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명왕
1. 개요
불교의 신앙 대상. 산스크리트명의 아짤라나타(Acalanātha)의 한역으로, 발음에 따라서 아차라낭타(阿遮羅囊他)라고 기록하는 경우도 있는데, 부동금강명왕, 부동존, 무동존, 부동사자, 무동사자라고 번역한다. 원래는 힌두교 시바 신의 이명이지만 밀교에서는 대일여래의 사자 혹은 분신으로 받아들였다. 무동명왕(無動明王), 부동존(不動尊)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부동(움직임이 없음)이란 말은 깨달음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굳건히 유지된다는 뜻이다.
2. 일본 진언종
일본에서는 대중적으로 숭배하며, 부동(후도우)이란 말이 붙은 지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도쿄도의 '메구로 후도우(目黑不動)'. 오대존명왕 중 중심이고 제일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불교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뭔가 생긴게 겁나게 간지나고 졸 세 보이잖아? 기도하면 뭔가 액이 사라질 거야.' 생각하여 너도나도 부동존을 모셨다. 그 결과, 원래 가장 높게 모시던 명왕이 오대존명왕 중 가장 대중적인 신앙대상이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진언과 수인이 일반인들에게도 아주 널리 알려졌다. 그 때문에 현대에도 일본 애니 등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수인과 진언이 부동명왕의 것이다.
진언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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नमः समन्त वज्राणां चण्ड महारोषण स्फोटय हूं त्रट हां मां
namaḥ samanta vajrānāṃ caṇḍa mahāroṣaṇa sphoṭaya hūṃ traṭ hāṃ māṃ
나마 싸만따 와즈라남 짠다 마하로쉬아나 쓰포따야 훔 뜨랏 함 맘[1]
일본에서는 이 진언을 '나우마쿠 산만다 바사라단 센다 마카로샤타 소와타야 운 다라타 함 맘'으로 음역했다.
3. 기타 국가
한반도 역사상 불교가 가장 성했던 고려시대에 밀교 의례가 퍼짐에 따라 부동명왕을 포함하여 명왕 신앙이 어느 정도 있던 듯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거의 잊혔다.
국보 제210호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紺紙銀泥不空羂索紳變眞言經 )은 1275년에 고려 충렬왕이 발원하여 짙은 남색 종이에 은가루로 사경한 최고급 불경 유물인데, 13권의 권두에 부동명왕 그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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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10호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권두에 그려진 부동명왕 그림
2012년에 서울특별시기념물 제28호 도봉서원[2] 에서 고려시대 금강령[3] 이 발굴되었는데, 제작 수준이 높거니와 보기 드물게 오대존명왕도 금강령에 새겨져 있어 주목받았다.[4]# 이런 유물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부동명왕 등 오대존명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조형으로도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유달산(儒達山) 정상 부근 바위에는 일제시대, 정확히는 1931년에 일본인들이 만든 부동명왕, 고보(弘法) 대사[5] 마애상이 있다. 여기 있는 부동명왕과 고보 대사 마애상은 일본 시코쿠[6] 에 있는 유명한 88 사찰 순례를 대신하고자 만든 것이다. 시코쿠 88 사찰 순례는 일본어로 오헨로(お遍路)라고 불리는데, 일본에서는 대중적인 불교 신심 행위로 유명하다.[7] 그러나 사람이 직접 시코쿠까지 가서 걸어다니며 88개 사찰을 순례하기란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오헨로를 단순화하여 (일본어로 오스나후미お砂踏み라고 하는) 대리 순례를 만들었다. 특정 공간 안에 오헨로 88 사찰에서 떠온 흙과, 각 사찰에서 본존으로 모시는 불보살의 상 88좌를 순서에 맞게 배열하고, 마지막으로 고보 대사의 상을 안치하여 고야산 참배까지 대신한다.
유달산에 있는 부동명왕과 고보 대사 마애상도 오스나후미의 일환으로 만든 것이다. 목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직접 일본 시코쿠까지 가지 않아도 침배할 수 있도록, 유달산 등산로를 따라 오헨로의 각 사찰에서 떠온 흙과 불상 88좌를 안치하여, 유달산을 오르면서 88좌 불상을 참배하고 정상에서 고보대사상을 참배하도록 하였다. 고보 대사상 옆에 부동명왕상을 새긴 이유는, 고보 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던 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부동명왕이 도와주었다는 전설 때문이다. 광복 이후로 일본인들이 유달산에 만든 불상을 파괴하거나 다른 곳으로 치웠기 때문에 바위에 새긴 고보 대사와 부동명왕의 마애상만 남았다.[8] 유달산 마애상처럼 국내에 있는 부동명왕 조형물은 일제시대 유물인 경우가 꽤 있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부동명왕 자체를 왜색 취급한다.'''
