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파키스탄 관계
1. 개요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의 관계. 방글라데시는 1947년에서 1971년까지 한 나라였다.
2. 역사적 관계
2.1. 21세기 이전
파키스탄 건국 당시 파키스탄의 주도세력이었던 펀자브인, 신드인 등은 민족적으로 동파키스탄과 인도 서벵골 주의 벵골인보다 오히려 북부 인도인과 더 가깝다. 벵골인과 펀자브인을 외모로 구별하는게 인도인과 펀자브인 구별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파키스탄의 국부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세속주의 성향이 강해서인지 “파키스탄은 아리아인의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천명했는데, 이는 서파키스탄 관료들에 의해 피부색이 더 짙은 동파키스탄 주민[1] 을 2등 시민 취급하라는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도 완전 달랐다. 우르두어는 힌디어와 흡사하데, 벵골어와는 매우 다르다. 파키스탄 최대 언어인 펀자브어도 벵골어와 크게 다르기는 마찬가지. 사실상 서파키스탄과 인도 내 힌디어 지역은 종교 빼면 서로 구분될 만한 점이 많지 않다. 그런데 파키스탄의 성립에는 인도 제국 서북부 출신의 무슬림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옛 인도 제국 서북부 출신들이 쥐게 되었고, 당연히 동벵골 사람들의 불만이 커졌다.
파키스탄 독립 운동에 기원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르두어 교육 및 진흥 운동에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사이드 아흐마드 칸과 무함마드 이크발 등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 인도 이슬람계에 대표적인 법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무함마드 이크발은 무슬림 엘리트들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서북부 무슬림 밀집 지역(펀자브, 신드, 발루치스탄, 카이베르파크툰크와)이 따로 독립하여 안정적인 무슬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벵골 지역은 빠져 있었다. 즉 파키스탄 독립 운동을 주도하는 엘리트들 입장에서 방글라데시는 주요 관심 대상 밖이었다.
파키스탄 정부에서는 방글라데시에서 많이 쓰는 벵골어 대신 우르두어를 쓰라고 했으나, 이에 다카 대학교 학생들이 반발 시위를 벌였다.[2] 서파키스탄의 경우 주요 민족별 언어만 해도 4가지가 되었고 다른 언어들도 각 지역별로 여러개가 쓰였기 때문에[3] 우르두어를 공용어이자 국어로 해야 한다는 방침에 사람들이 수긍했으나, 동파키스탄의 경우에는 인도에서 피난온 무슬림과 줌머인들을 빼면 거의 대부분이 벵골어를 썼던지라 동파키스탄에서 우르두어를 국어로 정한다는 것에, 일부러 벵골어 대신 우르두어를 사용하라는 방침에 반발하였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가 벵골 민족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파키스탄의 공용어를 벵골어로 지정했지만, 시위를 군인들이 폭력으로 누른 것이 방글라데시인들에게 자극이 되었고, 벵골인들은 아와미 연맹을 결성했다.
하지만 동파키스탄의 공용어가 벵골어로 지정된 이후에도 양측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는데, 서파키스탄은 정치, 경제 등 파키스탄의 모든 주도권을 모두 독점했고,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소외당했다. 이 과정에서 쌀, 소고기, 생선 등 식량자원들까지 수탈하는 등 경제적 식민지로 차별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동파키스탄 사람들이 먹어야 할 식량까지도 수탈할 정도로 악랄했다.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 본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상술했다시피 같은 수니파 무슬림이라지만 언어와 문화 차이도 컸고 인종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파키스탄의 아리아인들은 피부색이 흰 반면에 동파키스탄인들은 사실상 벵골인 단일 민족으로 이루어져서 피부색이 상당히 검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에게 인종차별까지 당하고 살았으며, 당연히 동파키스탄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동파키스탄의 분노는 1970년 방글라데시에서만 50만 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낸 사이클론에 서파키스탄 정부가 미적지근하게 대응한 일과 아와미 연맹이 압승한 1970년 총선 결과[4] 를 서파키스탄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은 것을 계기로 폭발해 독립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서파키스탄으로부터 1971년에 독립했다. 하지만 서파키스탄에서는 이마저도 인정하지 않았고 방글라데시의 독립선언 후 군대를 동원해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최소 30만, 추산에 따라 최대 300만 명에 달하는 방글라데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를 피해 600만 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인들이 인도로 피난가는 사태까지 벌어지다 결국 인도의 개입으로 독립했다.
