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회

 

1. 개요
2. 역사
3. 관련 항목


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불교에서 불도(佛道)를 닦기 위해서 설정한 일정한 구역, 또는 그곳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가리킨다. 도 계통의 종교이면서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원불교 또한 자신들의 행사를 가리켜 법회라고 한다.
불경 또는 불교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집회 행사로 승려와 신도가 한 곳에 모여 불사를 하는 모임을 말하며, 이때 법회가 열리는 장소를 뜻하는 용어인 '''도량(道場)'''으로 지칭되기도 한다.[1] 그밖에도 '''법사(法事)''', '''불사(佛事)''', '''재회(齋會)''', '''법요(法要)''', '''재(齋)''' 또는 '''불재(佛齋)'''이라고도 하며, 가장 널리 알려진 법회는 천도재, 사십구재(四十九齋)이다. 조금 더 간추려 말하면 '''불교적인 목적의 집회 및 불교 관련 제반사업 전반'''이 법회라고 할 수 있다.
법회 중에서도 밀교 의식이 결합되어 고도로 신비화된[2] 갖가지 불교 의식이 수반된 종교 의식을 '도량'이라고 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법회 즉 '도량'이 가장 성행했던 것은 고려 시대였는데, 조선의 억불 정책과 함께 조선 초기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살아남아 이어진 '도량'들의 명칭도 도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법회 또는 법석, 재(齋)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어 오늘날에는 법회 또는 불사(佛事)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화엄도량을 화엄회·화엄법회·화엄산림법회·화엄불사 등으로 사용한 것이 그 예이며, 도량의식법회의 수도 고려시대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물론 법회에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의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부처의 탄신과 성도(成道), 입멸(入滅)한 날을 기리거나 불교 경전 강의, 승려의 출가나 사찰 신축 및 중창을 기념해서 열리기도 했고[3] 법회를 여는 주최 측도 꼭 승려만이 아니라 세속의 권력자였기에[4] 승려뿐 아니라 법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선' 비슷하게 식사를 공양하거나 하는 등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승려들 간에 불교 이론 문제를 토론하는 세미나 기능도 법회가 담당했다. 또 한번 이런 법회가 열리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모인 사람(혹은 승려)들끼리 필요로 하는 물건이나 재료, 관련 정보를 교환하며 사교적 모임을 겸하는 일종의 '장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법회 등 불교적 목적으로 모인 자리에서 열리는 비정규적인 시장을 '승시(僧市)'라고 불렀는데, 승시는 조선 말기까지도 남아있었다고 한다.
법회에서 의식음악으로 쓰이던 음악을 범패(梵唄)라고 부른다.
모든 법회는 삼귀의로 시작해서 사홍서원으로 끝난다.

