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야마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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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전 일본의 프로야구선수이자 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했던 호타준족으로, 한국프로야구에서 아키야마와 가장 비슷한 타입의 선수는 '''박재홍'''.[3]
2. 선수 시절
2.1. 프로 입단 과정
높이뛰기 선수인 아버지, 투포환 선수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981년 지명외 선수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드래프트 번외 입단. 우리나라로 치자면 신고선수 정도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신고선수처럼 프로 지명을 못 받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선수는 아니었다. 고교시절 에이스로서 무명의 야쓰시로 고등학교를 지역예선 결승까지 올린 끝에 당시 구마모토의 야구명문 구마모토 공고와의 혈전 끝에 아쉽게 패배하면서[4] 프로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끌었다. 단지 당시 아키야마는 체육교사를 목표로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야구를 계속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드래프트에서는 아무 팀도 지명하지 않았다.
다른 프로 팀들이 아키야마는 대학으로 진학할 것으로 생각하고 일찌감치 스카우트를 포기했지만 유독 세이부 라이온즈 측만 끈질기게 아키야마를 설득했다. 특히 다른 팀은 아키야마의 투수로서의 능력에만 주목한 데 반해 세이부만은 타자로서의 아키야마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여 아키야마를 타자로 키우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아키야마도 세이부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서 드래프트 지명외[5] 로 입단하게 된다.
2.2.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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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시절의 아키야마.
1981년 2군리그에서 56경기 0.247의 타율에 7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서서히 거포 기질을 발휘하며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시즌 막판인 9월 29일 1군에 올라와 3경기 5타수 1안타(3루타) 1득점 2삼진 0.200의 타율 1사구의 성적을 올렸다.
1982년에는 13홈런으로 2군 이스턴리그 홈런왕에 오르고, 1983년에는 캘리포니아 리그로 연수를 떠나 메이저리그 휴스턴 애스트로스 산하 싱글A 팀에서 88경기에 출장하여 308타수 78안타 0.253의 타율, 7홈런, 43타점을 기록하였다. 이 때 아키야마의 운동능력을 눈여겨 본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세이부 측에 아키야마의 트레이드를 진지하게 타진해왔고 이 때문에 세이부 측은 부랴부랴 아키야마를 귀국시켰다. 만약 이 때 트레이드가 성립됐으면 최초의 일본인 야수 메이저리거를 15년 일찍 봤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귀국 이후 1984년 1군 붙박이로 3루수와 중견수를 겸하며 7~9번 타순에 배치되었고,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전에서 2회말 대타로 등장하여 1군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
1985년부터 붙박이 외야수로 포지션을 고정한 후 잠재되어 있던 거포본능이 폭발하기 시작,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연속 40홈런을 기록하였고 1987년에는 일본프로야구 7번째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였으며, 43홈런을 기록해 홈런왕 타이틀까지 차지하였다.[6] 시즌 마지막 경기인 킨테츠 버팔로즈전 까지 43홈런 36도루를 기록한 상태에서 1회말 중전안타로 나간 뒤 2루와 3루를 연속으로 도루하여 38도루를 기록하였으나, 이후 도루 추가에 실패하여 아쉽게도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40홈런-40도루 달성에는 실패하였다.[7][8]
1990년에는 35홈런과 동시에 51도루를 기록,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일본프로야구 최초로 홈런왕과 도루왕 및 30홈런-50도루 기록을 모두 거머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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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야마는 또한 홈런을 친 뒤 하던 공중제비 세레모니로도 유명했다.[10]
요새처럼 메이저리그식의 불문율을 따지는 풍토였다면 다음 타석에서 빈볼공격 받았을 수도 있는 플레이였지만, 이 시절에는 그냥 멋지게 홈인하는 걸로 간주되었다. 참고로 이 장면은 자막의 회수를 보면 알겠지만,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붙은 1991년 일본시리즈 '''7차전'''의 자기의 마지막 타석이다. 5-1에서 7-1로 달아나는 쐐기 투런포를 친 후의 세레모니로, 이미 경기도 거의 기울었고 다음 타석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보여준 것. 이 장면은 미국 ESPN 스포츠센터의 Play of the day에도 뽑힌 적이 있었다. 그리고 30여년 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아카시 겐지가 저 세레모니를 이어받고 있다.
2.3.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2.3.1. 세기의 트레이드, 다이에로의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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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에 입단 후 찍은 사진. 가운데 1번이 아키야마.
이후 1994년 팀 동료인 와타나베 토미오, 우치야마 토모유키와 함께 다이에의 중심타자인 사사키 마코토, 주축 투수인 무라타 카츠요시, 중간 계투 하시모토 타케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 트레이드를 '''세기의 트레이드'''라고 대서특필할 정도로 임팩트가 큰 트레이드였다.[11]
2.3.2. 다이에의 정신적 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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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에 시절의 아키아마.
