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달
'''발터 달(Walther Dahl : 1916년 3월 27일~1985년 11월 25일)'''
독일 제국 시대의 끝머리에 라인란트-팔츠 지방의 바트 베르크차베른(Bad Bergzabern)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발터 달은 그가 아직 아기일 때 아버지가 1차 대전에 끌려나가 전사하고 말았다. 발터 달 소년은 비록 편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솔직하면서도 담대한 성격을 지니고 지기 싫어하는 대장부로 자라나게 된다. 청년이 된 달은 19세가 되던 1935년에 독일 육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슈투트가르트에 주둔하는 제119보병연대에 배속되었던 그였지만, 곧 공군으로 전속을 희망해 공군 비행학교에 들어가 엄격한 훈련을 모두 이겨내고 전투기 파일럿이 되었다. 1941년 5월에 달은 제3전투항공단(JG 3) 항공단 본부(Geschwaderstab)에 배속되었고, 러시아 침공 첫 날인 6월 22일에 첫 격추와 짜릿한 승리를 맛보았다. 7월에 JG 3/제II비행단으로 옮겨간 그는 10월 말까지 17대를 격추했지만, 당시 그 정도로는 눈에 띄는 베테랑 취급은 받지 못했다. 그후 12월에는 JG 3 / 제4비행단으로 전속되었고, 발터 달이 속한 그루페는 지중해 전역으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1942년 4월 1일에 발터 달은 몰타 상공에서 스핏파이어를 포함해 2대의 적기를 격추시켰고, 4월 10일에 JG 3 / 보충 비행단(Ergänzungsgruppe, JG 3)의 비행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4월에 달은 아돌프 갈란트에 의해 전투기대 총감실의 요원으로 발탁되었고, 사령부에서 얼마간 근무하다가 8월에는 동부전선에 있던 JG 3 비행단 부관(Geschwaderadjutant)에 임명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격추수는 51기로, 1942년 12월에는 이미 독일 황금십자장을 받아놓고 있었다. 1943년 7월 20일에 JG 3/제 III 비행단장으로 지휘관에 임명된 그는 다시 서부전선으로 가서 뮌스터 기지에 부임했고 9월 6일에 2대의 4발 폭격기를 격추시켰다. 이듬해인 1944년 2월 23일에는 추가로 2대의 4발 중폭격기와 1대의 P-38 전투기를 해치웠다. 달이 이끄는 JG 3/제 III 비행단의 편대는 1943년 8월 17일에 실시된 연합군의 슈바인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에 대한 폭격을 막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숫적 열세는 메꿀 방법이 없었고, 영국 공군 제222스쿼드론의 스핏파이어에 의해 5대의 Bf 109가 격추되고 그 중에는 불시착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발터 달이 탄 Bf 109G-6도 포함되어 있었다. 달 소령은 1944년 3월에 67기 격추의 전공으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다음 5월에 특수 부대인 JG z.b.V.의 지휘관 보직이 주어졌다. 6월 6일까지 이 부대를 이끌던 그는 곧 6월 27일에 제300전투항공단(JG 300)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JG 300는 기체 각부에 장갑판을 두르고 중무장을 갖춘 돌격 전투기인 Fw 190A-8 "Sturmbock"를 장비하고 밀집 편대로 근거리에서 집중 사격을 퍼붓고, 총탄을 다 쓰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적기에 동체로 부딛혀서라도 적 폭격기를 떨구는 임무를 띤 부대로 유명했다.
1944년 7월 7일에 미 8 공군 소속의 B-17과 B-24 폭격기 1,129대로 편성된 대편대가 라이프치히의 항공기 공장과 브레멘, 메르제부르크, 뤼츠켄도르프(Lützkendorf)에 있는 인조 석유 공장을 폭격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발진했다. 마치 폭격기의 강과도 같은 이 대형은, 달 소령이 지휘하고 있던 JG 300의 2개 비행단과 JG 3의 제4비행단으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와 분견대(Gefechtsverband)에게 요격되었다. 달 소령은 부하들에게 멀리서 사격하고 이탈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시켰다. 그 대신 멀찍이서 포화를 열기 전에 제492폭격대대의 B-24 편대의 영거리까지 공격 부대를 과감하게 접근시켰다. 이런 작전으로 인해 그가 지휘하는 요격부대는 호위 전투기가 미처 파고들 틈을 주지 않고 1분 남짓한 찰나의 시간에 무려 12대의 B-24를 섬멸시키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이 날 독일 공군은 미 육군항공군 소속의 B-24를 28대나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는데, 그중에서 적어도 21기는 전투 기록의 대조로 확인이 되고 있다.