2. 역사


도량의 이름은 그 도량의 성격이나 목적을 따라 붙여졌고, 특정 불경을 강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법회 도량의 경우 도량에서 강의되는 불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이라고 불렀다. 신라는 진흥왕고구려에서 거칠부를 따라 망명해 온 승려 혜량팔관회와 백고좌회 법회를 처음 주관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이것이 기록상 가장 오래된 법회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진평왕 35년(613) 고승 100명을 초청하여 황룡사에서 백좌도량을 열었을 때 원광(圓光)이 가장 윗자리에 앉아 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인왕도량(仁王道場) · 미타도량(彌陀道場) · 관음도량(觀音道場) · 백좌도량(百座道場) 등 이름이 보인다. 신라 문무왕당나라에 억류된 김인문(金仁問)을 위하여 신라인들은 인용사(仁容寺)를 창건하여 석방을 기원하는 관음도량을 개설하였고, 김인문이 귀국하다가 바다에서 죽자 인용사를 미타도량으로 바꾸어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사천왕사 창건 역시 신인종의 개조이기도 한 명랑이 신유림에서 행한 문두루도량법회에서 시작했다.
성덕왕은 태종 무열왕을 위하여 봉덕사(奉德寺)[5]를 짓고 이레 동안 인왕도량을 베푸는 한편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으며, 신라 말기 시중 최제안(崔齊顔)이 남산의 천룡사(天龍寺)를 중수하고 석가만일도량(釋迦萬一道場)을 열어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도량은 고려의 밀교도량과는 달리 개인이 발원해서 개인이나 나라를 위한 순수한 기도의식, 법회 등의 성격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불교는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식과 행사가 많았다. 의식의 종류만도 83종에 이르렀는데, 『고려사』 세가(世家)에 나타난 기록에만 행사가 총 1083회 기록되었는데, '''실제 횟수의 일부'''일 뿐이다. 이들 의식은 크게 법회 · 설재(設齋) · 법석(法席) · 대회(大會) · 도량의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83종류 중 50종이 밀교적인 성격이 강한 도량의식으로 비중이 가장 크다. 이들 도량의 사상적인 공통점은 호국(護國)에 있었다.[6]
도량을 개설한 근본목적도 '반야'의 호국적 본질을 선양하려는 데 있었지만, 고려 시대는 그와 더불어 불교의 절대적인 힘을 믿고 행사 그 자체에만 의존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행사가 너무 잦아 형식적이 되었고 불교의 타락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시대의 50종 도량 중 비중이 있는 것은 25종에 이른다.
  • 축수도량(祝壽道場): 국왕의 생일을 맞아 만수무강을 비는 법회이다. 중앙의 관원은 물론, 지방의 관원들까지 상경하여 궁중에서 왕에게 하례한 뒤 수일 동안 특정한 사찰에서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었으며, 이때 왕은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반승(飯僧)을 행하였다.
  • 기신도량(忌辰道場): 매년 부왕과 모후의 기일(忌日)에 그 명복을 비는 법회로서 성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매년 기일을 맞아 3일 또는 5일 동안 사찰에서 불공(佛供)을 올리고 기일이 있는 달에는 도살을 금하였다. 기신도량 때 불공을 드리는 사찰로는 선왕이나 모후와 인연이 깊은 원찰(願刹)에서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 이는 국사(國師) · 왕사(王師)를 비롯한 고승 대덕들이 주재하는 가운데 보살계를 받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고려 왕실에서는 매년 6월 15일 궁중에서 개최하였는데, 국왕이 보살계를 받는다는 것은 국왕이 보살의 자격을 새로 얻거나 보살의 자격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도량의식은 국왕이 그 스스로 불제자임을 다짐하고 널리 선언하는 동시에 마음과 몸가짐을 바르게 가다듬을 것을 다짐하는 행사이다.
  • 장경도량(藏經道場): 1029년에 시작되어 1041년부터 정기적으로 거행된 행사이다. 봄 · 가을 두 차례씩 7일에서 10일 동안 개최되었으며, 그 의식의 절차에 따라 대장경을 공양하는 한편, 대장경에 포함된 경전의 앞과 끝부분을 대여섯 줄만 읽고 나머지는 그냥 눈으로 스치거나 경전의 중요한 대목을 골라 읽었다.
  •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신라 시대부터 성행하였던 호국도량으로서,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개설되었다. 궁중에 사자좌(獅子座) 100개를 갖추고 고승 100명을 초청하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외우며 읽는 의식을 행했다. 특히 거란의 침입 등 외침이 있을 때 많이 개설되었다. 이 도량에도 많은 승려들을 공양하는 반승 의식을 하였는데,공양받은 수가 많을 때는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경찬도량(慶讚道場): 사찰을 새로 낙성하거나 중수하였을 때, 또는 불상을 새로 만들어 모시거나 사경(寫經)을 마쳤을 때 이를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하여 행하였다. 1097년 2월 국청사(國淸寺)가 낙성되었을 때 축하를 위하여 개설한 경찬도량이 있었음은 무수한 고려의 경찬도량 중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 법화도량(法華道場): 『법화경』을 외우면서 참회하는 의식을 닦는 법회이다. 특히, 법화신앙이 백련사(白蓮社) · 연화원(蓮華院) · 보암사(寶巖社) 등을 중심으로 일어남에 따라 왕실 및 민중에서는 『법화경』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토론하며 참회하는 법화도량을 많이 개설하였다.
  • 소재도량(消災道場): 재앙 소멸을 위한 다라니경(陀羅尼經)을 외우면서 질병과 천재지변을 없애고 복을 비는 의식도량이다. 고려 때 열린 도량 가운데 그 횟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 이 도량이다. 1143년 6월 대관전(大觀殿)에서 5일 동안 연 소재도량은 왕비 임씨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고, 1179년 9월 광암사(光巖寺)에서 열린 소재도량은 천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 불정도량(佛頂道場):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을 외우면서 재액을 없애고 복을 비는 의식이다. 1122년 7월 회경전(會慶殿)에서 연 불정도량은 개경 주변의 산에 송충이가 들끓어 나무가 거의 죽어갔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 용왕도량(龍王道場): 『대운륜청우경(大雲輪淸雨經)』과 『용왕운우경 龍王雲雨經』 등을 외우면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가뭄이 계속되면 반드시 이 도량을 개설하였는데, 1121년 윤5월에는 왕사 덕연(德緣)을 궁중으로 초빙하여 비가 오기를 빌었다.
