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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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펑크의 개척자이자 1978년 결성된 한국의 펑크 록밴드.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뮤지션들인 "서울 나그네"가 베이스가 되어 구성된 밴드로 DJ로 활동하던 이장희가 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당시 멤버는 기타 겸 보컬 최이철, 키보드 겸 보컬 김명곤, 키보드 이근수, 베이스 이남이, 드럼 김태홍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현재 밴드의 리드 보컬이자 리더인 이철호 역시 서울 나그네 시절부터 계속 활동했으며, 앨범 크레딧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데뷔 앨범 레코딩에도 참여했었다고 인터뷰 등을 통해 밝혔고, 이는 이철호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이남이나 다른 사람들도 인정한 사실이다.
이철호의 말에 따르면 본래 당시의 멤버들 (자신과 이남이를 포함한 1기 멤버) 전원이 방송에 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데뷔하지 말자고 함께 약속하여 데뷔앨범을 녹음했지만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자 최이철과 김명곤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이 약속을 어기고 과거의 대마초 흡입 문제 때문에 활동에 지장이 생긴 자신과 이남이를 제외한 채 메이저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이에 이철호와 이남이는 분노하면서 밴드를 탈퇴했지만 최이철의 간곡한 부탁으로 두 사람은 1집 활동 당시 세션으로 공연무대에 올랐었다고 한다. 또 본래 합류하지 않으려 했던 사랑과 평화에 1989년 다시 재가입해 활동하게 된 것 역시 최이철(그리고 이남이)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장희가 프로듀싱한 1집 앨범 '''한동안 뜸했었지'''.[2]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펑키 장르를 소화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멤버들이 후덜덜한 연주실력과 무대 매너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는데 최고의 실력자들이 아니면 서기 힘든 미8군 무대에서도 최상위 등급인 '''Special AA'''로 분류되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1집 앨범은 지금까지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그 중에서도 키보디스트 '''김명곤'''의 화려한 신디사이저 연주와 작, 편곡 능력은 밴드의 상징이었다.[3]
이어 베이스를 송홍섭으로 교체한 2집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를 발매했고, 타이틀곡인 '''얘기할 수 없어요'''와 더불어 B면을 여는 트랙 '''장미'''가 크게 사랑받았다.[4] 그러나 밴드의 두 축인 최이철과 김명곤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에, 드럼을 맡았던 김태홍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밴드 전체가 크게 침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3집은 거의 10년 가까운 공백기를 거친 끝에야 나오게 되었는데, 최이철, 이남이만 남고 새로 한정호, 최태일, 이병일을 영입했다. 이 3집의 타이틀곡이 1988년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로 꼽히는 '''울고 싶어라'''. 김태홍의 죽음과 오랜 공백기라는 상황에서 나온 이 곡은 이남이를 스타가수로 만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노래는 이남이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5]
펑키 장르를 개척했던 사랑과 평화는 4집부터는 소위 재즈락이라 불리는 장르로 변화를 모색하는데 이남이가 울고 싶어라의 히트로 팀을 탈퇴했고, 3집 이후 이듬해에 나온 4집 앨범 "샴푸의 요정"에서는 김현식의 백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던 장기호와 박성식을 영입해 재즈락을 선보였다. 타이틀곡인 '''샴푸의 요정'''은 장기호가 작사, 작곡한 노래로 80년대 후반 한국 가요에서 보기 드문 세련된 멜로디를 가진 음악이었다.[6]
이후 장기호와 박성식이 빛과 소금을 만들며 독립한뒤 1992년 나온 5집은 새로 안정현과 이승수를 영입했다. 이 멤버는 8년간 지속되는데 1996년 6집 발매 이후 팀의 초기 멤버였던 최이철과 안정현이 음악 공부를 위해서 팀을 탈퇴한다. 이후 이철호와 이병일을 중심으로 기타의 송기영과 키보드의 이권희가 가세했다. 2003년 7집을 발표한뒤 이권희가 팀을 떠나고 2006년에는 20년동안 사랑과 평화를 지키던 드러머 이병일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기도 했다. 이병일의 대체로 신중현과 함께 활동했던 드러머 문영배가 영입되었으나 건강의 문제로 6개월만에 하차하고 이후 젊은 드러머 정재욱을 새로 영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7년 30주년을 기념하는 8집 앨범을 발매했고, 2014년에는 아래 후술할 명칭 논란 속에서도 9집이 나왔지만 앨범이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묻혔다.