2.2. 21세기
위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라[5] 2013년 12월에는 방글라데시에서 파키스탄에 동조해 민병대를 이끌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혐의로 기소된 압둘 카디르 몰라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파키스탄이 이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의회에서 채택하였고, 이에 분노한 방글라데시 시민들이 다카에 있는 파키스탄 대사관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으며, 2017년에는 3월 25일을 파키스탄군에 의해 시민들이 학살당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일로 지정했다.# 실제로 이러한 역사적인 악감정 때문인지 방글라데시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 카슈미르 영토분쟁에서 아예 인도가 점령하고 있는 잠무카슈미르를 비롯해 파키스탄이 지배하고 있는 길기트발티스탄과 아자드카슈미르 등 카슈미르 북서부 지역까지 모조리 인도 땅으로 인정, 자국에서 발간하는 세계지도에 인도령으로 표기하며 인도를 편 들고 있다.[6]
방글라데시 내 주요 이슬람주의 정당 중 하나로 파키스탄의 극우 이슬람주의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자마티 이슬라미 파키스탄)과 같은 뿌리를 가진 방글라데시 무슬림 회의가 존재한다. 방글라데시 무슬림 회의는 방글라데시의 국어를 다시 우르두어로 정해야 한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파키스탄의 유명 이슬람주의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7] 의 이슬람주의를 추종하기 때문이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 샤리아 내 고리대금업을 합법화시킨 주범인데, 덕분에(...) 방글라데시에서 고리대금업의 폐단이 너무 심각하여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방글라데시 내 고리대금업과 빈부격차 문제를 줄이기 위해 무함마드 유누스의 그라민 은행이 출범하여 서민들에게 저리 대출을 실시하였으나, 방글라데시 무슬림 회의 측은 무함마드 유누스가 샤리아에 승인을 받지 않은 세속주의 은행을 운영하여 샤리아에 어긋난다며 고소하는 등 추태를 부렸다. 물론 이런 행태 덕분에 방글라데시인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어서 현재 방글라데시 의회에 의석은 1석도 없는 원외정당이다.
3. 관련 문서
[1] 물론 벵골인들도 인도아리아어군 민족이지만...[2] 이 시위는 1952년 2월 21일에 일어났는데, 이날은 현재 방글라데시의 주요 국가 기념일 중 하나이자 유네스코에서 '''세계 모어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3] 펀자브어, 신드어, 발루치어, 파슈툰어 외에도 사라이키어, 와키어, 부르샤스키어, 발티어 등등 '''엄청 많다.'''[4] 당시 동파키스탄의 인구가 서파키스탄보다 더 많아서 전체 의석 300석 중 162석이 동파키스탄 지역에, 138석이 서파키스탄 지역에 배정되어 있었는데,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의 의석 162석 중 160석을 차지하면서 단독으로 과반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5]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기준 겨우 50년밖에 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가 끝난지 80년 가까이가 되었음에도 아직 한국인들이 일본을 보는 시각은 영 좋지 않은데,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을 보는 시각은 말할 필요가 없다.[6] 단 중국이 점거하고 있는 악사이친 지역에 대해서는 중국도 인도도 편 들지 않고 중립으로 일관한다. 사실 중국이 점거하고 있는 지역을 중립으로 표기했다는 거부터가 인도를 편드는거나 다름없는 거지만...[7] 우르두어 책 중에서 이 사람 책이 제일 많이 팔렸다. 원래 이슬람 모더니즘계에서 촉망받던 천재학자였으나, 파키스탄 군사 독재자들과 손을 잡고 우민화정책을 지지하는 등 완전히 흑화했으며 고리대금업을 교묘하게 샤리아에서 합법화시키는 방법으로 지지자들을 모아 말년에 뉴욕에서 편하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