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브라이언트
* 야구 관련 인물(NPB) 야구 관련 인물(MLB)
1. 프로필
미국 조지아 주 출신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 선수로 뛰면서 타격 지표가 홈런과 삼진으로 양분되는, 말 그대로 '''모 아니면 도''' 스타일의 슬러거로 이름을 날렸다.
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에이브러햄 볼드윈 농대 재학 중엔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고 포지션은 와이드 리시버였다. 이후 야구로 전향한 브라이언트는 1980년 MLB 드래프트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지명을 거부했고, 1981년엔 미네소타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마찬가지로 거부 했지만 지난 해에 이어 2차로 자신을 지명한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한동안 마이너 리그를 전전하던 브라이언트는 198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승격되었지만, 1987년 까지 약 3시즌 동안 79경기 출장에 '''38안타, 8홈런, 24타점, 타율 0.253'''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3. 일본프로야구 시절
3.1.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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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1988년 5월, 소속팀인 다저스와 우호 관계이던 주니치 드래곤즈로 적을 옮겼는데, 당시 퍼시픽 리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와 선두 다툼을 벌이던 킨테츠 버팔로즈의 외국인 주포 '''리처드 데이비스'''가 그 해 6월 7일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되면서 구단에서 퇴출당하는 바람에[1] 킨테츠는 부랴부랴 중심 타선을 맡아줄 새로운 외국인 타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2군에서 삼진은 많지만 한번 쳤다 하면 어마어마한 타구를 날려대는 주니치 소속의 브라이언트가 눈에 들어왔고,[2] 주니치 측에 브라이언트의 양도를 요청하여 협상 끝에 6월 28일 현금 트레이드로 브라이언트를 영입했다.[3]
일본에 입성한 지 불과 한달여 만에 킨테츠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브라이언트는 퍼시픽 리그 1군 무대에서 그 해 1경기 3홈런을 두 번[4] 기록하는 등 가공할 만한 홈런 레이스를 선보이며 한 때 1위 세이부 라이온즈와 8경기 차이까지 벌어졌던 킨테츠가 경이적인 페이스로 추격하는 동력을 마련했다. 킨테츠는 시즌 최종전인 10월 19일, 롯데와의 전설적인 더블헤더 대격전 끝에 아쉽게 리그 우승을 놓쳤지만 브라이언트는 그 날 더블헤더 2차전 8회초에 솔로 홈런을 날리는 활약을 보였다.
일본 데뷔 첫 해 74경기 출장에 267타석에 그치며 규정타석 진입에 실패했지만, 브라이언트는 무려 '''34홈런'''[5] 을 쏘아올리며 순식간에 킨테츠의 중심 타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브라이언트는 유독 '''2점 홈런'''이 많아서 '''미스터 투런'''이란 별명으로 통하기도 했다.
3.2.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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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개막 초반부터 브라이언트는 홈런을 양산해 냈지만 5월 20일~6월 21일에 걸쳐 퍼시픽 리그 기록인 '''22경기 연속 삼진'''[6] 이란 수모를 당하고, 6월 한달 동안 타율 0.191에 홈런은 2개에 불과한 엄청난 슬럼프에 빠졌다. 팀의 주포가 죽을 쑤는 통에 긴테츠 또한 6월 말 시점에서 리그 선두 오릭스 브레이브스와 8.5게임 차까지 벌어지는 부진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7월 1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 8회말에 브라이언트는 14경기 58타석 만에 백 스크린을 직격하는 역전 2점 홈런을 쏘아올리며 팀을 6연패의 늪에서 끌어내면서 부활의 서곡을 울렸다. 7월에만 11홈런으로 페이스를 되찾은 브라이언트는 8월 17일에 시즌 세 번째 1경기 3홈런을 쳐내며 일본 기록[7] 을 세우는 등 퍼시픽 리그의 선두권 싸움에서 긴테츠가 밀리지 않도록 힘을 보탰다.
