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운

 

白南雲
1894년~1979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일제강점기 경제학자를 지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인이다. 본관은 수원(水原)[1], 호는 동암(東巖).

2. 생애


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반암마을#에서 백낙규(白樂奎)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으며 이후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비롯한 사회경제사 연구 저술로 유명했다. 마르크스유물론적 사관에 입각해 조선총독부 어용 학술 단체인 조선사 편수회에서 주창하는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여러 편 썼다. 1920년대 중국에서 고조되었던 자본주의 맹아론에 영향을 받아 한국사의 마르크스주의적 5단계 발전론을 설정하고 한국의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이론을 내세워 식민사관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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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이 쓴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일부 내용.
193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학자로 명성이 높아졌고 제자들을 중심으로 '경제 연구회'라는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 동아리를 이끌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38년 2월 '연희전문학교 적화 사건'#이라는 시국 사건을 조작하였고 백남운은 같은 학과 교수인 이순탁(李順鐸), 노동규(盧東奎) 등과 함께 체포되어 2년여간 투옥되었다.# 1940년 석방된 이후 김광진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 이외에는 은둔하며 지내다가 1941년 친일 전향자 단체인 야마토주쿠(大和塾)에서 열린 제1회 사상선도강습회에 참석하고# 이 단체에서 일제의 전시 통제 경제 체제를 지지하는 강연을 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는데 1948년 11월 민족정경연구소(民族政經硏究所)에서 편찬한 《친일파군상(親日派群像)》에서는 대화숙 일을 돕는다고 각기 유혹과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총력연맹 부·과장의 지위를 교묘히 단호히 배척하였던 인사로 이묘묵(李卯默), 최용달과 함께 백남운을 거론하였다.# 이로 보아 1940년 출옥 이후 친일로 전향한 것 자체는 사실이나 함께 거론된 이묘묵, 최용달과는 달리 친일인명사전이나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소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광복 이후 남조선신민당을 결성해 정계에 뛰어들기는 했는데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인 백남운은 정치인으로는 부적격이었고 끝내 입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공산당박헌영과 여러 번 심하게 부딪쳤는데 박헌영을 비롯한 '정통공산주의자'들은 백남운을 '사회개량주의자'라고 하면서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1946년 11월 남조선신민당이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과 합당해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했으나 합류하지 않은채 정계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이후 민족문화연구소를 꾸리고 문화 운동에 전념하다 1947년 4월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고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부위원장이 되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을 결행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초대 교육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마르크스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 등을 맡았으나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않고 지냈으며 말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을 지내다 1979년 사망했다.

3. 여담


  • 연희전문학교 재직 당시 친구였던[2] 정인보의 납북을 주도하였다는 카더라 통신이 현대 한국의 사회주의 사학자들 사이에서 언급된다. 환갑이 몇년 남지 않았던 정인보는 전쟁통에 감행한 월북의 여독으로 사망하여서 나중에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때 후회를 하였기 때문에 백남운은 정치적인 권한을 사적으로 쓰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숙청을 모면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 2011년 10월 자칭 그의 손자라 하는 사람이 탈북했다.

[1] 28세손 남(南) 항렬[2] 1936~1938년 사이에 연희전문학교에서 같이 재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