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1. 전라남도 순천시의 송광사
1.1. 개요
1.2. 역사
1.3. 가람 및 중요 문화재
1.3.1.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3.2. 혜심고신제서
1.3.3. 순천 송광사 국사전
1.3.3.1. 바깥고리
1.3.3.2. 국보 제56호
1.3.4.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1.3.4.1. 바깥고리
1.3.4.2. 국보 제314호
1.3.5. 원숭이상
1.3.6. 약사전
1.4. 오는 길
1.5. 선암사
1.6. 송광사의 뻘짓
1.7. 관련 문서
2. 전라북도 완주군의 송광사

한자 : 松廣寺 / 로마자 : Songgwangsa
홈페이지

1. 전라남도 순천시의 송광사


송광사의 본찰로 들어가는 입구인 삼청교와 우화각.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1.1. 개요





송광사 저녁 예불. 불교판 오케스트라. 넋을 잃는 외국인들도 많다.
사적 제506호.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한국의 삼보 사찰(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이름이 높은 절이다. 예로부터 해인사의 경전, 통도사의 적멸보궁과 더불어 승려의 송광사로 불리는 유명한 절이었다.

1.2. 역사


신라 말 혜린 선사가 송광산에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고려 신종조계종의 창시자인 지눌선사가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고치고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면서 발전하였다.
또한 고려의 대선사이자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옮기려고 터를 잡는 중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리자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지자 그 뒷등을 솔개가 내려앉은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불렀다고 전해오는데, 최남선은 이 전설에 따라 송광을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고도 풀이했다. 다른 유래로는 예로부터 조계산소나무가 가득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솔메라고 부른 것에서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산 이름을 따서 사찰 이름도 송광사라 불렀다는 것이 있다.
이후 산 이름이 조계산으로 바뀌면서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지금의 송광사로 바뀌었다. 지눌의 제자 혜심이 중창한 뒤부터 조선 초기까지 많은 국사를 배출하였는데 이 절에서 배출한 국사는 지눌을 비롯해 16명이나 되어[1][2]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은 중요한 승보종찰이라 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성철 스님 등 해인사 위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약간 밀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치르면서 폐사에 이르렀으나 승려 응선과 부휴가 천자암, 보조암, 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하고 동행랑, 천왕문 등을 세웠었다. 1842년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져 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직전에는 항일 의병을 돕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사찰이기에 일제에 의해 사찰 건물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는 승려 설월과 율암이 용화당, 명성각 등을 보수하고 장원문, 사감고를 새로 지었다. 이후 여수, 순천사건6.25 전쟁으로 사찰의 중심 전각들이 불탔는데, 그 뒤 승려 취봉과 금당이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대웅보전1988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2017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18세기 조선 시대의 고승 묵암당 최눌(1717∼1790)의 것으로 추정되는 진영이 송광사로 반환되었다.*

1.3. 가람 및 중요 문화재




'YTN 사이언스'에서 방송한 송광사
절의 전체 면적이나 전각의 수가 전국에서 손 꼽힐 정도로 크다. 다만 큰 절임에도 불구하고 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풍경[3][4]석탑[5], 석등이 없기 때문에 송광사에는 3가지가 없다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풍경이 없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 터가 연화부수[6]형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 앉는다는 의미 때문이다. 일종의 3대 요소 클리셰인 셈. 3가지 명물도 있는데,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밥통[7], '능견난사' 라고 하는 음식을 담는 그릇들[8], '쌍향수' 라는 향나무[9]. 이 3가지다.
한국의 3보[10] 사찰로도 꼽히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사찰이기 때문이다. 부산범어사, 구례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뛰어난 승려를 많이 배출한 곳[11]답게 여러 고승들이 나왔다. 송광사의 송광(松廣)이란 이름에서 松(소나무 송)자를 파자하여 十八公으로 풀이, 고승 18명이 나오게 될 절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국사전, 약사전, 영산전을 비롯해 목조삼존불감[12], 고려고종제서[13], 대반열반경소, 수선사형지기, 금동요령,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묘법연화경찬술,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등 전국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내부 오른편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1911-1984)과 아내 이순정(1910-2010) 여사의 위패가 큼지막하게 있다. 송광사에서 1985년에 명부전(冥府殿)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장전을 세웠는데, 여기에 필요한 금액을 박인천이 미리 시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장전 오른쪽 벽을 회장 부부의 위패가 넓게 차지하였다. 한자로 청입법왕궁(請入法王宮) 안심좌도량(安心坐道場)이라는 글귀도 위패 옆 벽에 쓰여 있는데, 이는 관음시식 중에 하는 봉안게(奉安偈)라는 기도문의 한 구절로 '법왕(부처)의 궁전에 초대하여 맞아들였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도량에 앉으소서.'라는 뜻이다.