상당히 놀라운 일은 '''30년이 넘게 밴드가 유지가 되고 있다'''라는 점인데 멤버 교체가 있긴 했지만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라고 볼수 있다. 4집 이후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랑과 평화가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일은 인정해줄만한 일일것이다.
2013년 6월, 신대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철호가 원년멤버 최이철 몰래 밴드명인 사랑과 평화를 상표권 등록했다고 하여 논란이 불거졌다. 신대철에 의하면 이철호는 최이철 몰래 1999년에 사랑과 평화를 상표권 등록한뒤 최이철에게 '''이 밴드는 이제 내것이니 당신은 빠지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대철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간 알려진바로 최이철이 음악공부를 위해서 사랑과 평화를 탈퇴했다는 그간의 설명은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이철은 이때문에 명예를 빼앗기고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지내면서 심지어는 자녀를 학교에 보낼수도 없는 지경[7] 이 되었다고 하면서 신대철은 '''최이철의 사랑과 평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철호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아직 이철호측은 이에 대한 어떤 반응도 없는 상황.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을 폭로했던 신대철의 발언인지라 사랑과 평화를 아는 이들에겐 상당히 충격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였는데, 당시 월간지 <문화건달 짬> 2000년 8월호의 인터뷰에서 들국화의 전인권이 그 자리에 동석했던 최이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를 밝힌 바 있다.
최이철 측과 신대철, 전인권을 포함한 최이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태에 대해 최이철을 편들어 이철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악의적인 인신공격을 하고 있지만, 사랑과 평화의 밴드명의 상표권 등록은 최이철이 탈퇴 후에도 (밴드가 해체 한 것이 아니라 계속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사랑과 평화 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기에 벌어진 일이고, 그리고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명의 작명은 최이철이 아닌 이남이가 했으며, 이는 최이철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법적으로 따져봐도 '''최이철은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명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이철호가 최이철에게서 사랑과 평화를 뺐었었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고, 이는 딥 퍼플이나 핑크 플로이드 등 리더가 탈퇴했음에도 여전히 남은 멤버들 끼리 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밴드들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최이철 측의 논리대로라면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을 나갔으니까 딥 퍼플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고, 시드 바렛이 핑크 플로이드를 나갔으니까 핑크 플로이드는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시드 바렛이 핑크 플로이드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인데, 또 최이철이 '최이철의 사랑과 평화'로 활동해도 이철호가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신대철의 논리대로라면 김종서나 임재범이 '김종서의 시나위', '임재범의 시나위' 이런 이름을 걸고 활동을 해도 신대철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닥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이철과 이철호 양쪽 진영의 대립은 팬들 이외의 대중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어느 쪽의 말이든 가려 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8]
1. 소개
대한민국 펑크의 개척자이자 1978년 결성된 한국의 펑크 록밴드.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뮤지션들인 "서울 나그네"가 베이스가 되어 구성된 밴드로 DJ로 활동하던 이장희가 이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았다. 당시 멤버는 기타 겸 보컬 최이철, 키보드 겸 보컬 김명곤, 키보드 이근수, 베이스 이남이, 드럼 김태홍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현재 밴드의 리드 보컬이자 리더인 이철호 역시 서울 나그네 시절부터 계속 활동했으며, 앨범 크레딧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데뷔 앨범 레코딩에도 참여했었다고 인터뷰 등을 통해 밝혔고, 이는 이철호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 이남이나 다른 사람들도 인정한 사실이다.