새 팀에서도 세이부에서 보여줬던 거포의 면모를 보여주기를 기대했으나[12] 하필 홈구장이 펜스높이가 무려 5.8m나 되어서 다른 구장에선 홈런이 될 공이 이곳에선 잘해봐야 2루타, 더 잘해도 3루타로 변해버린다고 소문날 정도로 홈런 까기가 힘들던 후쿠오카 돔. 그 때문인지 1994년 성적은 0.254의 타율 24홈런 73타점 26도루로 1985년 이후 이어져 왔던 10년 연속 30홈런 달성에는 실패한다. 그리고 도높은 후쿠오카 돔의 펜스를 넘기기 위해 풀스윙으로 타격폼을 바꿨다가 허리부상을 입어버렸고, 1996년에는 타율은 3할로 복귀했지만 홈런은 9개로 줄어들면서 똑딱이로 변신했다. 그 후로는 주로 1번 타순에 기용되면서 팀배팅에 주력 2할7~8푼대 타율에 두자릿수 홈런 정도의 성적을 올리는데 그친다. 그러나 주장으로서 1년 늦게 FA로 세이부에서 이적해온 쿠도 키미야스와 함께 당시 막장인 팀 분위기를 수습하여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 선동렬, 이상훈, 이종범 등의 한국인 삼총사가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20타수 6안타 2홈런 3타점을 기록하며 일본시리즈 MVP[13] 에 올랐다. 시리즈 3차전에서 아키야마가 우익수로 뛸 때 파울지역 펜스에 거의 들어가는 타구를 펜스를 밟고 뛰어 잡아낸 호수비를 펼쳤는데 이는 일본판 'The Catch'라고 할 정도.
3. 현역 은퇴 이후
2002년 10월 6일, 치바 롯데전에서 원래 자신의 포지션인 3번 중견수로 출전하였고, 이 시합을 끝으로 은퇴했다. 여담으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미트가 F일 정도로 삼진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실제 그의 시원시원한 타격 스타일을 반증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현재 통산 삼진부문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1위는 룸메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
3.1. 지도자 생활
은퇴후 해설가 생활을 하다가 팀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나서 팀의 코치로 컴백했고, 2009년 왕정치의 후임으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에 부임하였다.
3.1.1. 2009년
전년 최하위의 굴욕을 딛고 퍼시픽리그 2위를 달리며 잘 나가다가 시즌 막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에 추월당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에 내리 2패를 당하며 광속탈락.
3.1.2. 2010년
2010년에는 시즌 막판에 매직넘버 4를 남겨둔 세이부를 상대로 대 역전극을 펼치며 리그 우승하여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직행했으나 3위로 올라온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어드밴티지 1승포함해서 3승1패로 몰아넣고 포풍 3연패로 탈락.
3.1.3. 2011년
2011시즌, 본인의 감독 커리어로서는 3수, 팀으로서는 7수 만에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돌파하고,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이끄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011 일본시리즈에서 승리하며 드디어 소뱅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아시아 시리즈 사상 최초로 대한민국 구단주조상동네팀에게 패권을 넘겨주는 불명예를 떠안았다.
3.1.4. 2012년
2012년에는 메이저리그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1, 2, 3 선발에 주전 유격수까지 털린채로 지난 해 4선발이었던 셋츠 타다시를 에이스로 내세워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오릭스와의 개막 3연전을 싹쓸이하면서 선두권을 유지했으나 다승왕이었던 홀튼과 좌완 에이스 와다, 스기우치의 공백을 메워줄 것을 기대하고 데려온 브래드 페니와 호아시 가즈유키는 사이좋게 먹튀 인증, 철벽 계투조를 형성했던 마하라와 폴켄보그가 부상으로 각각 시즌 아웃과 시즌 도중 장기 이탈, 2011년에 양대리그 수위타자에 MVP를 획득하면서 돈이 아깝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던 우치카와 세이이치마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진의 늪에 빠지는 등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그동안 호크스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던 인터리그에서 간신히 꼴찌를 면하는 등 리그 5위까지 추락. 2011년의 성과는 현실에서 프로야구 매니저를 하는 듯한 사기에 가까운 선수빨 덕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그러나 7월경부터 젊은 야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고 마하라와 폴켄보그의 연달은 부상으로 생긴 마무리 공백을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MVP급의 활약을 보여준 모리후쿠로 메우는 등 수습에 들어가 8월중순부터 7연승을 거두면서 폭풍질주, 1위와 1.5게임차 2위로 올라섰다. 결국 9월달에 다시 주춤하면서 4위인 라쿠텐에게 1게임차로 간신히 3위로 시즌을 마감했지만 어쨌든 포스트시즌에는 진출. 클라이맥스 시리즈 스테이지1에서 2위인 세이부를 꺾고 파이널 스테이지까지 진출했다.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닛폰햄에게 무난하게 스윕 당하면서 시즌을 마감했지만 주력을 줄줄이 유출당한 어려움 속에서 젊은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고 향후 전망을 더욱 밝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지도력은 인정받는 분위기.
