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열

 

'''김우열의 감독직 / 기타 직책 역임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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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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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11]
'''1982'''

'''OB 베어스 등번호 3번'''
팀 창단

'''김우열(1982~1984)'''

결번
결번

'''김우열(1989)'''

강형석(1990)
'''빙그레 이글스 등번호 3번'''
팀 창단

'''김우열(1986~1987)'''

김한근(1989)
'''두산 베어스 등번호 81번'''
강인권(2007~2011)

'''김우열(2012~2013)'''

강동우(2014~)


[image]
'''이름'''
김우열(金宇烈 / Woo-yeol Kim)
'''생년월일'''
1949년 9월 9일 (75세)
'''출신지'''
충청북도 영동군
'''본관'''
경주 김씨 상촌공파[1]
'''학력'''
선린중-선린상고
'''포지션'''
내야수(3루수), 외야수[2]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
제일은행(1968~1981)[3]
OB 베어스(1982~1985)
빙그레 이글스(1986~1987)
'''지도자'''
빙그레 이글스 코치(1988)
OB 베어스 코치(1989)
쌍방울 레이더스 수석코치(1994~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대행(1995)
두산 베어스 2군 감독대행(2012)
두산 베어스 2군 타격 코치(2013)
1. 소개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이모저모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OB 베어스(現 두산 베어스), 빙그레 이글스 소속 야구선수, 두산 베어스 2군 타격코치, OB 베어스 시절 등번호는 3번. 트레이드마크는 구레나룻.

2. 선수 경력


[image]
귀여운 구레나룻, 그의 아름다운 홈런스윙
1949년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태어나 서울특별시로 이사하여 선린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 1968년 한국실업야구에 데뷔했으며 제일은행해병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1969년 실업리그 홈런왕을 시작으로[4] 74년과 80년에도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70년대 내내 김봉연과 함께 홈런왕 경쟁을 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홈런타자로 활약했다. 175cm 60kg초반대 체중 [5]이라는 홈런왕 치고는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팔뚝 힘으로[6] 엄청난 타구 비거리를 자랑했으며 동대문운동장(철거)에서 비공식적으로 150m의 장외홈런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실업리그 통산 100홈런을 넘긴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7] 가벼운 체중 때문인지 4번보다는 1번이나 3번 등 상위타선에 주로 기용되었었다.
1982년 KBO 리그가 개막하자 만 33세의 늦은 나이로 OB 베어스에 입단해 다섯 시즌 동안 뛰면서 통산 타율 0.278를 기록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에 프로에 입단한 탓에 그렇게 뚜렷한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올드팬들에게는 OB 베어스 초창기의 최고 인기선수로 기억된다.[8] 거기에 특유의 구레나룻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여서 검은 색종이를 옆머리에 붙이고 야구했던 베이스볼 키즈들이 있을 정도...
[image]
이후 갑작스러운 시력 저하와 쇠퇴한 타격, 그리고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1986년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하여 재기를 꿈꿨으나 이렇다 할 활약 없이 1987년 시즌 후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OB 베어스쌍방울 레이더스의 코치를 역임하였으며 1995년에는 한동화 감독의 중도 사퇴로 쌍방울의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으나 김성근이 1995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 해를 끝으로 프로야구계를 떠났다. 이후에 경기도 양주시에서 골프 강사, 리틀야구단 운영자, 대학 야구 인스트럭터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12년 4월 오랜만에 친정 팀 두산 베어스 2군 타격 인스트럭터로 프로야구계에 복귀하였다. 2군 감독이었던 송재박을 보필하며 1군에서 타격감을 잃은 선수들을 데리고 다시 감각을 찾게 해서 1군으로 올려 보내는 능력이 탁월해 두산 팬들 사이에서 '단기 인스트럭터'로만 모시기에는 아깝다는 여론이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두산 1군 타격진의 막장화로 2군감독을 맡던 송재박이 황급히 1군 타코로 올라가자 2군 감독 대행을 겸하게 되었다. 평가는 무난하게 수행했단 편.
2013년 시즌을 앞두고 송일수가 2군 감독으로 부임한 후,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2013 시즌이 끝난 후 코치직에서 물러났으며, 그의 뒤를 이어서 새 2군 타격코치로 강동우가 부임했다.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하다보니 프로 코치는 은퇴하고, 양평에서 리틀야구단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골프도 즐기며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4. 이모저모


