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한글
묘법연화경
법화경
한자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문자
सद्धर्मपुण्डरीक सूत्र
음역
삿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라[1]
영어
Lotus Sūtra
티베트어
དམ་ཆོས་པད་མ་དཀར་པོའི་མདོ
음역
dam chos padma dkar po'i mdo[2]/Damchö Pema Karpo'i do[3]
1. 개요
2. 형성과 전래
3. 의의
3.1. 모두가 평등하고 부처가 될 수 있다.
3.2. 현세 긍정적인 보살 신앙에 관하여
3.3. 법신사상
4. 전래와 발전
5. 관련 전설
6. 관련 항목


1. 개요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부르는 말로 내용이 긴 불경들 중 하나이다.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삿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라(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인데, 이를 번역하면 '올바른 법(을 가르치는) 흰 연꽃(과 같은)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구마라집이 한자로 번역할 적에 바르다()를 오묘하다()라고 해석하여 묘법연화경이라 이름 붙였다.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한 사상으로 하고 있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 경전[소의 경전]으로서 화엄경과 함께 한반도 불교 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한반도에 유통된 불경 중에 가장 많이 간행된 불경인데, 정확히 언제부터 유통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 고승들의 주석서가 전해지므로 삼국시대부터 유통됐으리라고 추정된다.

2. 형성과 전래


대승불교 역사의 초기에 나온 경전으로, 대승불교에서는 높이 평가하는 교파가 많다.
법화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서지학적으로 기원전 1세기~기원후 40년 무렵에 원형이 나왔고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증보개정되었다고 추정한다. 일본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삼론현의>[4]와 진제삼장의 <부집이론소>에서 부파 불교대중부 불교에 반야경, 법화경 등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으므로, 기원이 오래되었고 대중부와 사상적으로 관련이 깊다.[5]
원문은 네팔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고 추측한다. 동아시아에는 오호십육국 시대에 쿠차 출신의 서역승 구마라집이 한자로 번역한 뒤로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관련된 경전으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하기 직전 설했다는 <무량의경>, 관음보살 신앙이 유행하면서 분리된 <관음경>(관세음보살보문품), 법화경의 결론이라는 <관보현보살행법경>이 있다. 국내에서 시중에 유통되는 법화경 대부분은 사제(사성제)와 십이인연(십이연기), 공 사상과 보살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설하는[6] 무량의경과 보살행에 대해 설하는 관보현보살행법경이 없고, 관음경 부분도 아미타불극락을 언급한 범본과 달리, 해당부분이 누락된 한역본을 그대로 번역해 실었다.[7]

3. 의의



3.1. 모두가 평등하고 부처가 될 수 있다.


석가는 기존 성문, 연각, 보살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에게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충격스럽게 선언한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십계의 생명에 대한 설명이 필요) 이에 반발하는 제자들이 스스로 자리를 뜨면서 석가는 설법을 시작한다. 특히 여성도 성불하여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급진적이었다. 또한 묘법연화경은 계급을 부정하고 사람들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초기경전의 심성본정/자성청정심설[8]에 기초한 것인데, 부파불교 중 대중부 불교에서 강조한 사상이다.

3.2. 현세 긍정적인 보살 신앙에 관하여


법화경에는 중생을 돌본다고 하는 관세음보살이나 미래의 부처라고 하는 미륵 등 수많은 보살과 부처가 찬조 출연한다. 보살, 제석천, 사대천왕은 부처들을 보호하는 분들이다.
법화경은 보살 신앙을 무척 강조하는 경전이 맞는다. 법화경의 몇몇 장은 아예 석가세존이 직접 보살의 공덕과 보살들의 공덕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살신앙 역시 대중부 불교와 관련이 있다.*

3.3. 법신사상


법화경에서 부처는 이미 오래전에 성불하였고, 인간으로서 태어난 석가모니 부처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중생구제를 위해 나타났을 뿐, 그 본체는 완성된 구원실성의 법신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 역시 대중부 불교에서 강조한 사상이다.*

4. 전래와 발전


당나라의 천태대사가 법화경을 본격으로 집대성하여 천태종이라는 종파가 생겼다. 그 후 이 천태종고려일본에 정착한다. 역시 대승불교 종파 중 가장 마지막으로 전래되었다.
당시 천태종의 메인이 관세음보살 신앙이었다.