1위 자리를 놓고 세이부, 오릭스와 막판까지 서로 물고 물리는[8] 난타전을 벌이던 킨테츠는 승부의 최대 분기점이던 10월 12일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에서 열린 세이부 라이온즈 와의 더블헤더 2경기를 6대 5, 14대 4로 전부 쓸어담으며 리그 우승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 날 브라이언트는 0대 4로 뒤지던 더블헤더 1차전 4회초에 궈타이위엔 에게 1점 홈런을 뽑았고, 6회초에는 같은 궈타이위엔을 상대로 동점 만루홈런을 친 것에 이어 8회초엔 브라이언트를 막기 위해 구원 등판한 와타나베 히사노부[9] 로 부터 결승 솔로포를 쏘아올리는, 혼자 3홈런[10] 6타점으로 말 그대로 '''북치고 장구치고 나발까지 불어제끼는''' 원맨쇼를 선보이며 대 역전극의 선봉장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2차전 3회초에도 2대 2의 균형을 깨는 1점 홈런을 터뜨려 4연타수 홈런[11] 을 기록하는 등 거칠 것 없는 활약을 펼쳤다. 다음 날 한 스포츠 일간지는 1면에 '''하느님 부처님 브라이언트님''' 이라 게재할 정도로 브라이언트의 전날 종횡무진 활약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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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후 브라이언트를 헹가래 쳐주는 킨테츠 선수들.
결국 킨테츠는 10월 14일, 시즌 최종전 바로 직전 시합(129번째 시합)이었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승리하며 9년 만에 퍼시픽 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킨테츠 선수들은 오기 아키라 감독 다음으로 브라이언트를 헹가래치며 그의 불꽃같은 대활약에 감사를 표했다.
킨테츠는 그 해 일본시리즈 에서 후지타 모토시가 이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3연승을 하고도 내리 4연패를 당해''' 역관광 당하는 비운을 맛보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타율 0.283, 49홈런(1위), 121타점, OPS 1.004'''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한 브라이언트는 이해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 해를 구가했다. 덤으로 당시 최고 기록이었던 한 시즌 158삼진(1977년 닛폰햄의 용병타자 바비 미첼이 기록) 훌쩍 뛰어넘는 한 시즌 187삼진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3.3. 1990~1995년
이후로도 킨테츠의 주포로 활약한 브라이언트는 1990년 6월 6일 대 닛폰햄 파이터즈 전에서 도쿄 돔 천장의 스피커를 맞히는 타구를 날렸고 특별 규칙에 따라 홈런으로 인정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당시 홈런의 비거리는 약 160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해 7월 24일 열린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이토 마사키를 상대하여 요코하마 스타디움 '''외야 좌중간의 최 상단 광고판을 맞고 떨어지는 초대형 2점 홈런포를 쏘아올리는 괴력을 선보이며'''[12] 1차전 MVP에 뽑히는 등 킨테츠의 강타자로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물론 삼진왕 기질도 여전해서 이 해 198삼진으로 작년에 스스로 세운 삼진 기록을 또다시 크게 경신했고, 6월 29일부터 8월 29일까지 31경기 연속 삼진을 당하며 이 기록도 단 한 시즌 만에 갈아치웠다.
그러나 1991년엔 7월에 경기 도중 오른쪽 무릎 반월판에 부상을 입은 브라이언트는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시즌 아웃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킨테츠 관계자들은 브라이언트가 그대로 은퇴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지만 다행히 1992년 시즌을 앞두고 무사히 복귀했다.
1992년 5월 3일, 치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롯데 마린즈와의 원정 경기 때 외야 쪽에서 불어오는 초속 8m의 역풍을 뚫고 상대 투수 '''콘노 다카유키'''로부터 전광판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을 날렸는데, 그 홈런 때문에 전광판이 고장나는 소동이 벌어졌다(...)
1993년엔 4월 18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전에서 후쿠오카 돔 개장 1호 홈런을 홈팀 다이에의 투수 '''와카타베 겐이치'''[13] (다이에)로부터 뽑아냈다.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 曰, '''"때릴 만한 사람이 때려냈다"'''(...). 이 해 브라이언트는 무려 '''204삼진'''으로 역대 시즌 최다 삼진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200삼진 기록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지만, '''42홈런'''에 '''107타점'''으로 홈런, 타점 2관왕에 올랐다. 이듬해인 1994년에도 '''35홈런'''으로 2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다.