이철호의 말에 따르면 본래 당시의 멤버들 (자신과 이남이를 포함한 1기 멤버) 전원이 방송에 나갈 수 없다면 차라리 데뷔하지 말자고 함께 약속하여 데뷔앨범을 녹음했지만 앨범이 큰 성공을 거두자 최이철과 김명곤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이 약속을 어기고 과거의 대마초 흡입 문제 때문에 활동에 지장이 생긴 자신과 이남이를 제외한 채 메이저 무대에 데뷔하게 되었다. 이에 이철호와 이남이는 분노하면서 밴드를 탈퇴했지만 최이철의 간곡한 부탁으로 두 사람은 1집 활동 당시 세션으로 공연무대에 올랐었다고 한다. 또 본래 합류하지 않으려 했던 사랑과 평화에 1989년 다시 재가입해 활동하게 된 것 역시 최이철(그리고 이남이)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2. 역사
이장희가 프로듀싱한 1집 앨범 '''한동안 뜸했었지'''.[2]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펑키 장르를 소화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는 멤버들이 후덜덜한 연주실력과 무대 매너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는데 최고의 실력자들이 아니면 서기 힘든 미8군 무대에서도 최상위 등급인 '''Special AA'''로 분류되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1집 앨범은 지금까지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그 중에서도 키보디스트 '''김명곤'''의 화려한 신디사이저 연주와 작, 편곡 능력은 밴드의 상징이었다.[3]
이어 베이스를 송홍섭으로 교체한 2집인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를 발매했고, 타이틀곡인 '''얘기할 수 없어요'''와 더불어 B면을 여는 트랙 '''장미'''가 크게 사랑받았다.[4] 그러나 밴드의 두 축인 최이철과 김명곤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에, 드럼을 맡았던 김태홍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밴드 전체가 크게 침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3집은 거의 10년 가까운 공백기를 거친 끝에야 나오게 되었는데, 최이철, 이남이만 남고 새로 한정호, 최태일, 이병일을 영입했다. 이 3집의 타이틀곡이 1988년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로 꼽히는 '''울고 싶어라'''. 김태홍의 죽음과 오랜 공백기라는 상황에서 나온 이 곡은 이남이를 스타가수로 만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노래는 이남이의 노래로 알려져 있다.[5]
펑키 장르를 개척했던 사랑과 평화는 4집부터는 소위 재즈락이라 불리는 장르로 변화를 모색하는데 이남이가 울고 싶어라의 히트로 팀을 탈퇴했고, 3집 이후 이듬해에 나온 4집 앨범 "샴푸의 요정"에서는 김현식의 백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던 장기호와 박성식을 영입해 재즈락을 선보였다. 타이틀곡인 '''샴푸의 요정'''은 장기호가 작사, 작곡한 노래로 80년대 후반 한국 가요에서 보기 드문 세련된 멜로디를 가진 음악이었다.[6]
이후 장기호와 박성식이 빛과 소금을 만들며 독립한뒤 1992년 나온 5집은 새로 안정현과 이승수를 영입했다. 이 멤버는 8년간 지속되는데 1996년 6집 발매 이후 팀의 초기 멤버였던 최이철과 안정현이 음악 공부를 위해서 팀을 탈퇴한다. 이후 이철호와 이병일을 중심으로 기타의 송기영과 키보드의 이권희가 가세했다. 2003년 7집을 발표한뒤 이권희가 팀을 떠나고 2006년에는 20년동안 사랑과 평화를 지키던 드러머 이병일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기도 했다. 이병일의 대체로 신중현과 함께 활동했던 드러머 문영배가 영입되었으나 건강의 문제로 6개월만에 하차하고 이후 젊은 드러머 정재욱을 새로 영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7년 30주년을 기념하는 8집 앨범을 발매했고, 2014년에는 아래 후술할 명칭 논란 속에서도 9집이 나왔지만 앨범이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묻혔다.
상당히 놀라운 일은 '''30년이 넘게 밴드가 유지가 되고 있다'''라는 점인데 멤버 교체가 있긴 했지만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라고 볼수 있다. 4집 이후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사랑과 평화가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일은 인정해줄만한 일일것이다.
2013년 6월, 신대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철호가 원년멤버 최이철 몰래 밴드명인 사랑과 평화를 상표권 등록했다고 하여 논란이 불거졌다. 신대철에 의하면 이철호는 최이철 몰래 1999년에 사랑과 평화를 상표권 등록한뒤 최이철에게 '''이 밴드는 이제 내것이니 당신은 빠지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대철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간 알려진바로 최이철이 음악공부를 위해서 사랑과 평화를 탈퇴했다는 그간의 설명은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이철은 이때문에 명예를 빼앗기고 경제적으로 곤궁하게 지내면서 심지어는 자녀를 학교에 보낼수도 없는 지경[7] 이 되었다고 하면서 신대철은 '''최이철의 사랑과 평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철호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아직 이철호측은 이에 대한 어떤 반응도 없는 상황.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을 폭로했던 신대철의 발언인지라 사랑과 평화를 아는 이들에겐 상당히 충격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2000년대 초부터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이야기였는데, 당시 월간지 <문화건달 짬> 2000년 8월호의 인터뷰에서 들국화의 전인권이 그 자리에 동석했던 최이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를 밝힌 바 있다.