기습한 JG 3/제IV비행단에서 9대의 전투기가 격추되고 3기가 피탄으로 손상을 입어 동체 착륙했으며 부대 조종사 5명이 전사했다. 달 소령의 보고에 따르면 1944년 9월 13일에도 B-17 폭격기를 여러 대 격추시켰다고 하지만, JG 300을 연구한 (Lorant Goyat)는 미군 쪽에 그 주장에 부합될 만큼의 손실은 기록이 없다고 한다. 휘하 부대원들의 용맹무쌍한 전투로 인해 발터 달은 '''박치기 달(Rammdah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7월 7일에 발터 달과 그의 부대원들의 활약상은 승전보에 목마른 독일군 사령부에 좋은 선전 수단이 되어 1944년 7월 9일자 국방군 보고(Wehrmachtbericht)를 통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이제 그는 연합군 폭격기 부대원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저명인사이자, 공포스러운 적으로 알려졌다.
이 날의 전투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반색하면서 그 공군 소령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총통의 소환을 받은 그는 9월 15일에 라슈텐부르크로 날아가서 게르만 민족의 영도자를 만나는 영광을 얻었다. 히틀러는 발터 달을 마주 앉힌 뒤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으며 의례적인 치하를 했다. 그리곤 곧바로 최근 며칠 간의 임무에 대해 물어보았다. 달 소령은 현재 잃어버린 제공권을 찾으려면 전선의 전투기를 Me 262로 바꾸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역설했지만, 신이 나서 그의 얘기를 듣던 총통은 신무기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굳혔다.
11월 30일 아침에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이 지휘 방문을 했을 때 발터 달은 자신의 기사철십자 훈장에 곡엽이 더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후 12:20에 괴링과 그의 친구이자 부관 브루노 로에르처 장군이 도착하자 발터 달 소령은 공식 브리핑을 했고, 전술 회의가 열렸다. 곧바로 안건은 지난 며칠과 같은 악천후에서 비행 임무를 속행하여 요격 작전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에 관한 질문이 나오게 되었다. 냉철하고 솔직하면서도 직선적인 달 소령은 좋은 날씨의 경우에만 자신들이 20 대 1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의 적과 싸우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훈련이 덜 되고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조종사들이 처하는 어려움에 관해서도 힘을 주어 강조했다. 이러한 토론 중에 갑자기 공습 경보가 울리며 연합군 폭격기 편대가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듣자, 괴링은 달에게 즉시 이륙하여 요격할 것을 명령했다. 발터 달은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분노한 괴링이 일갈했다.
1945년 1월 26일, 패색이 완연해진 제3제국의 상황을 지켜보던 괴링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일개 편대원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던 발터 달을 다시금 기용해 주간전투기 감찰관(Inspekteur der Tagjäger)에 임명했다. 며칠 후, 그에게는 대령 진급과 연기되었던 곡엽 훈장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승진과 전보 조치에도 불구하고 달 중령은 실전 출격을 멈추지 않았다. 발터 달은 어깨에 대령 계급장을 붙이고도 제2예비 전투항공단/제 III 비행단에서 젊은 조종사들 틈바구니에 끼어 Me 262에 탑승하여 싸우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3월 27일에 2대의 P-47 전투기를 격추한 것이 발터 달의 마지막 전과가 되는가 했지만, 4월 26일에 딜링겐 근방에서 머스탱 1기를 더 격추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 발터 달 대령은 300회의 지상 공격 임무를 포함한 678회의 실전 출격에서 128대의 전과를 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JG 300의 연구가들은 이것은 후대에 와서 부풀려진 것이며 그가 세운 실제 전과는 100대 미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실제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결과는 발터 달의 회고록인 ''람야거(Rammjäger)''를 기준으로 써진 자료들이 퍼지고 검증없이 확대재생산된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연합군 중폭격기와 고성능 전투기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친 창공의 투사이자 걸출한 교관이었던 발터 달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발터 달은 1985년 11월 25일에 69세의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
[image]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12월 2일)
[image]기사철십자장 (1944년 3월 11일)
국방군 보고(Wehrmachtbericht) (1944년 7월 9일)
곡엽기사철십자장 제724호 (1945년 2월 1일)