밀교가 가장 온전히 남은 티베트의 경우 그냥 경전에서만 언급될 뿐 실제 신앙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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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명왕의 인기가 이처럼 일본에서 유독 높았기에 일본에는 조각이나 그림으로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는 참으로 형상이 무시무시한 것들도 있다. 보통 업화와 같은 불길이 온 몸을 두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가루라염' 이라고 가루다가 뿜는 불꽃이라고 한단다.왼쪽 입술이 윗 입술을 물고 오른쪽은 무섭게 찡그리며, 오른 눈은 위를, 왼 눈은 아래를 노려보고 있다.... 진짜 불은 아니고 모든 부정을 태워 없앤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검의 이름은 구리가라검(俱利伽羅劍)이다. 그냥 닥치고 파괴신 기믹이다.
4. 기타 사항
일본 불교에서는 부동명왕을 닭띠생 사람들의 수호자로 받들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일본의 만화가인 나가이 고가 닭띠인데, 만화 데빌맨을 집필하면서 주인공이 악마인 작품을 그리려니 아무래도 꺼림직해서 액을 예방하려는 의미로 주인공의 이름을 부동 명(不動 明) 즉 "후도 아키라"라고 지었다고 한다.
오덕계, 특히 슈로대 팬들은 공격을 하는데 몸은 안 움직이는 연출을 보이는 기체를 보고 부동명왕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갓마즈나 제 3차 슈로대 Z의 건담 헤비암즈 개(EW)
이나즈마 일레븐에 등장하는 후도 아키오는 이름을 그대로 부동명왕(不動 明王) 따왔으며, 더빙판의 로컬명도 '왕'자만 뺀 '''부동명'''.
용과 같이 시리즈의 등장인물이자 야쿠자 조직 동성회의 6대 회장인 도지마 다이고의 등 문신에 부동명왕이 있고 제로에서는 부동명왕의 벨트라는 아이템이 나온다.
[1] 한국불교학회 산스크리트어 표기법에 따라 음역함[2] 1573년, 조광조를 기리고자 세웠으나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헐린 서원. 지금 있는 서원 건물은 1972년에 재건한 것이다.[3] 손잡이를 금강저 모양으로 만든 작은 종. 금강저 항목 참조[4] 이런 불교 유물이 하필 서원 자리에서 발굴된 까닭은 도봉서원 터가 원래 영국사(寧國寺)라는 절이 있던 자리기 때문이다. 극렬 성리학자 조광조를 모신 서원 자리가 절 터였다는 점이 얄궂은 일이다.[5] 774~835. 헤이안 시대 고승이며 일본 진언종의 개조인 구카이(空海)대사를 가리킨다. 일본 밀교의 시조이며, 일본인들에겐 사후에 조정이 내린 시호인 고보(弘法) 대사로 더 유명하다. 서예에 능하여 일본에는 "고보 대사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 "고보 대사도 붓을 잘못 놀릴 때가 있다." 하는 속담마저 있다. 고보 대사가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초 대사에게 보낸 편지는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모두 높아 일본 국보로 지정받았다.[6] 고보 대사가 시코쿠 가가와현 출신이기 때문이다.[7] 시코구 전역에 있는, 고보 대사가 창건했거나 중창했다고 전하는 사찰 88 곳을 순서에 따라 참배한 뒤, 마지막으로 고보 대사가 창종한 진언종의 본산 고야산을 참배하여 마무리 짓는다. 진언종에서는 고보 대사가 고야산에서 선정에 들었을 뿐 아직도 살아있다고 말하므로, 오헨로는 고보 대사의 흔적을 좇아 88 사찰을 돌아다닌 뒤 마지막으로 고보 대사 본인을 찾아가 인사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된다.[8] 사실 이 마애상도 광복 이후 파괴하려고 했는데, 일꾼이 부수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가 "이걸 부수면 화를 입을 것 같다."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도 더 손을 대지 않고 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