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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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Purgatorium
영어
Purgatory
한국어
연옥(煉獄)
1. 개요
2. 교리
2.1. 성경적 근거
3. 역사적 배경
4. 정교회의 입장
5. 개신교의 입장
6. 비슷한 개념
7. 창작물에서의 연옥


1. 개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불로써 잠벌(暫罰)을 받는''' 가톨릭사후세계이다.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개신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가톨릭에서만 가르치는 교리이다. '고성소'와 많이 혼동하는데, 고성소는 엄밀히 말하자면 지옥의 일부로 연옥과는 별개이다.

2. 교리


가톨릭 교리에서 은총 상태를 상실하고 대죄 중에 죽은 영혼은 지옥으로 가고, 은총 상태를 보존하고 아무런 대소죄와 잠벌 없이 죽은 영혼은 바로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 두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영혼 즉 은총 상태를 보존하고 죽었지만 소죄와 잠벌이 남아 있는 영혼이 천국 가기 전에 남아 있는 소죄와 잠벌에 대한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곳이 바로 연옥이다. 연옥 영혼들은 정화가 끝나면 천국으로 가게 되므로 구원된 영혼으로 볼 수 있다.
현세 사람들이 기도하는 등 행위로 연옥 영혼들이 연옥에 있는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그 방법 중 대표적으로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부터 8일까지의 팔일축제(과거에는 저성 대첨례 팔부첨례라고 불렀으나 현재 폐지)에 죽은 이의 무덤을 방문해서 그들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산티아고 같은 성지를 순례해서 대사를 받는 것이다. 이 대사는 자기 자신의 잠벌은 사할 수 없지만 연옥 영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본래 대사라는 것은 자신의 잠벌을 지우는 용도로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교회에서 선포한 주간에 일정한 과정을 통해 대사를 받거나 성지순례를 통한 대사는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단, 위령주간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오로지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의 때에 얻은 전대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연옥영혼들을 위해 양도한다고 기도함으로서 양도할 수 있다. 부분대사는 연옥 영혼들에게 양도가 불가능하며, 전대사만 연옥 영혼들에게 양도할 수 있다.
흔히 연옥의 고통을 지옥의 고통과 비견해서 말하곤 하는데, 실제로 성인들의 증언이나 교리상으로도 지옥벌의 고통에 못지 않거나 비등하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단, 지옥의 고통은 주로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즉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조차 없다)에서 오는 것인 반면, 연옥에서의 고통은 주로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에서 오는 것인 만큼, 영원하지도 또 극한에 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연옥에 머물며 잠벌을 씻는 기간에는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때 3명의 목격자들 중 한 명인 루치아가 일찍 죽은 지인(아멜리아)의 안부를 묻자, 성모 마리아는 "그 아이는 세상 끝날 때까지 연옥에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적 계시를 "이 사람은 마지막 때까지 무슨 일을 해도 연옥에서 못 나온다!"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루치아 수녀가 이 말을 성모 마리아에게 들었을 때는 1917년이었고, 이후에도 지금도 그녀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다른 신자들이 열심히 바쳐준다면, 교리적으로 최후의 심판 때보다 더 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현세의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를 정말정말 열심히 해준다면, 영혼들이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이 줄어든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 한국 천주교를 비롯해 전세계 천주교회에서는 연옥 영혼을 위한 위령기도와 중보기도(전구)를 정말 많이 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소모임으로 본당마다 연령회라는 것이 있는데, 본당 신자 중 선종한 사람이 나올 경우, 발인할 때까지 가서 기도해 주는 활동을 한다. 물론 위에 어지간한 기도량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적어뒀지만...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 위령미사 역시 연옥 교리덕에 생긴 것으로, 매년 기일마다 사망한 사람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그가 천국으로 가는 기간이 앞당겨진다는 것이다. 제사를 안 지내는 입안도 위령미사만큼은 꼬박꼬박 바치는 경우가 많다. 2000년 사망한 김환성의 위령미사가 1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봉헌되는 걸 보면 천주교 신자들이 연옥과 위령미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김환성은 인기 연예인이었기에 팬들을 위한 추모의 형태도 적지않아 있다.
정식 교리는 아닌데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의 모습이 현실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 유령으로 나올 수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강령술 같은 걸 허용하지는 않는다.

