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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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Waldensians/Waldensian Evangelical Church
이탈리아어: Valdismo/Chiesa evangelica valdese
독일어: Waldenser/Evangelische Waldenser-Kirchen
- 전자는 종교개혁 전 호칭, 후자는 종교개혁 이후 정식 개신교 교단으로 인정받은 뒤의 호칭이다.
1. 개요
기독교의 종파 가운데 하나. 개신교의 선구적인 종파로 보고 있다. 왈도파라고도 부른다. 발도(拔刀)파가 아니다!
전통적인 모토는 '''Lux lucet in tenebris(어둠 속에도 빛은 있다)'''
2. 역사
2.1. 시작
발도파는 12세기 말 신성 로마 제국 리옹의 상인 페트루스 발데즈(Petrus Valdes)의 활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페트루스 발데스는 본래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어느날 리용에 찾아온 음유시인이 연주하는 성 알렉시스 전(La Vie de saint Alexis)을 듣고, 회개를 하여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기부한 다음 설교가가 되어서 기독교 종교 활동에 나섰다.
발데스는 매우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인물로서, 청빈한 생활을 하고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는 그에게는 추종자가 많이 모여들었다.
발데스는 공식적인 설교 허가를 얻고자 했지만, 리용의 대주교에게 거부되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대표자를 파견하고 교황과 주교단의 허가를 얻으려 했지만 기각되었고, 1182년 리용 대주교에게 파문, 1184년에는 이단 선고를 받았다. 이단으로 선언된 사유는 '불순종'과 '자의적으로 성경을 이해하여 오류가 많은 설교를 하였다'는 것이다.
2.2. 전파
발도파는 이단 선고에도 굴하지 않고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비밀리에 이동하고 설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나갔다. 남프랑스에서 이탈리아, 프랑스 북동부, 1200년대에 이르러서는 남독일권에 나타났으며, 1250년에는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등에 공동체를 만들었다. 폴란드, 보헤미아, 슬로바키아, 헝가리에도 퍼져갔다.
2.3. 쇠퇴
종교재판에서 주요 목표가 되어, 탄압이 강력해지면서 15세기부터 발도파는 독일어권에서 급격하게 사라졌다. 혹은 탄압을 피해서 산골짜기로 숨어들어가기도 했는데, 발도파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지하로 잠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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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들은 이 그림처럼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산속에 숨어살고 모습을 잘 드러내지 못하다 보니 일단 가톨릭에 걸리면 얄짤없이 재판받고 끔살당했다고 한다.
15세기 얀 후스가 등장하자 많은 발도파들이 자신들과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하여 후스파로 옮겨갔다.
2.4. 종교개혁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각지에 숨어 있던 발도파 공동체는 새롭게 생겨난 개신교 교단들과 접촉하였고, 개신교 교단들은 자신들과 공통점이 많은 발도파들을 같은 개신교 집단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발도파가 다시 공개적인 존재로 드러나게 되자, 발도파는 각지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발도파 신도들은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북부 유럽과 신대륙으로 도주한 경우도 있었다.[1]
2.5.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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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발도파 예배당(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나중에 유럽 대륙에서 다른 개신교 종단들과 비슷하게 발도파 역시 신앙의 자유를 얻어 인정을 받게 되었고 칼뱅주의를 받아들여 완전한 정식 개신교 교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도 발도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들이 활동하고 있다.발도 개혁교회 공식 사이트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북 이탈리아 지역의 산골짜기에 있던 발도파 교회에서 이 지역으로 도망쳐온 유대인들을 보호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박해받던 조상들처럼 보여서 그랬다고.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토리노에 소지한 발도파 예배당을 방문해 교황청의 억압과 가혹행위에 대해 사과를 구했다.
3. 사상
발도파의 기본적인 이념은 기존의 교회 조직체보다는 성경, 복음서를 중시하고, 성경에 따라서 신앙과 도덕을 지키는 것을 가장 우선시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도덕적인 생활과 청빈을 강조하였다.
연옥이나 성인 공경 등 가톨릭 전통을 부정하였다. 성변화 역시 부정하였다. 가톨릭의 교회 조직 역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므로 부정적으로 보았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따르고자 하지 않았으며 로마 교회를 '바빌론의 창녀'라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개신교, 그중에서도 개혁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발도파는 비슷한 시기의 카타리파와는 달리 이원론적 영지주의 세계관을 부정하였으며, 여러모로 카타리파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4. 평가
종교개혁 이전에 나타난 종파이긴 하지만, 발도파는 '사실상' 개신교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교리 면에서도 개신교와 공통점이 많기 때문. 실제로 많은 수의 발도파들이 개신교 조직에 들어가거나, 잔존해있던 발도파 교회가 새로 나타난 개신교와 합동하는 등.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다만 개신교와 비교하면 교리적으로 발전이 미흡하다. 워낙 가톨릭 세력이 강력하던 시대에 나타난 탓에 탄압을 심하게 받아 안전하게 교리 연구를 할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인 듯.
사실 초기부터 개신교는 발도파에 대해서 영적 동질감을 느꼈고, 발도파에게 동정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서 개신교 입장에서 가톨릭의 발도파 공동체 학살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한 팜플렛 등이 많고, 그들을 일종의 '순교자'로 보았다.
다만 발도파의 존재는 개신교의 '역사적 정통성' 주장을 위해서 이용되기도 했다. 일부 반가톨릭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보통 침례교 계열)에서는 교회의 전승을 아예 부정하고, 교회의 지배 아래 '숨겨진 개신교 믿음'이 고대로부터 지속되고 있었다는 이른바 '재야교회'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신교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가르침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교회와 병행하여 이어진 가르침이라는 주장이다. 가톨릭의 탄압을 피해서 숨어 있는 발도파 공동체는 이러한 주장에 증거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발도파 교회는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등[2] 꽤 리버럴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보수 및 근본주의 개신교계에서는 "히익 발도파 너마저"라며 충격과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1] 당연하지만 지금의 미국으로 이주한 발도파들은 가톨릭을 믿는 일반적인 이탈리아계 이민자들과 달리 WASP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고, 영국계나 스코틀랜드계, 네덜란드계와의 통혼도 쉬웠다.[2] 시민결합에 축복을 허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