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흐 바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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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어: Lech Wałęsa[1]
폴란드의 전직 대통령이자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연대노조)를 창립한 노동 운동가, 그리고 폴란드 제3공화국의 국부.
2. 생애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2] -레닌 조선소에서 조선공으로 일하던 중, 1980년 폴란드 정부가 공장의 노동자들을 단체로 해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웬사는 이에 저항하면서 실질적 노동자 대표로 그단스크-소포트-그디니아 지역의 노동자 총 파업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 공산주의 체제가 허용하지 않는 자율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 노조는 폴란드 연대노조('''솔리다르노시치''')[3] 라고 불리고 바웬사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연대노조가 워낙에 강력하여 정부조차 협상 대표로 바웬사를 인정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56년에 포즈난 항쟁으로 정권을 한번 갈아엎은 경험이 한번 있었고,[4] 1970년에 또 한번 뒤엎은 경험이 있었던 데다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도 상당했기에 자유노조를 때려잡았다가는 정권이 다시 갈아엎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례가 이미 존재했으니 때려잡기가 힘들었던 셈인데, 이 때문에 당시 폴란드 정부에서 악명을 떨쳐가면서까지 차마 자유노조를 갈아엎지 못하고 체제내에 편입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 동유럽 국가에 줄 혼란을 막기 위해 소련의 압력을 받은 폴란드 군부는 1981년 12월 13일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 지도부를 내쫓고 바웬사 등 노동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이 때 서기장이 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자유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했는데, 나중에 그가 회고한 바로는, 자유노조의 세력이 강해지면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소련군이 직접 나서겠다는 소련의 협박을 받고, 소련군이 폴란드를 장악하느니 폴란드인 스스로 문제를 정리하자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5] 그 후 바웬사는 1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연대노조를 지원하는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공산권 간에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교황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토로했다.
가택연금 직후 프랑스 파리로 자신의 자서전을 몰래 보내 <희망의 길 Un Chemin d'Espoir>를 발매했으며 이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련 등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들의 문제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폴란드의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던 그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에 기여했다.
이후 공산당과 자유노조의 원탁회의를 거쳐 헌법을 수정해 일부 의석에 대해 자유총선이 실시되고 대통령직을 신설해 초대 대통령으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간선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야루젤스키는 공산당(통일노동당)의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려다 자유노조의 반발을 사 철회되고 자유노조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6년까지 폴란드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당시 정책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의 경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 지역 탈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 초기임을 감안해야할 필요가 있다. 구 유고, 소련의 구성국이나 혁명을 겪은 루마니아는 물론 탈사회주의과정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폴란드를 비롯한 중부유럽 국가들도 체제전환 초기인 90년대 초에는 모두 경기침체를 겪었다. 폴란드의 90년대 경제문제는 탈사회주의 국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바웬사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의 책임까지 바웬사에게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와는 별개로 바웬사는 결국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공산당 계승정당 후보에게 패배했으며, 퇴임 후에도 폴란드에서 그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 아니다.[6] 퇴임하면서 모든 퇴임 대통령의 권리를 포기한 탓에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라 토크쇼 MC 등을 본다고 한다. 그래도 그 동안 폴란드 경제에 짐이 된 외채를 탕감시킨 것 자체는 높이 평가받는다.
물론 대통령 재임시의 정책과는 별개로 그가 폴란드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한 것은 많은 폴란드인이 인정하고 있다. 혁명과 국정운영은 전혀 별개의 직책이라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7] 끝까지 박수받으며 떠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독재자로 타락하지 않고 깔끔하게 은퇴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3. 선거 이력
4. 여담
- 민주주의 운동을 한 것과 이미지가 매치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군 생활이 굉장히 잘 맞았다고 한다. 한때는 군에 말뚝 박아서 장교로 임관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고.
- 2차대전이 발발하고 폴란드를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분할 점령하자 당시 폴란드 정부는 런던으로 망명해서 계속 싸웠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이들은 귀국을 거부하고 계속 런던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 바웬사가 당선되자 이후 51년 간 간직해온 2공화국 대통령기와 휘장, 국새, 35년 헌법 원문 등 임시정부의 법통 일체를 넘겨준다. '후임'으로서 바웬사는 폴란드 3공화국을 열게 된다.#
-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데, 2006년 경에 면도날 제조 회사인 질레트가 면도를 하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난 태어날 때부터 이 콧수염을 달고 태어났다"라며 거절했다. 그런데 또 몇 년 뒤에는 놀랍게도 깔끔하게 면도를 했는데, 이 때 언론에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 "그냥 재미로"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 콧수염 때문인지 묘하게 스탈린을 닮았다. 독설가로 유명한 오리아나 팔라치도 바웬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했다.
- 198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를 당시 폴란드를 떠날 수 없던 그 대신에 아내 다누타가 대신 받았다.
- 한국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발언을 했다.#
- 2016년 11월 한국 서강대학교, 계명대학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 1980년 솔리다르노시치의 그단스크 조선소 파업을 다룬 영화 철의 사나이에서 본인 역으로 등장했다.
- 아내 다누타와의 사이에서 아이들 8명(4남 4녀)을 두었는데 셋째가 2017년에 사망했다. 넷째 야로스와프는 정치가이다.
- 폴란드 민주화의 영웅이지만 그 자신은 독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실제로도 레흐 카친스키를 비롯한 바웬사의 동료들 중 상당수가 법과 정의당에서 활동하며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하고 있다. 바웬사는 2공화국 시절의 독재자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롤모델로 삼았고, "개혁지지 무당파 의원단"이라는 명목상 정당은 아니지만 사실상 정당인 어용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피우수트스키의 "정부협조 무당파 의원단"과 역할이 동일했을 뿐 아니라 약자까지 BBWR로 똑같아서, 그 야심이 상당히 노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웬사는 1993년 총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아래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자 깔끔하게 물러남으로써 폴란드 민주화에 공헌했다.
> “만약 독재를 도입해야 하고 민중들이 내게 그 역할을 맡도록 강요하는 때가 온다면, 나는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 "When the time comes to introduce a dictatorship, the people will force me to accept this role, and I shall not refuse"
> "When the time comes to introduce a dictatorship, the people will force me to accept this role, and I shall not refuse"
- 2019년에 30년 동안 포퓰리즘이 만연했고, 민주주의를 과신했다고 발언했다.#
[1] 레흐 바웽사 정도로 읽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바웬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독일 이름인 단치히(Danzig)로도 알려진 도시 맞다.[3] 한국에서는 보통 '연대노조'라고 하는데 연대노조의 정식명칭은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Niezależny Samorządny Związek Zawodowy "Solidarność", NSZZ "Solidarność")'''다.[4] 포즈난 항쟁 자체는 진압되었지만 이후에 집권당내에서 파벌이 교체되었다.[5] 야루젤스키 자신은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강제노동을 했고 이 때문에 시력에 치명타를 입은 전적이 있다.[6] 사실 이런 현상은 폴란드에서 이전에 두번의 선례가 있었다. 고무우카는 1956년 포즈난 항쟁으로 스탈린주의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인물이었지만 집권 후반에 무능한 독재자로 전락하면서 인민들의 지지가 추락한 끝에 1970년 민중붕기로 물러났고, 고무우카를 축출하면서 집권한 기에레크는 초기에 경기호황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오일쇼크와 외채문제가 터지면서 역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7] 김영삼이 3당 합당과 IMF 외환위기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바웬사와 제법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8] 무려 폴란드 역사상 최초로 열린 직선제 대통령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