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Wojciech Witold Jaruzelski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1923년 7월 6일 ~ 2014년 5월 25일
1. 개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독재자이자 민주화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모순된 타이틀을 갖고 있다. 정적이었던 바웬사와 함께 격동의 폴란드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1]
2. 생애
1923년 루블린 근처 쿠루프(Kurów)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자 야루젤스키와 그의 가족은 리투아니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듬해 리투아니아마저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 강제합병당하자 그의 가족은 시베리아로 추방당했고 이 과정에서 야루젤스키는 소련 육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독소전쟁 과정에서 폴란드인 사단에 소속된 야루젤스키는 전투 과정에서 눈에 반사된 빛에 의해 시력에 이상이 생겨 이후 평생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여러 무공을 세운 야루젤스키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종전 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자 폴란드 공산당인 통일 노동자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폴란드군 내에서 계속 진급하여 1960년에는 수석 정치장교가 되고 1968년에는 국방 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1970년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를 사임시키는데 성공적으로 관여하여 1972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멤버가 되었다.
2.1. 자유 노조와의 악연
1980년 ~ 1981년에 걸쳐 레흐 바웬사의 주도로 설립된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가 폴란드 전역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폴란드 내에서 자유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와중이던 1981년 2월 11일 야루젤스키는 수상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 더불어 공산당 내 온건파였던 제 1 서기장 스타니스와프 카니아(Stanisław Kania)가 1981년 10월 18일 소련에 의해 돌연 해임되고 그 자리에 야루젤스키가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13일 야루젤스키는 전격적으로 폴란드 전역에 계엄령을 발령하고 구국 군사평의회를 설치, 자유노조 지도자과 가톨릭 신부 등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으며 1983년 10월에는 자유노조를 완전히 해산했다. 레흐 바웬사도 이때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로 인해 거의 2년 간에 걸친 폴란드의 자유화 바람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국민들의 증오를 받았으며 레흐 바웬사의 질긴 민주화 투쟁도 계속 이어졌다.
야루젤스키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당시의 계엄령 선포 및 자유 노조 탄압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소련이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1968년 프라하의 봄 때처럼 폴란드에 무력 개입할 의사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으며 개혁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할 시 야루젤스키는 그의 강력한 우군 중 하나이기도 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1981년 야루젤스키가 계엄령으로 자유노조를 탄압한 상황에서 새로 집권한 유리 안드로포프는 소련군이 폴란드 군사개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공개된 바 있다.
어쨌든 자유노조는 이후 10년 가까이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며 야루젤스키는 이 시기 당 서기장과 국가평의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2.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에 들어서면서 동유럽 전체에 자유화 분위기가 고조되고 그 첫 주자는 바로 야루젤스키가 지도자로 집권하고 있던 폴란드였다. 자유노조가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공산당과 자유노조 간 원탁회의가 열려 역사적인 자유 총선 실시[2] 가 합의되었다. 같은 해 6월 4일과 18일에 상하원 선거가 열렸고 상원에서 자유노조가 선거 대상인 100석 중 99석을 가져가는 초압승을 거두었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직에는 원탁회의 합의에 따라 야루젤스키가 7월 19일 대통령에 선출되어 민주화된 폴란드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통일노동당)의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려다 자유노조의 반발을 사 철회되고 자유노조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3. 퇴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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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병문안을 온 레흐 바웬사와 함께.
1991년 야루젤스키는 군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후 2001년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밝혔으며 스스로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념임을 인정했다.[3] 2006년 공산당 서기장 재임시절 벌어진 인권 탄압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나 지병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며 2014년 5월 25일 타계했다. 그는 바르샤바 근처에 있는 군인 묘지에 묻혔으며 그의 재임시절 탄압을 받은 바웬사와 다른 자유노조 지도자들은[4]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라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