그러나 1995년을 마지막으로 그의 활약은 끝나고 말았다. 6월에 부상으로 인해 1군에서 말소되어 시즌아웃 당한 브라이언트는 다시는 1군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결국 그 해를 끝으로 킨테츠에서 방출되었다.[14] 하지만 브라이언트는 시즌 종료 후 개최된 킨테츠 팬 감사 행사에 참석하여 끝까지 프로다운 팬 서비스 정신과 긴테츠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보이면서 야구계 안팎에서 찬사를 들었다.
1996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산하의 더블 A 팀에서 뛰었지만 타율 0.208에 그치면서 결국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브라이언트가 8시즌 동안 일본에서 뛰면서 남긴 기록은 '''778안타, 259홈런, 641타점, 311볼넷,'''[15] '''1186삼진(...), 타율 0.261'''이며, '''홈런왕 3회, 타점왕 1회, 퍼시픽 리그 MVP 1회, 베스트 나인 3회'''를 수상했다.
4. 은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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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25일, 오릭스 버팔로즈의 경기 전 시구 행사에 초대된 브라이언트.
그라운드를 떠난 브라이언트는 고향인 조지아 주에서 헌 책방을 운영하며 OB전 출장을 위해 수 차례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5년에 긴테츠 시절 스승인 오기 아키라 감독의 권유를 받고 오릭스 버팔로즈의 타격 코치로 취임했지만, 오기가 건강 문제로 퇴임하면서[16] 브라이언트도 1년만에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릭스 코치로 뛰던 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와의 인터리그 시합 전 이벤트 행사로 요코하마 타격 코치 '''타시로 도미오'''와 홈런 레이스를 벌였는데, 타시로는 0홈런에 그친 반면 브라이언트는 3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며 은퇴한 지 10년 가량 되었음에도 파워 만큼은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현재는 미국의 IT관련 기업의 임원으로 근무 중이며, 두 번째 이혼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중이라고 한다.
5. 삼진
현역 시절, 슬러거 치고는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엄청난 배트 스피드로 빨랫줄 같은 라이너 성 타구를 날리는 데 능했다. 반면 위에서 언급했듯 '''1186삼진에 볼삼비 0.262(볼넷 311개)'''로 선구안은 영 꽝이었다. 브라이언트의 삼진 갯수는 NPB 역대 24위에 해당되지만, 통산 삼진 상위 40명 중 1000경기 미만 출장(773경기), 그리고 삼진 갯수가 출장 경기수를 뛰어넘는 선수는 브라이언트가 유일하다(...). 심지어 브라이언트는 아예 '''NPB 역대 시즌 삼진 순위 1~4위를 혼자 독식하고 있다(...)''' 아래 표는 브라이언트가 기록한 삼진 기록이다. 이렇게 삼진이 많고 선구안이 별로인 탓에 기복이 심하긴 했지만 한 번 감 잡았다 하면 연타석으로 홈런을 쏟아내는 등 몰아치기에 능한 타자여서 특히 중요 경기에서 임팩트 있는 활약을 많이 남겼다.
게다가 1991년엔 상술했듯이 시즌 중 부상으로 고작 63시합만에 시즌 아웃된 상황에서도 100삼진을 기록했고, 킨테츠에서 주전으로 뛴 마지막 해이던 1994년에도 153삼진을 찍으며 '''무려 6년 연속 100삼진을(...)''' 기록했다. 이건 뭐 역사에 남을 기록 수준..
이렇게 많은 삼진 때문에 '''홈런 아니면 삼진, 미스터 K, 대형 선풍기'''(...) 등등 별명도 많았지만, 상대 투수들이 삼진을 노리고 고의사구 대신 브라이언트와 정면 승부 하려다가 홈런을 두들겨 맞은 케이스도 적지 않았다고.