3.1.5. 2013년
2013년 시즌에 들어와서도 2012년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전 해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팀을 구원했던 고졸신인 다케다가 2년차 징크스에 빠지고, 투수진의 한 축을 이루던 오토나리가 부상으로 1, 2군을 왔다갔다 하는가 하면, 20홈런을 날리면서 쏠쏠하게 활약해준 윌리 모 페냐도 예전의 공갈포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어려운 상황에서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됐던 고쿠보는 은퇴한 상황. 팀 순위도 한 때 최하위까지 떨어지면서 이번에야 말로 결국 선수발에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세간의 평가대로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교류전에 들어오자 전년도에 FA 먹튀가 된 호아시가 귀신같이 부활하고 윌리 모 페냐의 공백은 신 외국인 브라이언 라헤어로 메웠으며, 그동안 약간 실망스러운 성적이 이어진 중견수 하세가와가 교류전에서 4할대 타율을 기록하면서 수위타자를 차지. 시즌 초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외야수 야나기타, 요시무라, 투수 이와사키 등이 적절하게 활약해 주면서 2년만에 교류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 상위권으로 뛰어 올랐다. 위기상황에서 젊은 선수들의 적절한 선수기용으로 성적과 세대교체의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모습을 보이면서 전년도에 보인 지도력이 플루크가 아닌 건 증명했다. 교류전 종료 후에는 라쿠텐, 롯데와 더불어 상위권을 형성했으나, 2012년에 팀 투수진의 주축들이 빠져나간 공백은 여전히 메우지 못했고 올스타 브레이크를 5위로 통과했다. 올스타전 이후 8월 초에 잠시 반짝했지만 에이스인 셋츠 타다시 외에는 믿을만한 투수가 없는 상황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3위 싸움으로 밀려났다. 결국 시즌 최종전에 패하면서 팀으로서는 2008년이후 5년 만에, 본인의 감독 경력 최초로 포스트시즌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3.1.6. 2014년
5년 만에 포스트시즌에서의 탈락으로 절치부심한 팀은 또다시 대규모 현질을 감행하여 전력을 보강했다. 팀이 알아서 거액을 투자해서 전력을 보강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규모 전력보강은 결국 성적에 대한 압박으로 직결된다는 점에서 감독 본인에게는 험난한 앞길이 예고되었다. 시즌 시작 전부터 압도적인 우승후보로 지목받았지만 막상 개막을 하고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오릭스의 상승세에 선두권 다툼은 하고 있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었다. 특히 장거리포 부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데려온 조선의 4번타자가 똑딱질에 득타병을 반복하면서 기복이 심한 시즌을 보냈다. 그래도 8월~9월 초순까지 상승세를 타고 앞으로 치고 나갔지만 9월 중순 이후 팀 전체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진에 빠지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1승 9패의 하락세를 보였다. 결국 리그 우승은 시즌 마지막 경기인 오릭스와의 맞대결에서 결정되는 상황까지 몰렸고 그 마지막 경기에서 연장 10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마쓰다 노부히로의 끝내기 안타로 겨우 리그 우승을 확정지으면서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 직행했다. 그러나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짓고 나서 돌연 2014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의사를 밝혀서 야구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일본시리즈에 진출 시켰으니 팀에서는 당연히 재계약을 제안했지만 가족들과 오래 있고 싶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고사했다.
정규시즌 막판의 하락세에 갑작스러운 사임 발표로 팀 분위기가 가라앉은 듯, 1승의 어드밴티지를 얻고 임한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2위 오릭스를 꺾고 상승세를 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상대로 악전고투가 계속 되었다. 마지막 6차전까지 간 끝에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일본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 때문에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일부 중심 선수에게 전력의 무게가 쏠렸던 한신과는 달리 보유한 전력을 골고루 활용하면서 1차전 패배 이후에 4연승으로 한신을 일축하고 3년만에 두번째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특히 시리즈 내내 외부에서 보강한 전력과 본인이 발탁해서 기회를 준 유망주들의 활약이 조화을 이루면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과시했고 마지막 경기까지 명감독의 자질을 지녔음을 확인시켜줬다.