1.3.1.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3.2. 혜심고신제서




1.3.3. 순천 송광사 국사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56호'''
'''순천 송광사 국사전'''
順天 松廣寺 國師殿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송광사 (신평리) / (지번)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 송광사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수량/면적'''
1동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초기
[image]

1.3.3.1. 바깥고리


1.3.3.2. 국보 제56호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매우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절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고 신라 말기에 체징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송광사 국사전은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영정을 모시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로,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처음 지었고, 그 뒤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앞면 4칸·옆면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로 꾸미고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천장의 연꽃무늬와 대들보의 용무늬는 건물을 지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상 조선 초기 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 건물은 순천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소박하고 아담한 형태와 그 기법에서도 주심포 중기 형식의 표준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건축물이다.


1.3.4.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314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順天 松廣寺 華嚴經變相圖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분류'''
유물 / 불교회화 / 탱화 / 불도
'''수량/면적'''
1폭
'''지정연도'''
2009년 9월 2일
'''제작시기'''
조선 영조 46년(1770)
[image]
화엄경변상도는 가로 270㎝, 세로 294.5㎝의 거대한 탱화(幀畵)로 비단에 그려졌다. 변상도란 불경 또는 불교의 설화를 알기 쉽게 조형화하여 그린 그림인데, 화엄경변상도의 경우 화엄경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이다. 1770년에 제작 되었는데,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가운데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화엄경의 방대한 내용을 한 폭에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거대한 사이즈에 걸맞게 대단히 복잡한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변상도는 일곱 장소에서 행한 아홉 번의 설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2003년 2월 3일 보물 제1366호로 지정되었다가 그 가치를 인정 받아 2009년 9월 2일 국보 제314호로 승격지정 되었다.

1.3.4.1. 바깥고리


1.3.4.2. 국보 제314호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화엄탱은 기본구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구도상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거의 대칭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랫부분에는 제1회 ‘보리도량회’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보광명전에서 열린 제7회·제2회·제8회가 자리하였으며, 오른쪽에는 제9회 ‘서다림회’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면서 오른쪽에 제3회 ‘도리천궁회’와 제4회 ‘야마천궁회’를, 왼쪽에 제5회 ‘도솔천궁회’와 제6회 ‘타화자재천궁회’를 배치시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새있는 구도와 더불어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색을 사용하고, 각 회주인 보살형 노사나불의 영락에 고분법을 활용하여 장식함으로써 화면이 밝고 화려해지는 18세기 불화의 경향을 살필 수 있다.

한편 그림 아랫부분에는 보현보살이 대중들에게 비로자나불의 정토인 연화장세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화엄경』39품 중의「화장세계품」내용을 도해한 ‘연화장세계도’가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그림에 대한 내력을 적어 놓은 기록에 의하면, 조선 영조 46년(1770)에 화련을 비롯한 12명의 승려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조성하여 송광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중 조성시기가 가장 빠름은 물론, 『화엄경』의 7처9회 설법내용을 매우 충실하게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기준작이라는데 사료적 가치가 있다.


1.3.5. 원숭이상


일주문 계단 소맷돌에는 원숭이상이 있다. 상원사고양이상으로 뜨는 것에 비하면 별 존재감이 없다.

1.3.6. 약사전


보물 302호. 대웅전 앞 뜰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앞면 1칸, 옆면 1칸으로 현존하는 불교 건물 중 가장 작은 규모이다.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1.4. 오는 길


자가용으로 올 경우 호남고속도로 주암IC로 나와서 18번 국도를 따라 오면 송광사 아래에 도착한다. 주암 IC에서 송광사까지는 약 15분 정도가 걸린다.
대중교통으로 올 경우, 순천시 시내버스 111번, 63번과 벌교에서 출발하는 벌교 농어촌버스 곡천 10번 계열이 운행한다. 순천 버스와 벌교 버스 모두 각각 순천역순천종합버스터미널, 벌교버스공용터미널 인근 정류장에서 정차한다. 벌교역에서 벌교 버스를 타야 할 경우엔 벌교세무서 앞 정류장으로 가야 해서 조금 걸어야 한다.