1. 보병 출신 조종사
독일 제국 시대의 끝머리에 라인란트-팔츠 지방의 바트 베르크차베른(Bad Bergzabern)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발터 달은 그가 아직 아기일 때 아버지가 1차 대전에 끌려나가 전사하고 말았다. 발터 달 소년은 비록 편모 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솔직하면서도 담대한 성격을 지니고 지기 싫어하는 대장부로 자라나게 된다. 청년이 된 달은 19세가 되던 1935년에 독일 육군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슈투트가르트에 주둔하는 제119보병연대에 배속되었던 그였지만, 곧 공군으로 전속을 희망해 공군 비행학교에 들어가 엄격한 훈련을 모두 이겨내고 전투기 파일럿이 되었다. 1941년 5월에 달은 제3전투항공단(JG 3) 항공단 본부(Geschwaderstab)에 배속되었고, 러시아 침공 첫 날인 6월 22일에 첫 격추와 짜릿한 승리를 맛보았다. 7월에 JG 3/제II비행단으로 옮겨간 그는 10월 말까지 17대를 격추했지만, 당시 그 정도로는 눈에 띄는 베테랑 취급은 받지 못했다. 그후 12월에는 JG 3 / 제4비행단으로 전속되었고, 발터 달이 속한 그루페는 지중해 전역으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2. 지중해 전역과 본토 방공
1942년 4월 1일에 발터 달은 몰타 상공에서 스핏파이어를 포함해 2대의 적기를 격추시켰고, 4월 10일에 JG 3 / 보충 비행단(Ergänzungsgruppe, JG 3)의 비행대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4월에 달은 아돌프 갈란트에 의해 전투기대 총감실의 요원으로 발탁되었고, 사령부에서 얼마간 근무하다가 8월에는 동부전선에 있던 JG 3 비행단 부관(Geschwaderadjutant)에 임명되었다. 그때까지 그의 격추수는 51기로, 1942년 12월에는 이미 독일 황금십자장을 받아놓고 있었다. 1943년 7월 20일에 JG 3/제 III 비행단장으로 지휘관에 임명된 그는 다시 서부전선으로 가서 뮌스터 기지에 부임했고 9월 6일에 2대의 4발 폭격기를 격추시켰다. 이듬해인 1944년 2월 23일에는 추가로 2대의 4발 중폭격기와 1대의 P-38 전투기를 해치웠다. 달이 이끄는 JG 3/제 III 비행단의 편대는 1943년 8월 17일에 실시된 연합군의 슈바인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에 대한 폭격을 막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3. 돌격 전투기 부대
그러나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숫적 열세는 메꿀 방법이 없었고, 영국 공군 제222스쿼드론의 스핏파이어에 의해 5대의 Bf 109가 격추되고 그 중에는 불시착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발터 달이 탄 Bf 109G-6도 포함되어 있었다. 달 소령은 1944년 3월에 67기 격추의 전공으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다음 5월에 특수 부대인 JG z.b.V.의 지휘관 보직이 주어졌다. 6월 6일까지 이 부대를 이끌던 그는 곧 6월 27일에 제300전투항공단(JG 300)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JG 300는 기체 각부에 장갑판을 두르고 중무장을 갖춘 돌격 전투기인 Fw 190A-8 "Sturmbock"를 장비하고 밀집 편대로 근거리에서 집중 사격을 퍼붓고, 총탄을 다 쓰거나 필요한 경우에는 적기에 동체로 부딛혀서라도 적 폭격기를 떨구는 임무를 띤 부대로 유명했다.
4. 폭격기의 강에 뛰어들다
1944년 7월 7일에 미 8 공군 소속의 B-17과 B-24 폭격기 1,129대로 편성된 대편대가 라이프치히의 항공기 공장과 브레멘, 메르제부르크, 뤼츠켄도르프(Lützkendorf)에 있는 인조 석유 공장을 폭격하기 위하여 영국에서 발진했다. 마치 폭격기의 강과도 같은 이 대형은, 달 소령이 지휘하고 있던 JG 300의 2개 비행단과 JG 3의 제4비행단으로 이루어진 혼성 부대와 분견대(Gefechtsverband)에게 요격되었다. 달 소령은 부하들에게 멀리서 사격하고 이탈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시켰다. 그 대신 멀찍이서 포화를 열기 전에 제492폭격대대의 B-24 편대의 영거리까지 공격 부대를 과감하게 접근시켰다. 이런 작전으로 인해 그가 지휘하는 요격부대는 호위 전투기가 미처 파고들 틈을 주지 않고 1분 남짓한 찰나의 시간에 무려 12대의 B-24를 섬멸시키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이 날 독일 공군은 미 육군항공군 소속의 B-24를 28대나 격추시켰다고 주장했는데, 그중에서 적어도 21기는 전투 기록의 대조로 확인이 되고 있다.
기습한 JG 3/제IV비행단에서 9대의 전투기가 격추되고 3기가 피탄으로 손상을 입어 동체 착륙했으며 부대 조종사 5명이 전사했다. 달 소령의 보고에 따르면 1944년 9월 13일에도 B-17 폭격기를 여러 대 격추시켰다고 하지만, JG 300을 연구한 (Lorant Goyat)는 미군 쪽에 그 주장에 부합될 만큼의 손실은 기록이 없다고 한다. 휘하 부대원들의 용맹무쌍한 전투로 인해 발터 달은 '''박치기 달(Rammdah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5. 총통 소환
7월 7일에 발터 달과 그의 부대원들의 활약상은 승전보에 목마른 독일군 사령부에 좋은 선전 수단이 되어 1944년 7월 9일자 국방군 보고(Wehrmachtbericht)를 통해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나갔다. 이제 그는 연합군 폭격기 부대원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저명인사이자, 공포스러운 적으로 알려졌다.