2.1. 성경적 근거


가톨릭에서 연옥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마카베오기 하권의 다음 대목이다.

다음 날, 장사 지내는 일이 시급해졌으므로, 유다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자들의 주검을 거두어 조상들의 무덤에 친족들과 나란히 묻어 주려고 갔다. 그런데 죽은 자들마다 그 옷 속에서 '''율법으로 유다인들에게 금지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전사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시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의 방식을 찬양하였다.또 그렇게 저질러진 죄를 완전히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간청하였다. 고결한 유다는 백성에게, 전사자들의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천주교 성경)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동번역)

마카베오기 하권 (마카베오기 2권) 12장 39-45절

그런데 마카베오기 하권은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에서 제외된 구약 제2경전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틴 루터가 대사논쟁에서 꿀릴까봐 삭제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의견이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유일한 종교적 교범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지 확인 불가한 출처가 부정확한 부분은 과감하게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경전은 초대 교회 시절 히브리어 사본을 찾아내지 못했고, 불가타 라틴어역을 저술한 히에로니무스도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제2경전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졌다. 이런 교부들의 불신을 반영해서 구약성경을 재편한 그는 우선적으로 구약의 헬라어 부분인 제2경전을 위와 같은 이유로 삭제했다. 이것에 마카베오기 하권이 포함된 것은 지극히 우연적인 일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대사 논쟁이나 연옥 논쟁으로 마카베오기 하권이 가지는 위치는 가톨릭 내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 부분이 겨우 3절에 불과한 짧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2차적으로 신약성경의 재편을 주장했지만, 같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신약은 구약과 비교할 때 출처가 분명하기 때문에 재편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이단들만 하는 짓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포기했다. 이때 빼려고 했던 게 대표적으로 야고보서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감행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로마서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내용들 때문이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면서 야고보서 첫장 전 설명에서 성경의 전체 맥락과 다르다며 주의를 요구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재판이 나오자 이런 설명을 아예 빼버렸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컸다. 그런 열망은 기독교 안에서 성경 외의 것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사실 루터는 사도신경도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배에서 빼버리려고 고민하기도 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기원전 3세기 70인역과 이후 유대인 랍비들의 얌니야 회의를 기준으로만 구약을 인정했기에, 20세기 초까지 제2경전은 가톨릭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당화를 위해 첨부한 부분이라고 개신교와 유대교에게 까여왔다. 정교회에서도 제2경전은 경독서라고 하며, 정경과 완전히 동등한 권위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어 원본이 없는, 또는 시대상 마카베오서처럼 그리스어로 저술된 구약 제2경전 문헌은 헬레니즘 세계로 디아스포라된 여러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고 형성시켜온 것이었다. 70인 역에서는 기존 히브리어로 있던 구약을 당시 지중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했기에 사도시대에도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그리스어(헬라어) 구약을 인용했을 정도로,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라는 문화적 기반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사도행전이나 서간에서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헬레니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에 터잡아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성경'이란 그리스어 구약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하여 제2경전 내지 외경들은 기독교가 처음 형성될 때부터 기독교 안에 있었던 것이다.
사해문서에서 보듯이 제2경전들이 실제로 히브리 원본이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는 있지만(마카베오서는 시대적으로 70인역 이후이니 논외) 다른 제2경전인 희년서, 에녹서까지 히브리어로 나와서 근거로 삼기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희년서와 에녹서를 경독서로 사용한다. 사실 애초에 마카베오서는 히브리서 원본 유무와 별 상관이 없다.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삼은 근거인 70인역은 기원전 300년쯤이고, 마카베오 시대는 그로부터 150여년 후인 데다가 집필 시기는 기원전 60년대이다. 이건 히브리 원전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인정하냐 마냐의 문제. 어쨌든 개신교 대부분이 이제와서 제2경전을 정경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일부 교파에서 제2경전을 인정한다고 해서 무조건 연옥 및 유사 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카베오기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 말고도, 개신교에서도 정경으로 인정하는 신약성경에도 연옥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부분이 있다. 다만, 연옥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기도 하다. 그 중에 몇 구절을 통해 연옥이라는 개념을 옹호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공동번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개역개정)