선수 시절 풍성한 구레나룻에 비해 앞머리는 상당히 빈곤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모자는 악착같이 쓰고 다녔는데, 어느 날 외야수로 출전하여 경기 도중 뜬공을 쫓다가 강한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자 '''쫓던 공은 나 몰라라 하고 뒤로 뛰어가 모자를 찾아쓰느라 안타를 내주었다'''는 엽기적인 전설이 있다. 그런데 그게 TV로 중계 중이던 경기였대나 뭐래나. 당연히 당시 감독이던 김영덕은 뒷목을 붙잡았고 벌금을 먹었다고(...).
근데 이게 은근히 심각한 컴플렉스여서(...) 선수 시절 김재박은 꼭 태그할 때 김우열의 모자를 벗기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관중들은 깔깔 웃고 김우열은 창피해하고...그렇게 상대팀 강타자의 멘탈을 흔들어 놓았다는 그시절 낭만 이야기가 있다. 여튼 70세 노인이 된 현재도 꼭 모자를 잊지 않고 다니는 슬픈 탈모인.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배우 하정우가 김우열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종반부의 박철순(공유 분)과 감사용(이범수 분)의 맞대결 경기에서 결승 끝내기 홈런을 치는, 짧지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9]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엄마로 유명한 배우 김정하의 전남편이라고 한다.[10]

5. 연도별 주요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OB
62
210
.310
65
8
0
'''13'''
(공동 4위)
41
43
14
44
'''.533'''
(4위)
'''.428'''
(4위)
1983
95
333
.291
97
'''21'''
(공동 3위)
'''5'''
(공동 2위)
9
56
48
10
44
.465
.373
1984
95
318
.274
87
11
1
12
49
38
13
'''52'''
(5위)
.428
.373
1985
56
153
.242
37
4
0
7
22
28
7
23
.405
.34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빙그레
34
62
.210
13
1
0
0
5
3
0
8
.226
.272
1987
1군 기록 없음
<rowcolor=#373a3c> '''KBO 통산'''
(5시즌)
342
1076
.278
299
45
6
41
173
160
44
171
.445
.375
[1] 경주 김씨 상촌공파 20세손 '烈'자 항렬. 개그맨 김기리의 아버지뻘, 개그맨 김준호의 할아버지뻘, 프로게이머 김택용의 증조할아버지뻘이다.[2] 해병대 야구단 복무 시절 외야수로 전업하였다.[3] 1971~73년 해병대 야구단에서 군복무[4] 당시 홈런왕을 차지했음에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표팀에 뽑히지 못해 논란이 된 바 있다.[5] 체중이 59kg 나갈때 실업리그 홈런왕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몸무게 50kg대의 홈런왕을 상상해보자(...). 또한 33세에 시작한 프로선수 생활 내내 체중이 70kg을 넘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6] 손목이 아니라 팔뚝의 힘이라고 김우열 본인이 강조했다. 김우열의 타격 메커니즘은 스윙 시 공이 배트에 맞을 때의 순간적인 힘으로 타격을 했다.[7] 김우열은 실업리그 통산 160홈런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실업리그 통산 10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박현식, 김응용, 박영길, 김우열 등 4명이다.[8] 실업시절 전성기에 비해 프로시절은 그다지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성적을 거두지는 않았다.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 홈런 부문 2~3위 안에 자주 들어간 슬러거였다. 그리고 초창기 OB 베어스의 클린업 김우열-윤동균-김유동은 리그에서도 강력했던 클린업이었다. 당시 두산음료가 코카콜라 보틀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의 머릿글자를 따서 코크(KOK) 트리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은 조금 무리수였지만 실력만큼은 굉장했다.[9] 다만 끝내기 홈런으로 겨우 승부가 결정될 정도로 막상막하였던 영화 속의 묘사와는 달리, 실제 박철순감사용1982년 맞대결 경기는 박철순OB가 여유 있게 승리했다.[10]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극심한 고부갈등으로 수년간의 법정소송을 거친 끝에 이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