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전향제도

 

1. 개요
2. 절차
3. 역사
4. 출처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구 가석방 심사 등에 관한 규칙(1998. 10. 10. 법무부령 제467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1]

제14조 (심사상의 주의)''' ②국가보안법위반 등 수형자에 관하여는 특히 그 사상의 전향여부에 대하여 심사하고 필요한 때에는 전향에 관한 성명서 또는 감상록을 제출하게 하여야 한다.

1933년부터 1998년 준법서약제도 제정으로 사라질 때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사상전향/통제 법률로써 넬슨 만델라보다 더 오래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를 배출해내기도 한 법이기도 하다.
흔히 '사상전향'이라 하면 "반체제 운동의 지도자나 진보적 지식인이 국가권력의 강제에 굴복해 사상이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의 전향을 타인이나 사회의 압력을 의식하기 때문에 외부 세계를 향한 태도 표명이 전제되며, 소극적으로 자기가 지니고 있는 특정한 가치나 신념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앞으로는 국가 권력이나 지배 체계에 충성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그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신념과 사상, 양심을 강제로 포기하는 것이므로 그 전향을 강제하기 위해 고문과 협박이 따르는 걸 별개로 치면서도 그 자체가 굴욕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또 다른 고문행위가 될 소지가 있다.

2. 절차


1971년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검거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19년간 옥살이를 한 인권운동가 서승 씨는 당시 사상전향의 절차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는데, 먼저 사상전향서와 사상전향 성명서를 작성한 뒤, 이를 사상전향 심사위원회에 부쳐 중앙정보부의 재가를 받으면 사상전향의 과정이 끝나며, 전향수가 되어 특별사면을 나와 일반수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또 당시 전향서에는 '자기 죄를 인정하는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북한과 김일성에 대한 생각',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종교의 유무', '출소 후의 생활설계' 등의 일곱 문항의 질문에 답을 적어 손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향성명서에는 자신이 걸어온 길과 사상의 고백, 참회, 새로운 각오를 작성한다. 대략 예시를 들어 보면 '김일성과 공산주의자에게 속아 왔다.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에 놀랐다.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겨 반공용사로서 반공 제일선에서 몸바쳐 투쟁할 것을 선언한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향성명 발표회가 열리고 비전향 장기수나 일반 재소자들 앞에서 이 성명서를 낭독한 뒤 교도소 내 방송에 내보내는데, 특별한 경우 이를 대북방송에 싣기도 했다.
또 사상전향위원회는 위원장인 교도소장을 비롯해 각 과장, 공작반장, 중정 대구지부 담당 정보부원 한두 명으로 구성되며, 매달 열렸는데 사실은 중정 부원이 그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심사회에선 '정말 전향했는가', '동지를 배반할 수 있는가' 등을 중심으로 질문을 했다.[3]

