당히 무뚝뚝해 역대 다른 회장들에 비해 인터뷰 자료들이 상당히 적은 편이지만, 그룹 내부에서는 인정과 의리도 중시하는 외유내강형 인물이였으며, 선이 굵고 대범하며 포용력이 있어 임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는 평가. 종합적으로 봤을 때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의 성격과 비슷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