최이철 측과 신대철, 전인권을 포함한 최이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태에 대해 최이철을 편들어 이철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악의적인 인신공격을 하고 있지만, 사랑과 평화의 밴드명의 상표권 등록은 최이철이 탈퇴 후에도 (밴드가 해체 한 것이 아니라 계속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사랑과 평화 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기에 벌어진 일이고, 그리고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명의 작명은 최이철이 아닌 이남이가 했으며, 이는 최이철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법적으로 따져봐도 '''최이철은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명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이철호가 최이철에게서 사랑과 평화를 뺐었었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고, 이는 딥 퍼플이나 핑크 플로이드 등 리더가 탈퇴했음에도 여전히 남은 멤버들 끼리 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밴드들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최이철 측의 논리대로라면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을 나갔으니까 딥 퍼플은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리치 블랙모어가 딥 퍼플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고, 시드 바렛이 핑크 플로이드를 나갔으니까 핑크 플로이드는 그대로 공중분해되고, 시드 바렛이 핑크 플로이드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인데, 또 최이철이 '최이철의 사랑과 평화'로 활동해도 이철호가 이의를 제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신대철의 논리대로라면 김종서나 임재범이 '김종서의 시나위', '임재범의 시나위' 이런 이름을 걸고 활동을 해도 신대철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닥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이철과 이철호 양쪽 진영의 대립은 팬들 이외의 대중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지만, 어느 쪽의 말이든 가려 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8]
[1] "울고 싶어라"가 수록된 1988년 3집 앨범 커버.[2] 1집의 크레딧에 이남이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Bass에 SARVO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레코딩에 참여한 건 이남이지만 대마초 문제로 표기할 수 없어서, 이남이 대신 영입된 Sarvo가 크레딧에 대신 표기되었다고 한다. 이 사르보라는 이탈리아 출신 베이시스트는 무대에서 당시 초퍼 주법을 매우 능숙하게 연주해서 사랑과 평화의 펑키한 느낌을 잘 살려주었다 한다. http://music.naver.com/todayMusic/index.nhn?startDate=20080628[3] 김명곤은 그 후 1980년대 최고의 작곡가, 편곡자 그리고 키보드 세션으로 한국 가요계의 거대한 존재로 각인된다. 특히 그가 전곡을 편곡한 이문세 3~5집은 한국 발라드 역사에 길이 남을 명반들. 작곡가로서 대표곡으로는 나미의 "빙글빙글", 소방차의 "그녀에게 전해주오", 정수라의 "환희"가 있다.[4] 두 곡 모두 이장희가 작사, 작곡했다.[5] 이 곡의 진짜 원곡은 "나비소녀"로 잘 알려진 김세화가 1981년 발표한 "알 거야"로, 가사가 일부 다르다. 이후 작곡자인 이남이가 사랑과 평화의 멤버로 이 곡을 히트시키자 재빨리 사랑과 평화 버전 "울고 싶어라"의 가사로 재녹음하여 발매하기도 했다.[6] 이후 "샴푸의 요정"은 장기호와 박성식이 사랑과 평화를 탈퇴 후 결성한 빛과 소금 1집에 재편곡, 재녹음되어 수록되고, 이 버전이 현재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같은 1집 앨범의 수록곡으로 잘 알려진 "'''그대 떠난 뒤'''" 역시 원곡은 사랑과 평화 4집에 실려 있다.[7] 최이철의 아들 최가람도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다.[8] 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는 최이철에 대해 "명색이 보컬이라는 사람이 기본적인 음정 하나 못 맞추고 있으며 형편없는 노래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 거기에 대한민국 펑키기타 연주의 최고봉이라고 칭받던 기타 실력 또한 노쇠화로 인해 삑사리가 자주 보이고 있다. 결론적으로 종합해보자면 최이철은 오히려 자신이 사랑과 평화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다. 객관성 확보를 위해 본문에서는 삭제하되 각주에는 남겨두었으니 리스너 각자 최근 라이브를 들어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