3. 역사


사상전향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1933년부터 일제가 일본 내 사상범들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석방을 조건으로 덴노에 대한 충성을 강요함을 골자로 한 '사법당국통첩'에서 비롯된다. 1936년에는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이 제정됨에 따라 명문화되었다.
1945년 8.15 해방 뒤에는 잠깐 무력화되었다가 좌우익 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반공통치를 강화하려 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949년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보도구금(제12조)'[4]이 규정되어 부활했다. 그리고 6.25전쟁 뒤인 1956년에 법무부 장관령인 '가석방심사규정'이 제정되어 공식적으로 법제화되었다.
이후 사상범의 전향 여부는 당국의 주요 관심사항이 되었고,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으로 인해서 '좌익수형자 동태 조사 보고에 관한 건(1956. 4. 6.)', '공산주의 포회(抱懷) 수형자의 교정교화에 관한 건(1958)'이 추가되어 사상전향제도가 더욱 강화되었는데, 4.19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에 사상전향제도는 무력화될 뻔 했지만, 장면 정권도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하지 않았고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사상전향제도는 다시 강해지게 되는데 이후 '좌익 수형자 사상전향 심사방안(1969)' 등의 예규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특히 '좌익 수형자 사상전향 심사방안'의 경우, 비전향수를 상대로 하는 반성 촉구, 전향공작, 공작 결과 및 동정 파악, 전향심사, 전향문 발표 등 5단계의 공작방안을 시달한 뒤 그 단계별 조치까지 세세하게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사상전향이 하나의 폭력적 방법으로 쓰인 것은 박정희 유신정권부터였다. 1972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집권을 목적으로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패퇴하고 월남이 패망하자 위기감을 고조시켜 시국을 준전시로 규정해 유신체제 비판을 금지하고 반체제/반정부 운동의 말살을 기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시인 반공의 근본에 도전하고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포함된 비전향 정치범들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1973년 6월부터 대전, 광주, 전주, 대구 4개 교도소에 '사상전향 공작반'이 설치되어 전향공작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법(현 국가정보원법)에 따라 중정은 조정권을 지니고 타 기관들을 조정(명령,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도소 역시 중정의 조정을 받았다. 실상은 교도소가 정치범을 수용, 관리하지만 정치범에 대한 정책 결정권은 중정이 쥐고 있었다. 전국의 주요 교정시설(감옥)에는 중정,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국 담당자가 있어 상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결 정치범에 대해선 조사와 공소 유지를 위해 공갈 협박을 했으며, 기결수에 대해선 정보 수집, 조사, 역공작, 관리[5]를 했다. 당시 사상전향 공작도 대 공산주의/대 북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하나로서 중정 대공심리전국 통제 하에 있었다.[6]
그러나 위와 같은 유신독재 시기의 혹독한 사상전향 공작과 잔혹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정치범이나 장기수들의 집단 단식을 통한 저항, 비인간적인 폭력 소식이 바깥에 알려지면서 전향 공작이 다시 누그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이 1979년 12.12 사태로 정권을 잡은 뒤 또다시 사상전향의 강제와 폭력이 기승을 부렸다. 그런 와중인 1982년에 광주교도소에서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 중에 사망한 박관현 사건이 터지면서 또다시 느슨한 적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또한 안기부, 보안사, 경찰 대공라인 등을 총동원해서 사상전향제도를 잘 활용했던 정권이기도 하다.
1987년 6월 항쟁6.29 선언 뒤 사회가 민주화되고 교정시설 내 인권상황이 석방된 시국사범(양심수)들의 입을 통해 폭로/공개되면서 더 이상 과거의 폭력적 방식으론 더 이상 사상전향 공작을 실시하기 어려워졌다. 1990년대 들어서 비전향 장기수들이 서서히 석방되고 1993년 이인모의 사례처럼 일부는 북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의 노태우 정권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의 안보이슈와 임수경 방북 사건,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문익환 방북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의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사상전향제도를 폐기하지 않고, 경찰과 안기부, 보안사를 동원해서 제법 사상전향제도를 이용했으며 군사정권과 권위주의가 끝난 후의 김영삼 정권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같은 안보이슈와 남매간첩단 사건, 구국전위 사건,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 혁사노 사건,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 고영복 고정간첩 사건 등 공안정국이 연이어 터지면서 사상전향제도를 폐기하지 않고 역시 경찰 대공라인과 안기부, 기무사 등을 동원해서 사상전향제도를 그대로 두면서 이용했었다.[7][8] 그렇게 논란이 많던 사상전향제도는 1998년 7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어 '준법서약제도'로 변경되었지만 국가가 가석방을 조건으로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의사표현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사상전향제와 유사성을 지녔다.
그러나 사상전향제의 후신인 준법서약제도 역시 헌법 19조에서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본질적 내용의 침해이며,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대한 국제인권규약' 제18조의 규정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나, 김대중 시기 들어 대다수의 시국사범이 석방되고, 극악한 폭력적 방식이 더 이상 쓰이지 않아 준법서약제는 유명무실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잊혀져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3년 7월 7일 법무부정책위원회에서 폐지 결정을 밝히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준법서약제도까지 폐지되었다고 해서 시국사범들을 통제하는 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데,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제도가 모두 폐지되면서 그 이후에는 보안관찰법 일부 조항이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제도가 했던 것들을 이어받고 있는 듯 하다. 과거 사회안전법의 후신인 보안관찰법은 사상전향제도나 준법서약제도의 보조도구에 불과했었으나 그게 사라진 후로는 보안관찰법이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제도를 대체한 시국사범들의 동향을 통제하는 새로운 법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자면 사상전향제도와 준법서약제도가 모두 폐지된 이후에는 조건 없이 가석방을 시켜주는 대신에, 보안관찰법을 통해서 시국사범들의 동향을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상전향제도나 준법서약제도의 잔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보안관찰법 또한 찬반 논쟁이 치열한 편이다.

4. 출처



5. 기타


야인시대에서 애매하지만 그 유명한 심영 습격의 마지막도 김두한 일당이 심영을 전향시키는 장면인데[9] 간단하게 심영의 서명을 받으면서 공산당을 탈퇴시키지만 열혈 공산당원이던 심영에게 엄청난 굴욕을 안겨준다.[10] 이외에도 일부 좌파계열 인물들에게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사상전향을 이용하고 다녔다.

6. 관련 문서



[1] '가석방 심사 등에 관한 규칙' 자체는 2008년 형집행법 시행규칙 제정으로 폐지되었다.[2] 원 출처: <사상범 전향제도의 합법성 여부에 관한 연구> 홍경령.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 석사학위논문. 1990. p9~11.[3] 원 출처: <서승의 옥중 19년> - 서승 저. 역사비평사. 1999. p150~151.[4] 법원은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피고인에 대하여 형의 선고를 유예하는 동시에 피고인을 보도구금에 부할 수 있다. 단 사형 또는 무기로써 처단하여야 할 경우는 제외한다.[5] 여기서는 인질로서 또는 비상시 처분을 위한 것을 의미한다.[6] 원 출처: <서승의 옥중 19년> - 서승 저. 역사비평사. 1999. p150~151.[7] 영화 1987의 선역으로 나오는 안유 계장도 실제로는 90년대에 비전향 장기수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는데, 그런 점에서 민주화 이후에도 사상전향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8] 이런 걸로 보자면 사상전향제도-준법서약제도는 민주화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점에서 보호감호와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9] 여기서 김두한의 유명한 대사 중 하나인 '''"공산당 할 거야? 안 할 거야!?!?"'''가 나온다. [10] 김두한 일당은 심영 관련 뿐 만 아니라 그 이전에 일어난 국군준비대 습격 사건 당시에 전향서를 받아낸 적이 있었고 심영 피습 사건으로 부터 시간이 지난후에 일어난 정진룡 살해 사건 당시에도 조선청년전위대 대원들을 고문하면서 전향서를 쓰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