이 날의 전투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반색하면서 그 공군 소령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총통의 소환을 받은 그는 9월 15일에 라슈텐부르크로 날아가서 게르만 민족의 영도자를 만나는 영광을 얻었다. 히틀러는 발터 달을 마주 앉힌 뒤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으며 의례적인 치하를 했다. 그리곤 곧바로 최근 며칠 간의 임무에 대해 물어보았다. 달 소령은 현재 잃어버린 제공권을 찾으려면 전선의 전투기를 Me 262로 바꾸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역설했지만, 신이 나서 그의 얘기를 듣던 총통은 신무기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굳혔다.
발터 달 소령과 총통의 3시간 동안의 대면은 그렇게 끝났다. 달은 훗날 자서전에서 총통은 아무래도 신무기 매니아인 것이 분명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또한 그가 의외로 기술적인 디테일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자네, Me 262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거라면... 더이상 하지 말게나."
6. 괴링과의 불화
11월 30일 아침에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이 지휘 방문을 했을 때 발터 달은 자신의 기사철십자 훈장에 곡엽이 더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후 12:20에 괴링과 그의 친구이자 부관 브루노 로에르처 장군이 도착하자 발터 달 소령은 공식 브리핑을 했고, 전술 회의가 열렸다. 곧바로 안건은 지난 며칠과 같은 악천후에서 비행 임무를 속행하여 요격 작전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에 관한 질문이 나오게 되었다. 냉철하고 솔직하면서도 직선적인 달 소령은 좋은 날씨의 경우에만 자신들이 20 대 1로 압도적으로 우세한 숫자의 적과 싸우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훈련이 덜 되고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조종사들이 처하는 어려움에 관해서도 힘을 주어 강조했다. 이러한 토론 중에 갑자기 공습 경보가 울리며 연합군 폭격기 편대가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듣자, 괴링은 달에게 즉시 이륙하여 요격할 것을 명령했다. 발터 달은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분노한 괴링이 일갈했다.
이처럼 옥신각신하던 순간, 전투기대 총감인 아돌프 갈란트가 기지에 도착해 그 자리에 끼어들어 상관 괴링을 뜯어말리고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발터 달은 군법회의에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즉시 지휘관 보직을 반납하고 병가를 내게 된다. 이와 같은 마찰을 일이켰기 때문이겠지만, 결국 발터 달에게 수여되기로 했던 곡엽기사철십자장은 한동안 주어지지 않았다."소령! 지금 당장 내 명령을 받들어 전 부대원을 이륙시키지 않으면 귀관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형에 처해지게 될거야!"
7. 재시동
1945년 1월 26일, 패색이 완연해진 제3제국의 상황을 지켜보던 괴링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일개 편대원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던 발터 달을 다시금 기용해 주간전투기 감찰관(Inspekteur der Tagjäger)에 임명했다. 며칠 후, 그에게는 대령 진급과 연기되었던 곡엽 훈장이 베풀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승진과 전보 조치에도 불구하고 달 중령은 실전 출격을 멈추지 않았다. 발터 달은 어깨에 대령 계급장을 붙이고도 제2예비 전투항공단/제 III 비행단에서 젊은 조종사들 틈바구니에 끼어 Me 262에 탑승하여 싸우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8. 격추수 논란
3월 27일에 2대의 P-47 전투기를 격추한 것이 발터 달의 마지막 전과가 되는가 했지만, 4월 26일에 딜링겐 근방에서 머스탱 1기를 더 격추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 발터 달 대령은 300회의 지상 공격 임무를 포함한 678회의 실전 출격에서 128대의 전과를 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JG 300의 연구가들은 이것은 후대에 와서 부풀려진 것이며 그가 세운 실제 전과는 100대 미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실제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결과는 발터 달의 회고록인 ''람야거(Rammjäger)''를 기준으로 써진 자료들이 퍼지고 검증없이 확대재생산된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연합군 중폭격기와 고성능 전투기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친 창공의 투사이자 걸출한 교관이었던 발터 달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발터 달은 1985년 11월 25일에 69세의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
9. 서훈
[image]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12월 2일)
[image]기사철십자장 (1944년 3월 11일)
국방군 보고(Wehrmachtbericht) (1944년 7월 9일)
곡엽기사철십자장 제724호 (1945년 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