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폴란드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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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제2공화국을 멸망시키고 폴란드 지역을 반으로 나눠 통치했던 때이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있었던 3차례의 폴란드 분할과 바르샤바 공국의 분할의 뒤를 이은 '5차 폴란드 분할'이라고도 한다.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양국은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을 자국의 세력권에 맞게 분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불법적으로 폴란드를 기습 침공하였고 이로써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9월 27일~9월 29일에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 전쟁개시 한달만인 10월 6일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거, 독소 양국은 폴란드를 반으로 분할하였다. 소련은 자신의 구성국인 우크라이나 SSR 및 벨라루스 SSR에 점령된 폴란드를 합병하였고 나치 독일은 일부는 독일의 본토에 합병시키고,나머지는 총독부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그 밖에 슬로바키아와 분쟁지역이던 국경지대 일부는 당시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에, 빌뉴스와 그 주변 일대는 소련의 괴뢰국이던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단 슬로바키아에 할양된 영토는 종전 후 원상복귀되었다.
2. 상세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과 소련의 통치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폴란드인에게 갖은 제약을 걸어 체계적으로 폴란드인들의 민족성을 말살하는 것이었다(당시 폴란드는 독소 양국과 불화를 겪었다).
2.1. 나치 독일의 폴란드 통치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 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지역은 다시 폴란드 서부와 총독부 관할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이 중 폴란드 서부는 나치 독일에 편입되었다.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폴란드 지역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거나 2등 국민으로 취급했다. 폴란드인들은 공공장소를 이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폴란드인들이 이용하던 거의 모든 교육 기관들이 폐쇄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학 역시 폐쇄되었으며, 대학 교수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외 정치, 문화, 과학, 예술 등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조직들이 해체되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기초 노동에 필요한 초등 교육 정도만이 허가되었다.
점령 초기 3달 동안 6만 1천여 명[2] 에 이르는 폴란드 정치인, 군 장교, 경제인, 성직자, 지식인들이 처형되었다. 그 중 1천여 명은 전쟁 포로였다. 독일 국방군, 친위대, 비밀경찰, 자위단(Selbstschutz) 모두 폴란드인들에 대한 학살에 가담했다. 포모제(Pomorze) 지방에서만 2만 3천여 명이 학살되었다. 그 이후에도 AB조치(AB-Aktion)가 행해져 1940년 봄부터 여름까지 3만여 명의 폴란드인들이 체포되어 그 중 7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7월에는 르부프(Lwów)의 대학 교수 25명과 그의 가족들도 학살되었으며, 그 중에는 전(前) 폴란드 총리 카지미에쉬 바르텔(Kazimierz Bartel)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9년 1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바르샤바 인근의 팔미리(Palmiry) 숲에서는 1,700여 명의 폴란드 지식인들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학살의 목적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종전시까지 폴란드의 의사의 45%, 판사와 변호사의 57%, 교사의 15%, 대학 교수의 40%, 고급 기술자의 50%, 초급 및 중급 기술자의 30%, 성직자의 18%가 학살당했다. 가톨릭 성직자들도 3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독일이 자국 본토로 편입시킨 폴란드령에서는 폴란드인들에 대한 혹독한 동화정책과 강제이주가 행해졌다. 대략 250만에 이르는 폴란드인들이 총독부령으로 추방되었으며, 그 자리를 130만 명의 본토 독일인들이 차지했다. 남은 폴란드인들은 학살당하거나 독일의 강제 동화정책에 희생되었다. 한편 총독부령은 5개 구역(바르샤바, 크라쿠프, 라돔, 루블린, 갈리치아)으로 나뉘었다. 폴란드인 탄압정책 중 가장 괴상한 것으로는 정책적으로 폴란드 어린이들을 납치한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납치된 아이들의 숫자가 20만에 이르렀다. 자모시치(Zamość) 지역에서만 3만여 명이 납치되어 이 중 4,445명이 독일화를 목적으로 독일 본토에 이송되었다. 독일 당국에 납치된 어린이 중 수만여 명이 강제노동에 혹사당해 사망했다. 그 중 다시 폴란드로 돌아온 이들은 15~20%에 불과했다.
폴란드인들은 나치 독일에게 있어 2등 국민이었으므로, 폴란드인들은 모든 편의를 독일인에게 먼저 양보해야했다.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이 경영하던 모든 사업체가 독일인들에게 접수되었다. 정류장과 버스, 기차에서도 폴란드인들은 맨 뒤쪽 칸을 이용해야만 했고, 필요시에는 독일인에게 양보해야 했다(그나마 폴란드인들은 나은 경우였고, 유대계는 이런 것들을 아예 사용할 수 없었다). 성인은 제복을 입은 독일인에게 경례를 해야 했고, 상점주인들은 독일 손님들을 먼저 응대해야만 했다. 식량이 배급될 때도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보다 적은 양을 배급받았다. 독일인들은 1일 배급량이 2,310칼로리에 달했지만, 폴란드인들은 654칼로리에 불과했다. 총독부 내에서 폴란드계보다 식량을 적게 배급받은 민족은 유대계뿐이었으며, 이들은 독일인들의 1/10에도 못 미치는 184칼로리를 배급받았다.[3][4] 심지어 가죽 가방마저 사용을 제한받았으며, 프레데리크 쇼팽의 음악을 연주하면 처형당했다.
