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용(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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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 제2대 회장을 지냈다. 아호는 문호(雯湖). 동생들과 달리 이름이 유일하게 돌림자가 아닌데, 동생 박삼구 전 회장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준구(準求)였는데 후에 개명했다고 한다.[3]
기업 경영자로서의 업적뿐만 아니라, 한국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 생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주인 금호 박인천 전 회장의 8남매 중 맏아들로 전라남도 광주군(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광주서중(26회), 서울 중앙고등학교(41회)[4] 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에 진학했다가 중퇴하였다. 이후 미국에 유학 가서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경제학 석사, 예일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부총재의 딸(미국인)과 결혼할 당시, 장인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한 3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1968년 IBRD와 협력할 일이 생긴 청와대에서 박성용의 도움을 얻고자 금호그룹에 압력을 행사, 결국 장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귀국해 2년 동안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4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금호그룹 경영에 참여하였다. 1984년 박인천 회장이 별세하자 그룹의 총수가 되었고, 1987~199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지냈다. 1996년 바로 아래 동생인 박정구에게 총수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났다.
회장에 오른 직후 부실한 상태였던 금호건설을 광주고속에 인수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해 적자를 만회하고, 이후 건설업의 호황에 힘입어 금호건설도 흑자 전환을 맞이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출범도 그의 회장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후임 회장인 동생 박정구가 금호그룹을 재계서열 10위권 이내로 진입시키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005년 5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상훈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7년)
- 금관문화훈장 (2005년)
4. 어록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젊음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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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 명예회장의 예술사랑 어록.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사무실 벽면에도 고인의 어록이 적혀 있다.
'''"해가 다르게, 아니 짧게는 달마다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는 음악 영재들의 소식을 접하다 보면 큰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도 토요일마다 자신의 음악회를 준비하며 음악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미래의 음악인들을 지켜보면 새로운 희망과 의지를 얻게 됩니다. 이 친구들을 위해 내가, 우리 기업이 해야할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잠이 오지 않아요.'''"
'''"고구마는 먹는 것만 생각하면 분명 소비재다. 그러나 먹고싶은 것을 참고 아껴두었다 땅에 심으면 자본재가 된다. 소비재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자본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구마 경제학이라고나 할까.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사내유보를 늘려 설비투자및 기술개발투자를 확대하고 맨파워를 키우면 초일류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지만 반대로 고구마 먹어치우듯 이익을 그때그때 서버리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소비재까지 자본재로 활용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금호그룹도 발전하고 사원 여러분도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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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금호그룹 사원대상 특강을 묶은 경영어록에서 #
'''"아직까진 우애있게 잘 해왔다고 봅니다.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자산은 공동분배하고, 개인사업은 안하며, 새 사업은 4형제가 똑같은 지분을 나눠한다는 것 등 입니다. 한 사람이 욕심을 내면 화목은 깨지게 돼있습니다. 특히 윗사람이 욕심내면 안 돼요. 형제 간에 싸우는 것처럼 불효(不孝)가 어디 있습니까. 우린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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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1일,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경영직을 물려주기 닷새 전에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회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주면서 각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 #
5. 가계도
6. 음악계 육성 후원
경영계를 떠난 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를 통해 한국의 클래식 음악 영재를 후원하는 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첫 수혜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었다. 1997년 예술의 전당 이사장직을 맡았고, 2003년 한국메세나협의회 제4대 회장을 맡았다.
문화예술 진흥에 힘쓴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본인이 적극 추진해서 본사 건물 3층에 만든 금호아트홀[5] 옆에 더 작은 공연장을 이후 새로 만들었을 때, 그의 호인 "문호"를 가져와 문호아트홀로 명명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대우건설 본사 빌딩 3층이 된 금호아트홀 로비에 그의 흉상이 서 있다. 단지 후원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던 매니아로 알려져 있다.[6]
애석하게도 금호아트홀 건물이 입주한 빌딩이 도이치자산운용에 매각되면서 임차 재계약에 실패, 결국 매각하게 됐다. 2019년 4월 30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폐관되었다.[7] 당연하게도 많은 클래식 음악인들이 안타까움과 아쉬운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8] 이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있는 금호아트홀 연세에서[9] 공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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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의 10주기 추모행사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등 금호그룹이 발굴, 육성한 클래식 음악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7. 이야깃거리
약력을 보면 알겠지만, 대기업 회장인 동시에 교육, 정치 분야에도 깊이 몸담은 사람이다. 물론 교육계 인사가 명망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대기업 회장이 교수 출신에 정부에서도 일한 경우는 드물다.
- 신정아가 금호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던 2001년, 그의 '예일대 박사' 학위가 가짜임을 파악해내고 해고시켰다. 본인이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 출신인데다가, 예일대의 한국인 동문회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진작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
-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귀국해서 잠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4학년들을 대상으로 '거시경제학 특강'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첫 강의에서 경제학의 기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학부생들의 실력이 너무나도 형편이 없어서 "너희들 서울대 상대 4학년생 맞냐?" 라고 일갈했다. 심지어 거시경제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에지워스 상자에서 생산가능곡선을 도출하는 방법조차 몰라서 눈만 끔뻑대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정도.[10] 결국 1학기 내내 거시경제학과 경제성장론을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쳐야 했다. 당시 그의 수업을 들었던 사람 중에는 이준구 교수도 있었다.
- 보수적인 재벌가의 맏아들이면 보통 정략결혼을 하는게 상례인데, 이례적으로 미국인 여성인 마거릿 클라크 박 여사[11] 와 연애결혼을 했다.[12] 유학 도중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애 끝에 결혼했고, 그래서 슬하의 자녀들인 딸 박미영과 아들 박재영도 당연히 황백혼혈이다.[13] 일반적인 재벌가와 달리 금호의 경우 2세, 3세로 이어지지 않고 형제 경영으로 이어진 이유 중에 이 부분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