마태오 복음서 12장 32절

위의 마태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여 유추해보면, 내세에서도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이것이 사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톨릭은 내세(연옥)에서 소죄를 다른 신자들의 전구나 자신의 벌로 용서받고 보속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것이 그 신자의 구원 상태를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 연옥에 가는 사람들은 쉽게말해 이미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죽기 전에 모든 대죄를 용서받고(고해성사로) 떨쳐내거나 용서받지 못한 소죄+자신의 죄를 짓는 악습과 죄로 기우는 습성+이미 현세에 용서받았던 과거 대죄들의 못다한 보속을 연옥에서 모두 정화의 방식으로 벌 받는 것이다.
연옥은 구원(=천국행)이 확정된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오점이나 의롭지 못한 실수들을 마저 치르는 상태와 장소를 말한다. 따라서, 가톨릭의 연옥 교리를 설명하며 연옥은 죽은 뒤의 제 2의 구원 기회를 바라는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은 오류이다.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만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공동번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개역개정)

고린토1서/고린도전서 15장 29절

위 구절은 사도 바울로가 고린토 교회를 향해 하는 말이다. 현재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받는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어떤 의식을 행했고, 또 바울로가 그 의식을 언급하면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가 그 죽은 이들을 위한 어떤 의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 보자.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를 읽어보면 오히려 바울로가 이 의식에 행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주님께서 오네시포로의 집안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감옥에 갇힌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로마에 와서는 나를 찾느라고 굉장히 애쓴 끝에 나를 만났습니다.

내가 에페소에 있을 때에 그가 얼마나 많은 봉사를 하였는지 그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빕니다.'''

디모테오 2서/디모데후서 1장 16-18절 (공동번역)

바울로가 그의 제자 디모테오(티모테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네시포로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편지를 쓰는 시점에서 죽어 고인이 된 오네시포로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빌고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인간이 받는 심판을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따라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번역)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개역개정)

베드로 1/전서 4장 6절

베드로는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전하다의 원어는 εὐηγγελίσθη, 유앙게리세스로 읽을 수 있는 이 단어는 복음의 동사형이다. Preach(대다수 영어성경)혹은 Proclaim(BLB, ISV)으로 번역한다. 다만 이 구절에서는 주의가 필요한데 복음이 전해진다고 했지 죽은 이들이 복음을 따라 믿는다고 한 적은 없다. 이 대목은 같은 책 3장 19절의 ἐκήρυξεν, 선포하다와 동의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승리 선포라는 해석도 가능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죽음, 사망을 영적 죽음이나 사망으로 보는 견해는 개신교의 정통 견해가 아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6장 22절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원문에서는 ἀποθανεῖν(아포사임)으로 적는데 동일한 단어들이 맥락상 영적 죽음을 의미할 수 없는 대목에서 지속적으로 쓰인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가 대표적. 이 구절이 영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는단 말인가? 하지만 이 죽음을 영적 죽음으로 해석하더라도 영적으로 죽은 이들이 복음을 받을리가 없다.
위의 성경 말씀들을 종합해보자면, 우리가 (현실에서의 소원을 담아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죽은 자의 '''소죄'''(구원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하느님 앞에서의 작은 죄악들)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연옥이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아래의 "역사적 배경" 문단 참고)과 위에서 살펴본 성경 구절들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죽은 자들의 상황을 담아낼 개념으로서 기독교 역사 안에서 다듬어져 형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옥"이 원래 기독교 안에서 논란이 많았던 주제이므로, 이런 문장에 개신교인들의 반론이 없진 않을 것이다. 성경을 근거해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통해 좀 더 진실에 다가가려는 토론은 바람직하지만, "내 성경 해석만이 옳으니 다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3. 역사적 배경


연옥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믿음과 그 전제가 되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위에서 인용된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대교(특히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있었다.

바울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의회는 갈라지고 말았다.