1.5. 선암사


조계산의 산등성이 너머에는 또다른 고찰인 선암사가 있다. 그래서 조계산의 등산 코스로 두 사찰을 시/종점으로 한 길을 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1.6. 송광사의 뻘짓


[image]
현재 해우소의 모습
송광사의 뻘짓 중 하나는, 1993년에 오래된 해우소(화장실)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지으면서 옛 건물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 건물을 새웠다는 점이 있다. 옛 것은 좀 더러울지라도 오래된 나무 목재들과 연못, 그리고 아름다운 팔작지붕이 어울어진 꽤 멋진 건물이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날려먹고는... 팔작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멋대로 바꾸고 비율과 구성 등 고증은 싹 무시한 새 건물을 세워놓았다. 좀 꾸민다고 꾸며놓은 모습이 조잡하기 그지없다. 한국의 문화재 관리와 복원이라는 것의 수준을 보여주는 한 사례. 특히나 옆에 자리한 선암사는 해우소 수리를 했어도 비교적 옛 모습을 지켰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1.7. 관련 문서



2. 전라북도 완주군의 송광사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절이다. 완주 송광사는 순천의 송광사보다는 유명세는 덜하지만, 이곳도 역사가 깊은 절로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7년(867년)에 도의선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창건 이래로 그대로 쭉 내려온 것은 아니며, 어느 순간 폐사되어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조선 광해군 14년(1622년)에 재건 되었다고 한다. 재건된 이후로는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완주 송광사에는 국가중요문화재 4점이 남아 있는데, 보물 제1243호 완주 송광사 대웅전, 제1244호 완주 송광사 종루, 제1255호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제1274호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절이 재건된지라 모두 조선시대의 문화재들이다.

[1] 송광사에는 이들 16명의 국사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지만 1995년에 보존상태가 좋지 않았던 3점을 제외하고 모조리 도난당했고, 안타깝게도 2018년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그나마 컬러사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토대로 다시 복원할 수는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2] 9세 담당국사는 금나라 장종의 황자였다는 설이 있다.[3] 처마 끝에 달리는 작은 종[4] 정확히 말하자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스님들의 수행지역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달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통하는 교량인 우화루 아래에 달려 있다. 송광사와 비슷한 예로 부안군 내소사의 지장암이 있는데, 이곳에도 처마에 풍경이 달려있지 않고 그 대신 입구 나무에 서양식 윈드차임이 달려 있다.[5]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대웅전의 불상을 받치는 형태의 석탑이 단 하나 있다.[6] 물 위에 연꽃이 뜬 듯한 모습.[7] 쌀 7가마분, 약 4천명분의 밥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8] 지눌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그릇 세트. 수공예품인데도 세트인 29개의 그릇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는 500개였다는데, 아무튼 이 그릇들을 포개어 놔도 딱 맞을 정도로 그 정교함이 대단하다고. 훗날 조선 숙종이 똑같은 그릇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는 "능히 볼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기 어렵다"(보기에는 쉬워보이는데 만들기는 어려운)고 해서 능견난사라고 하였다.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9] 똑같은 모양의 향나무 2그루가 엿가락처럼 꼬여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하고 있다. 800년 전에 보조국사 지눌이 꽂은 지팡이로부터 자랐다고 전한다. 일종의 고승-절-지팡이 클리셰긴 하지만. 쌍향수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석사에도 비슷한 나무가 존재한다.[10] 3보란 불교에서 불(佛), 법(法), 승(僧)을 뜻하는 것[11] 법정 스님도 이곳에서 기거하셨고 때문에 다비식도 이곳에서 거행했다.[12] '''송광사의 중창조(重創祖)인 보조국사 지눌 본인의 소장품'''이다.[13] 고려 고종이 1216년 지눌의 뒤를 이어 조계종 제2조가 된 혜심에게 대선사(大禪師)의 칭호를 내린다는 내용의 임명장. 혜심고신제서라고도 불리며 대한민국 국보 제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