  •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 『금광명경』을 외우면서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호국도량의식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비가 오기를 빌고자 개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 『금강경』을 외우면서 수명장수와 기우(祈雨), 병을 고치거나 외적을 막기 위한 의미에서 많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1052년, 1087년, 1096년에 궁중에서 연 금강경도량은 다 같이 기우를 위한 것이었다.
  • 반야경도량(般若經道場): 『반야경』을 읽는 도량으로 1102년 6월 송충이를 막기 위해서 승려 2천 명이 개경 주변의 산을 돌면서 열었고, 1106년과 1109년, 1120년에도 전염병을 막고자 열었다.
  • 화엄도량(華嚴道場): 『화엄경』을 강독하고 외우면서 보현보살의 10대원을 마음에 되새기며 참회하는 한편,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재난을 없애기 위해서 행하는 법회이다. 대체로 5일 이상 행하는데, 흥국사(興國寺) 등 화엄종 사찰에서 많이 개설되었다.
  • 관정도량(灌頂道場): 『관정경』과 그 다라니를 외며, 재난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식이다. 국왕이 즉위할 때나 송충이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서 개설되었다.
  • 제석도량(帝釋道場): 국내의 변란이 있거나 외적의 침범이 있을 때 불교의 수호신이자 전투의 신인 제석천을 모시고 행하는 의식이다. 이 도량은 문종 때 가장 많이 열렸고, 고종 때도 두 차례 개설되었다.
  • 신중도량(神衆道場): 불교의 수호신인 신장(神將)들을 한 곳에 모시고 각종 재액을 없애고자 기원하는 의식이다. 특히, 고종 이후 그 명칭도 천병신중도량과 화엄신중도량 등으로 세분되면서 더욱 빈번히 열리게 되었다. 이유는 다들 아시는 몽골 침공.
  • 약사도량(藥師道場): 약사여래를 모시고 『약사경』을 읽으면서 각종 재액을 없애고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법회이다. 특히, 『약사경』에는 이 경을 받들어 모시고 정성껏 읽으면 국내의 병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여진족과의 교전이 전개되었던 예종 초 여러 차례 이 도량이 개설되었다.
  •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사천왕사에서 행해졌던, 문두루비법을 시행하는 도량이다. 이는 오방신(五方神)을 모시고 주문을 외우면서 각종 재액을 없애려고 기원하는 의식으로, 특히 외적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태를 가져온다고 하여 고려에 외침이 있을 때는 반드시 행하여졌다.
  • 인왕도량(仁王道場): 인왕백고좌도량과는 별도로 각종 재액을 없애고 만복을 빌며 도둑과 외적으로부터 항복을 받기 위하여 자주 개설되었다. 평화시에는 대체로 천재지변이 없기를 비는 의식으로, 전란이 일어나면 외침을 격퇴하여 줄 것을 비는 의식으로 개설되었다.
  • 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 『무능승대명왕다라니경』을 외우는 의식으로 고종 때 세 번 개설되었는데 모두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 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 이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넷인 마리지천신에게 재난이 없기를 기원하면 그 신이 재난을 없애어 만복을 준다고 하여 자주 개설되었다. 이 신은 승리의 신이요 군인의 수호신으로 되어 있으며, 다른 도량과는 달리 오직 묘통사(妙通寺)에서만 개설되었다.
  • 아타파구신도량(阿陀婆拘神道場): 얼굴이 넷이고 팔이 여덟인 아타파구신을 대상으로 하여 국토를 수호하고 백성을 옹호해 줄 것을 기원하는 법회이다.
  • 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 『공작명왕경』을 외우면서 모든 나쁜 병과 공포로부터 떠나게 하고 수명의 장수를 비는 의식이다. 1110년 문덕전에서 개최된 일이 있으며, 다른 도량에 비하여 그리 빈번히 열리지는 않았다.
  • 연생경도량(延生經道場): 연명보살의 공덕을 설하여 놓은 『연명지장경(延命地藏經)』을 외우면서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의식으로서, 1212년 1월 3일 동안 궁중에서 열린 바가 있다. 이 도량은 불교와 도교사상이 혼합된 도량의식이다.
법회가 열리는 날짜는 '재일(齋日)'이라고도, '잿날'이라고도 부른다. 현재도 사찰에서 나누어 주는 달력이나 각 사찰들의 홈페이지에 가 보면 따로 법회나 행사 항목을 두고 언제언제에 무슨 법회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음재일이라던가 지장재일이라던가. 매달 음력 초하루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법회도 있으고, 기독교에서 주일 예배를 하듯 매주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열기도 한다. 특히 은 불교에서 법회가 가장 많은 계절이다.

3. 관련 항목



[1] 이 도량은 꼭 사찰의 법당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승려와 신도가 불교적인 목적을 이유로 모였다면 그곳이 바로 '도량'이 된다. 승려의 출가의식이나 연등회 역시 법회로 정의할 수 있다.[2] 즉 질병을 낫게 하거나 가뭄 등 천재지변이 없도록 하고, 전생에 저지른 악업을 현세에서나마 씻고 수명을 연장하게 하며 도둑이나 외적을 굴복시키기 위한.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것 역시 기복신앙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3] 어떤 법회가 열렸음을 계기로 창건되는 사찰도 많았다.[4] 대부분 왕실이나 귀족, 아니면 그 지방에서 힘깨나 쓴다는 호족이 대부분이다.[5]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이 이 절에 봉안되어 있었다.[6] 흔히 한국불교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호국불교'에서 '호국'에는 외호(外護)와 내호(內護)가 있다. 내호는 번뇌를 소멸하는 반야(般若)의 지혜를, 외호는 외적의 침략이나 천재지변 등의 각종 재난을 제거하는 불보살과 신중(神衆)을 각기 본질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