사두가이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사이파는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23장 7-8절 (공동번역)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도 부활이나 천사가 있다고 믿는 바리사이파와, 모세오경만을 인정해서 그런 게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파가 대립하여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당시 바리사이파가 믿었던 "부활"이 어떤 의미였었을 지를 생각해보자. 당시 유대교에는 메시아가 고난당해 죽음을 당하고 부활한다는 개념은 없었으며,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윤회라는 개념도 없었다. 이들에게 '''부활'''은 내세에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이었다. 기독교는 이런 믿음을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았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어떤 식으로 죽은 이들에게 유익한지, 그리고 죽은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길래 기도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차츰 지금과 같은 공간적 개념으로서의 연옥 믿음이 발생했다. 이는 5세기 초부터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4세기까지는 역사적인 혼돈기로서, 기독교 전반에 종말론적 성향이 강하게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심판이 곧 도래할 것이라 믿었고, '모 아니면 도',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5세기 이후 조금씩 세상이 안정적으로 변하자, "느긋하게 지내도 괜찮을 거 같아" 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세상에 지옥과 천국 둘 중 하나면 너무 각박하잖아. 지옥에 갈 만큼 죽을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라는 사고방식에 도달했고, '''"하느님은 사랑이셔서 누구나 구원받기 원하신다"'''를 근거로 연옥의 교리를 완성해갔다.
연옥 개념은 중세의 경제 발전 때문에 탄생했다는 이론도 있다.[1] 중세 시기 교회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지 않는 행위를 죄악시했는데, 특히 고리대금업이 대표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에 고리대금업자 이미지가 덧씌워진 반유대주의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서양 중세 시기 경제 발전이 이뤄지면서 교회의 이러한 통제는 잘 되지 않았고, 교회는 언제부턴가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렀다. 이런 타협의 일환으로 설정된 '연옥'이라는 공간은 내면적 회개를 중시하는 공간으로, 정죄가 끝나면 천국행을 보장받는 곳이었다. 금융업자들은 생전에 돈을 벌기 위해 저질렀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 회개하고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자크 르 보프는 연옥이 자본가들에게 지옥을 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연옥은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연옥론이 아닌 칼뱅주의의 청부론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참조). 실제로 근대 자본주의가 꽃을 핀 것은 개신교권이었으며, 가톨릭은 탐욕에 대해서는 대죄로 보는 입장이기 때문.

4. 정교회의 입장


정교회에서는 가톨릭의 잠벌과 보속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후에 자기 죄를 씻기 위해 불로 지져야 한다는 연옥 교리 역시 부정한다. 15세기 서방에서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에서 에페소스의 마르코스(Μάρκος ο Ευγενικός) 주교는 교황수위권필리오케를 비롯한 서방 신학을 반대하면서 연옥에 대한 믿음 또한 거부하였으며 오늘날의 정교회도 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천국에 다다르기 전 정화를 위해 잠시 고통받는 기간이 있다는 믿음은 가톨릭과 정교회 두 교회가 갈라지기 이전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동서 대분열이 일어난 후인 12세기 서방 교회에서의 일이었으며, 그것이 가톨릭 교리로 선언된 것은 13세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정교회에서는 연옥이라는 장소 자체를 규정하는 교리는 없다.
정교회에서도 죽은 후 사람의 영혼이 어떤 '중간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가르친다.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중간 상태에서 쉬게 되는데, 이때 의로운 영혼들은 선한 것들을, 불의한 영혼들은 고통을 미리 맛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추도식, 기도, 자선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가톨릭과 같으며, 그 근거 중 하나로 마카베오 2서 12장 43절을 드는 것도 가톨릭과 같다. 양자는 의로운 영혼이라도 지은 죄가 없지 않다면 천국행이 지연된다는 것과 산 사람들이 죽은 이들의 지복을 앞당기기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유익하다는 두 가지 교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어 공통된다.
다만 정교회는 이 중간 상태를 어디까지나 미지의 장소로서 남기며, 가톨릭의 연옥과 같이 상세히 가르치는 공식적인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교회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할 뿐,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교리로서 확정 짓지 않고 그저 전승으로 말한다. 이에 대하여 델로니아(방벽)라는 전승이 있으며, 영어로는 'Aerial toll house'라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죽은 의로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 일종의 관문을 거치며, 천사들이 의로운 영혼을 천상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대기권에서 악마들이 생전에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며 영혼들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정교회 신앙의 신조 제11조 참고)