5. 관련 전설


삼국유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7세기 초반 백제승려 혜현(惠現)은 승려가 된 이래 법화경 외우기를 과업을 삼아 기도하면서 복을 빌었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너무 많이 찾아오자 시끄럽다고 원래 있던 수덕사에서 달라산(達拏山)[9]으로 들어가 석굴에 숨어 살았다. 당나라 정관(貞觀: 627∼649) 초년에 58세로 죽자 사람들은 혜현이 살던 석굴에 시신을 안치했는데, 호랑이가 유해를 모조리 먹어 버리고 혀만 남겨 두었다. 그런데 이 혀가 추위와 더위가 3번을 지나가도(3년이 지나도) 썩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붉어지고 부드러워지더니 차츰 검붉어져 돌처럼 단단해졌다. 사람들은 혜현을 기려 그 혀를 석탑 속에 모셨다고 한다.
일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9세기 일본 헤이안 시대에 쓰인『일본국현보선악령이기』[10]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헤이안 시대, 구마노에 법명을 에이코(永興)라고 하는 선사가 있어 법화경을 낭송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계도했다. 8세기 말, 쇼토쿠 덴노 때 어떤 수행자가 에이코 선사를 찾아와 1년 넘게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수행하였다.
어느날 수행자는 에이코 선사에게 따로 수행하겠다고 하면서 입산했다. 에이코 선사가 수행자에게 시자(시중 드는 사람)를 딸려보내 사발과 밥을 챙겨주었으나, 수행자는 시자와 물건들을 하루 만에 돌려보냈다. 2년이 지나 구마노 산중 어느 절벽에서 수행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수행자는 발에 줄을 묶고 절벽으로 몸을 던져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죽었는데, 그때까지도 혀만은 멀쩡해서 법화경을 낭송하고 있었다고 한다.

6. 관련 항목



[1] 로마자 표기는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2] 와일리식 로마자 전사이다. 티베트어 한글표기안.[3] 표준 티베트어 THL 단순 음성 표기법(THL Simplified Phonetic Transcription)에 따른 표기이다.[4] 길장이 저술했다고 알려졌지만 반론도 있다.#[5] 참조서적: 이운허, <묘법연화경>, 동국역경원/시즈타니 마사오.스구료 신조 저, <대승불교> 2권 대승불교의 탄생/이자랑.이필원 저,<도표로 읽는 불교입문>, 민족사[6] 법화경 자체에도 '사제'라는 이름으로 사성제를 설명하고 12연기 등 근본교리를 분명히 언급한다. 다만 무량의경만큼 해당 부분들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설하자는 않는다.[7] 네팔본에 있는 3구 7수 남짓한 누락된 분량이 동아시아에서 보완된 때는 중화민국 시절이라(참조), 그 이전 한역본, 한역본을 중역한 역본에 의지하는 시중의 묘법연화경 대부분 판본들에는 다. 이 부분이 보완된 판본은 비움과 소통 출판사의 관음경 강기와 네팔본을 저본으로 한 불사리탑출판사의 한글 법화경과 민족사 법화경이 대표적이다.[8] 참조: 이지수 저, 인도 불교철학의 원전적 연구, 여래(57쪽)[9] 지금의 월출산으로 비정.[10] 『日本国現報善悪霊異記』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작성되어 전승된 가장 오래된 설화집인데 『日本霊異記』라고 약칭되는 때가 잦다. 저자는 헤이안 시대 薬師寺의 승려 景戒다. 상 · 중 · 하 세 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내용은 변칙스러운 한문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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