2014 시즌이 끝나고 본인 발표대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후임으로는 쿠도 키미야스가 내정되었다. 감독직 사퇴 결정이 워낙 전격적이라서 그 배경을 놓고 구단으로 부터의 성적 압박과 2014 시즌 막판 하락세에 따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결정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사실은 2011년부터 투병중이던 아내 치아키씨의 간병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음이 시리즈 후에 밝혀졌다. 일본시리즈 우승감독의 영예를 뒤로 하고 야인신분으로 물러나면서까지 부인의 곁을 지키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치아키씨는 12월 9일 세상을 떠났다.##[14]
2015년에는 후쿠오카 지역 방송사 RKB(TBS 계열)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 기타
화려한 명성을 누렸지만, 가족 내에서는 불행을 많이 겪었다. 태어나기 전에 형이 있었으나 7살의 나이로 일찍 죽었고,[15] 중학생 땐 누나가 백혈병으로 죽었다. 부인인 치아키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고, 2014년엔 아내인 치아키마저 병으로 잃고 말았다. 아키야마 본인도 4살 때 심한 병으로 죽을 뻔했다.
그의 딸인 마린은 주니어 골프선수 출신이며, 한국어와 영어 통역도 한 적이 있다.
[1] 現 구마모토현 야츠시로시[2] 밑에서도 설명되지만, 원래 체육교사를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래프트를 거절했다가 입단한 케이스이므로 드래프트 번외로 간주된다. [3] 통산기록을 비교하면 알겠지만 박재홍의 업그레이드판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4] 이 때 구마모토 공고의 주전 포수가 훗날의 팀 동료이자 前 세이부 라이온즈와 치바 롯데 마린즈의 감독이었던 이토 쓰토무였다.[5]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의 초창기에는 안정적이지 않은 직업인 프로야구계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 지명된다 하더라도 입단 거부가 흔했다. 때문에 두 자릿수 지명까지 가는 것도 흔히 볼 수 있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 지명한 선수들이 대거 입단을 거부하는 사태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단을 구제하기 위해 드래프트 번외 입단 제도가 있었는데, 규정의 헛점을 이용해 니우라 히사오처럼 우수한 재일교포 선수들을 드래프트를 우회해 입단시키거나 하는 등 우수한 선수들을 드래프트를 통한 경쟁을 피해 확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해 끝내 폐지되었다.[6] 당시 시즌 기록은 43홈런, 38도루.[7] 40홈런 40도루 기록은 이듬해인 1988년 메이저리그에서 호세 칸세코가 '''세계 최초'''로 달성하게 된다.[8] 한국에서는 NC 다이노스의에릭 테임즈가 40-40을 기록하면서 아시아 프로야구 최초로 기록하게된다. 아직까지 40-40을 기록한 아시아 선수는 없다. 또 60홈런을 기록한 아시아선수도 아직은 없다. 일본프로야구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블라디미르 발렌틴 네덜란드선수가 2013년에 기록하였고 아시아 선수 중 가장많이 홈런을 기록한 사람은 2003년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이다[9] 아키야마 이후 일본프로야구에서 홈런왕-도루왕 기록을 모두 보유한 선수는 야마다 테츠토가 유일하다. 야마다는 2015년 둘을 동시에 달성하며 현재까지 홈런왕-도루왕을 동시에 차지한 유일한 일본프로야구 선수로 기록에 남았다.[10] 이 장면은 1986년 일본시리즈 '''8차전'''에서 2점 뒤진 상황에서 동점 투런홈런을 친 이후의 세레모니. 1차전이 '''연장 14회까지 갔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아''' 무승부 처리되어 8차전까지 갔던 것. 당시 홈런을 허용한 히로시마의 투수 카네이시 아키히토(金石昭人)는 재일교포 출신 대투수인 카네다 마사이치의 조카이다.[11] 당시 다이에에서 리빌딩을 맡고 있던 전무 겸 감독 네모토 리쿠오가 주도한 트레이드였다. 네모토 감독은 이후 감독 자리를 오 사다하루에게 넘겨주고 GM 역할에만 집중하면서 쿠도 키미야스 트레이드, 이구치 다다히토, 사이토 가즈미, 마츠나카 노부히코, 조지마 겐지, 시바하라 히로시 등 이후에 팀을 이끌어가게 될 대형 신인들을 드래프트로 영입하는 등 90년대 다이에의 과감한 오프시즌 행보를 이어나갔다. 참고로 그는 7~80년대 세이부 라이온즈에서도 이러한 방식으로 세이부를 80년대 일본프로야구의 왕자로 만든 바 있다.[12] 세이부에서의 마지막 해인 1993년에 30홈런을 쳤지만 타율이 2할4푼7리로 곤두박질쳤다. 아마도 세이부 프런트는 아키야마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듯.[13] 2011년 팀 후배였던 고쿠보 히로키가 갱신하기 전까지는 최고령 일본시리즈 MVP 기록이었다.[14] 초혼은 아니고 이전에 한 번 결혼해서 자녀를 2명 가졌다가 이혼한 바 있다.[15] 그의 이름이 코지(幸二)인 이유도 이것이다. 죽은 형의 몫까지 2배(二) 더 행복(幸)해지라는 의미로 어머니가 지은 이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