또한 나치 독일의 관할인 (폴란드)[5] 총독부에서는 점령 내내 폴란드인들을 강제로 독일에 이주시켰는데, 이는 독일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하기 위함이었다. 약 15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독일 영내로 끌려가, 대개는 나치 독일의 열악한 대우와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죽어나갔으며, 이렇게 빈 자리가 생기면 또 다른 폴란드인들이 들어왔다. 이렇게 수천명의 폴란드인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 지역 외에 폴란드 본토에서도 폴란드인들 가운데에서 강제 노동을 위한 인원이 계속 선발되었고, 독일 지역과 비슷한 이유로 또 많은 폴란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이 의약품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정신질환자들은 특히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6] 독일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600만 명의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이 사망했는데, 특히 유대계 폴란드인들은 335만에 이르던 전전 인구 중 90% 가까이 학살당했으며, 이 때문에 폴란드는 2차 대전 기간 동안 유대인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국가였다. 그리고 600만이란 수치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이는 폴란드계와 유대계 시민들만을 포함한 수치로 다른 소수민족(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등)의 희생자들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이런 가혹한 통치로 인해 폴란드의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지하 레지스탕스 활동이 벌어졌으며, 이 저항운동은 2차 대전 당시 반나치 레지스탕스 중 가장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폴란드 저항군 중 공산주의 계열을 제외한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지지했다.
2.2. 소련의 폴란드 통치
소련 역시 나치 독일과 비슷하게 폴란드의 모든 조직들을 차례차례 해체하였다. 이후 몇몇 교육 기관들은 소련의 정책에 맞게 재설계되어 다시 운영되었다. 점령 초기 소련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폴란드의 장교와 지식인 계층을 경계했는데,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카틴 학살이 일어났다.
폴란드의 지식인 계층을 탄압하는 정책은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며 당연히 소비에트 연방에 반대하는 민간인들도 내무인민위원회에 잡혀갔다. 폴란드의 지식인들의 대다수를 제거한 소련 정부는 폴란드에서 영업하는 자연인과 법인의 동산과 부동산을 국유화한 뒤 농장은 모두 집단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폴란드 공화국의 제2공화국 시절의 화폐로 쓰였던 금즈워티(1939년 이전의 폴란드은행권)를 그냥 0으로 없애버리고 소비에트 연방에서 화폐로 쓰였던 금루블(1947년 이전의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권)로 대체하였다.
당시 폴란드에는 폴란드인 외에도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 같은 소수민족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초기에는 소련의 통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에 대한 가혹한 통치가 자신들에게도 적용되자 이내 소련에 통치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소련에 반대하는 재(在)폴란드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들도 소련의 탄압을 받았다.
얼마 후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은 소련에 충성하는 폴란드인 및 폴란드계 소련인을 모아 폴란드 동부군을 만들었고,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무렵에는 루블린에 공산당 임시정부를 따로 만든 뒤 이들을 기간으로 삼아 독일 패망 후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세운다. 같은 폴란드 저항군이었지만 소련에 반대하는 폴란드 국내군은 소련과 폴란드 공산정부에게 박해받았다.
스탈린 치하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라기에는 기형적으로 대러시아주의 성향이 강하였다. 또한 소련이 점령한 이 지역은[7]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영토로 공인되었다 소파전쟁으로 폴란드로 합병되었던 땅이었고 스탈린 본인이 소파전쟁 참여 당시 폴란드에 생긴 개인적인 원한도 존재하였기에 이 지역에 살던 폴란드인들은 자치나 SSR이 설립되지 않았고 소련인으로 동화되거나 2차대전 종전 후 폴란드로 추방당하게 된다.
3. 결과
반공 다문화 국가였던 폴란드를 공산 단일민족 국가로 만든 사건.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폴란드는 현재 폴란드와는 상당히 달랐다. 추축국과 맞먹을 정도의 반공 국가인데다, 국민의 구성도 슬라브계-유대계-독일계가 뒤섞인 다문화 상태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과 소련군이 들어오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치 점령 당국이 유대계 폴란드인들을 말살하고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독일계 폴란드인들이 순삭되자, 슬라브계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물론 슬라브계도 나치와 소련에게 학살되었지만 유대계와 게르만계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으며, 이들이 살아남아 현대 폴란드인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정치 이념도 반공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뀌어, 결국 폴란드는 동유럽 혁명으로 의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할 때까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1] 당시 소련은 우크라이나 SSR과 벨로루시 SSR에 폴란드를 분할 합병했다.[2] 이는 독일 측이 기록한 것으로, 실제 수치는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본다.[3]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밀수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고 한다.[4] 이에 대해 가슴아픈 일화가 하나 있다. 게토의 담장에 파인 개구멍으로 유대계 소년들이 몰래 식량을 반입하다가 독일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 독일 경찰은 지나가던 폴란드인을 붙잡아 이 유대인을 다리로 떨어뜨리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폴란드인은 명령을 따랐고, 후에 자살했다.[5] 나치가 폴란드 민족말살정책을 위해 지은 정식명칭은 폴란드를 빼고 그냥 총독부(Generalgouvernement게네랄고우퍼네멘트)로 지었다.[6] 나치는 T-4 프로그램으로 자국의 정신질환자들도 학살했다.[7] 동갈리치아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