6. 기타
- 동년배인 미국 배우 에디 머피를 닮은 용모 때문에 킨테츠 시절 팀 동료인 가네무라 요시아키가 에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브라이언트도 이 별명이 맘에 들었는지 어느 날 방송국 카메라를 바라보며 "I'm Eddie Murphy" 라고 외치면서 낄낄댄 적도 있다. 상기한 1989년 10월 12일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더블헤더 때 4연타수 홈런을 터뜨린 브라이언트에 대해 한 스포츠 일간지는 "에디 머피를 빼닮은 브라이언트가 아니다. 에디 머피가 브라이언트를 닮은 것이다" 라고 촌평하기도 했다(...).
- 체질 탓인지 본인이 싫어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술은 전혀 마시지 않는다. 선수단 회식 때에는 동료들과 콜라로 건배할 정도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브라이언트는 현역 시절 삿포로 맥주의 광고 모델로 출연한 경력이 있다...
[1] 다만 야구계에서만 퇴출되는 징계를 받고 법적인 처벌은 없이 기소유예로 끝났다. 물론 기소유예를 받고 계약해지가 돼서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돌아가서도 당연히 은퇴수순을 밟았지만. 그리고 이 테크는 32년 후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제이 잭슨이 그대로 재현한다(...)[2] 결정적으로 주니치와 긴테츠의 2군 경기 때 브라이언트가 킨테츠의 투수 '''사사키 오사무'''에게 백 스크린을 통타하는 대형 홈런을 뽑아낸 것이 그를 데이비스의 대체 선수로 낙점하는 계기가 되었다.[3] 사실 주니치의 2군 코칭스태프는 브라이언트의 장래성을 높게 평가하여 긴테츠로의 이적을 반대했지만 당시 1군 외국인 선수 등록 한도인 2명을 이미 타이완 출신 투수 '''카쿠 겐지'''(카쿠는 이듬해인 1989년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곽원치라고도 알려져 있는 그 투수가 맞다.)와 미국인 타자 '''게리 레시치'''로 채운 주니치로선 브라이언트를 1군에 정착시킬 자리는 없었다.[4] 브라이언트 이전에 한 시즌 1경기 3홈런을 두 번 기록한 선수는 카와카미 테츠하루(요미우리, 1950년), '''에토 신이치'''(롯데, 1971년), '''레온 리'''(롯데, 1979년), 오치아이 히로미츠(롯데, 1985년) 네 명 뿐이었다. [5] 참고로 1988년 센트럴 리그 홈런 1위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소속 '''카를로스 폰세'''의 33홈런이었다(...)[6] 일본 최다 기록은 1979년 한신 타이거스의 '''리로이 스탠튼'''이 세운 34경기 연속 삼진.[7] 후술하겠지만 이 기록은 브라이언트 자신이 10월 12일 세이부 라이온즈 와의 더블헤더 1차전 때 3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스스로 '''시즌 4회'''로 경신했다.[8] 실제로 이해 시즌 결과는 상위권 3팀(우승팀 킨테츠, 2위 오릭스, 3위 세이부)의 승률 차가 무려 '''단 1리(!!!)'''일 정도로 역대급 혈전이 벌어졌다.[9] 와타나베는 이 경기 전까지 브라이언트를 통산 피홈런 0개로 묶고 있던 브라이언트의 천적이었다.[10] 브라이언트의 그 해에만 4번째 1경기 3홈런 기록이자, 종전 오 사다하루가 갖고 있던 통산 5회를 뛰어넘는 '''개인 통산 6번째 1경기 3홈런'''이었다.[11] 첫 타석은 고의사구로 출루했다.[12] 브라이언트는 좌타자이다. 즉 '''밀어쳐서''' 좌중간 꼭대기로 타구를 보냈다는 얘기이다(...).[13] 와카타베 하루카의 아버지이며 현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1군 투수 코치.[14] 스즈키 케이시 감독과 선수진들 간의 불화로 인해 노모 히데오, 요시이 마사토 등의 우수한 실력의 투수들이 시즌 전 팀을 떠난 것에 더해 주포 브라이언트가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하고 만 킨테츠는 결국 이해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다. 감독인 스즈키 케이시도 시즌 도중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해임당했다.[15] 별도로 고의사구 40개, 몸에 맞는 공 31개를 얻었다.[16] 오기는 그 해 12월 1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17] 상술했듯 사상 유일의 시즌 200삼진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