5. 개신교의 입장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성공회 39개 신조 제 22조. (현대 성공회는 이 교리에 대해 굳이 설명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나 공식적으로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

성공회루터교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연옥과 같이 '죄를 씻는' 공간은 없다는 주장을 유지한다. 애초에 타인의 기도를 통해 벌이 사라진다, 벌을 줄여준다 등은 개신교에선 해괴한 소리로 취급한다. 다만 연옥에 대한 성공회의 주류 입장은 적극적인 부정론보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에 가깝다.
대다수 개신교 교회에서는 마카베오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마카베오서 해당 구절이 연옥의 존재를 입증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해당 본문에서는 전사한 몇 사람이 우상숭배한 것으로 밝혀지자 마카베오와 부하들이 그들도 부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와 제사를 올린다. 그런데 이런 기도와 제사는 연옥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이가 똑같이 중간상태에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육신의 부활을 얻기를 소망한 몇몇 사람이 아직 속죄받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에, 이들도 다시 일어나(하늘에 가서가 아니라)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확실히 누리도록 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2] 애초에 우상숭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톨릭 교리상 대죄에 속하는 것으로 이러한 죄를 연옥에서 씻는다는 것은 가톨릭 교리와도 맞지 않는다.
물론 개신교에서 마카베오서를 교리의 근거로서 인용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성서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최초의 70역 자체에 마카베오서 등 제2경전으로 간주하는 문서가 포함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참고
아울러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믿음과 관련하여 죽은 신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성공회에서도 별세한 신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로 그들의 죄가 덜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찬례의 모든 과정 속에 지금까지 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간 모든 신자들과도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그 안에서 친교를 나누었다는 의미.[3]
다만 교파에 따라서 정교회의 정화단계에 더 가까운 것을 믿기도 한다.

6. 비슷한 개념


이슬람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선인은 낙원에 가고, 악인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만큼의 무거운 죄를 짓지는 않은 인간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지옥에서 반성하고, 그 후 낙원으로 올라간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죄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독재자빵 하나를 훔친 도둑이 똑같이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건 뭔가 정당하지 않지 않은가? 그래서 무슬림들도 죽은 자에 대한 기도를 꽤 자주 하는 편이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와 빵 하나를 훔친 도둑'을 신의 '전지'의 속성을 겸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심판은 객관적이며 정의롭게 진행된다. 즉, 인간이 직접 경험하고 생각하고 듣는 것으로는 그것의 공평성, 실효성에 대해 말하거나 주장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인간은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점을 우려해보면 옳다, 옳지못하다로 나누기엔 죽을때까지 끝나지 않을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낙원(천국)과 지옥은 단계가 나뉘어 있다"고 함으로써 불공평성에 대한 의문증을 어느정도 해소하기도 한다.
동양권에서는 윤회 사상과 섞여서 현세를 연옥으로 보는 견해가 은근히 존재한다. 혹은 불교의 지옥도 엄청나게 괴롭고 길긴 하지만 끝이 있다는 이유로 연옥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동양의 사후세계에서는 지옥이나 극락에 가기 애매한 영혼은 황천에 머무르다가 다시 환생한다고 한다.(대신 여기서 사고치면 지옥행)

7. 창작물에서의 연옥


연옥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단테신곡 연옥편이 있다. 다만 지옥편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훨씬 적다...
AVGN이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게임 오류 등으로 스테이지가 끝날 방법이 없을 때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단어 중 림보와 함께 매우 높은 빈도로 등장.
미드 수퍼내추럴 시즌 6 ~ 7에 따르면 연옥은 뱀파이어늑대인간 등의 괴물들이 죽으면 가는 곳으로, 시즌 7 에피소드 1에서 '죽음'이 한 말에 따르면 인간천사를 만들기 전 최초로 만들었던 존재인 '리바이어던'이 세계를 먹어치우기 전에 가두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일곱 개의 대죄(만화)에서 등장한다.
[1]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2] 톰 라이트, '톰 라이트 죽음 이후를 말하다', IVP, 2017, 53-54p[3] 톰 라이트, 위의 책 및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