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하브파
1. 개요
아랍어: سلفية وهابية (Salafiyya Wahhābiyya)
이슬람의 종파 중 하나. 정확히 말하면 수니파의 한 분파이며, 번역에 따라 '와하비파'나 '와하비즘'이라고도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기반을 두었으며, 현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근원''' 중 하나이다. [1]
이슬람 수니파의 주류 종파 중 가장 근본주의적인 종파. 해당 종파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이슬람이 아닌 다른 문화나 사상들을 극도로 배격하며 지나치게 수구적인 태도를 보인다. 물론 수구성 때문에 아랍권에서도 많이 까이는 사상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두 성지의 수호자 타이틀을 다는 데다가 돈도 많기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수구적인 이슬람 이념을 퍼트리고, 돈이 궁한 테러리스트나 보수적인 학부모들이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확산세가 빠른 반면 무조건적인 수구 성향 퍼트리기에 대한 반발도 사실 약하진 않아서[2] 이슬람권에서는 보수적인 국가와 진보적인 국가간 문화 전쟁이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중이다.[3]
2. 기원
일단 역사적으로는 18세기 신학자였던 무함마드 빈 압둘와하브(محمد بن عبد الوهابا، 1792~1703)가 주장하고 시작한 이념이다. 사실 와하비즘의 진정한 원류라고 불릴 수 있는 사상은 13세기의 이슬람 신학자였던 이븐 타이미야의 과격한 이슬람 교리 해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사람은 공격적인 성향으로 유명한 한발리파 율법학자로서 13세기 몽골 제국의 이슬람 침공 이후 이슬람권 학계를 주도했던 인물로, 당시 이슬람권의 나라들이 몽골 침입을 받고 무너진 이유는 이슬람이 올바른 길(=이슬람 근본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수피즘을 신봉했던 튀르크족에 대한 아랍인들에 반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극초기 이슬람의 특성들(살라프라고 불리는 초기 무슬림들의 행적)을 지나치게 신봉하고, 쿠란과 하디스에 대한 과격하고 근본주의적인 해석을 주장하면서 샤리아를 매우 엄격하게 집행하는 칼리프제 신정국가의 수립과 시아파에 대한 박해를 대놓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에 충공깽스런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비무슬림에 대한 이븐 타이미야의 관점은 그 당시 다른 무슬림 신학자들에 비해 온건'''한 편이었다고 한다. 쿠란의 2장 256절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라는 문장을 오늘날의 종교의 자유의 개념과 흡사하게 해석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에게 종교를 강요하면 안 된다는 논문을 쓴 것도 그였다. 중세에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구절을 그저 과거에 폐기된 명령으로만 간주하는 해석이 우세하던 상황이었다. 비무슬림에 대한 박해나 강제 개종을 주장한 적은 없고, 대신 갈등이 심해질 경우 추방 정도를 제시하는 정도였는데, 14세기 당시로는 특별히 극단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이븐 타이미야가 극단주의의 뿌리로 알려졌던 이유는 중세 이슬람 신학 서적들이 아직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 영어로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 점이나 한발리 학파 외에 다른 이슬람 신학 서적들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잊혀진 탓이 크다.
이븐 타이미야는 성격이 급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시아파, 알라위파에 대한 노골적 증오심과 비난을 대놓고 표출하며, 이들을 모두 한데 묶어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보다 더 사악한 자들로 지하드를 통해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5] 또한 맘루크 왕조와 전쟁 중이던 일 칸국의 몽골계 무슬림들이 진정한 무슬림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이들에 대한 지하드를 정당화하였다. 이는 후대에 지하드와 타크피르 역시 일반 무슬림일지라도 정상적인 판단력만 있다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해석되었다. 현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의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해준 셈이다.
이븐 타이미야 한 명을 딱 찝어서 만악의 근원이라고 정의하기도 뭐한 게, 그 당시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가 중에서 "'''당대의 이슬람 의학은 지나치게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폐기되어야 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가르쳐준 민간요법 이외의 의학은 하람으로 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던 자들도 있었다는 것. 이븐 타이미야와 그의 제자들이 바보는 아니라서 적당히 하디스에 나온 민간요법만 눈치껏 책으로 편집해서 내면서, 이슬람 의학 관련해서는 '''아무''' 의견을 내지 않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6]
이븐 타이미야는 당대 이슬람 국가들의 정권 지도부들이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리아와 이집트의 지도층과 큰 마찰을 일으켜 감옥에 15년이나 있기도 했다. 말년에는 비이슬람 유적들과, 심지어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에서 시아파들이 예배드리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유적지에 사람들을 홀리게 하는 일종의 우상숭배라면서 파괴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7] 이는 나중에 와하비즘과 살라피즘의 각종 문화재 파괴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다. 이븐 타이미야는 1328년에 죽었지만, 그 제자들[8] 과 그의 저작들은 꾸준히 이어진다. 다마스쿠스, 카이로 등의 샤피이 법학파 학자들도 이븐 타이미야의 저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와하브파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싫어하는 것과 다르게, 이븐 타이미야는 알 가잘리를 비롯한 이슬람 사변 철학에 대한 지식도 있었고,[9] 공격적인 논파 방법이 유명했다. 이 때문에 샤피이 법학파 학자들이 이븐 타이미야의 저작을 종종 참고할 때가 많았다.
'''이븐 타이미야의 영향을 받은''' 학자 중 한 명이었던 이븐 카시르는 성경과 꾸란, 하디스 및 과거 이슬람 역사서들을 편집하여 방대한 분량의 이슬람 역사서 및 '''쿠란 해설서'''를 출간해서 히트를 쳤다. 이븐 카시르의 이슬람 역사서는 천지창조, 예언자들의 이야기와 미래의 심판에 날에 대한 서술까지도 포함한다. 물론 그의 이슬람 사상관은 이븐 타이미야에서 전수 받은 것. 결국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은 18세기의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하브에게 '''직접''' 이어지게 된다.
17~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서는 카디자드파라는 와하브파의 기원이 되는 근본주의파들이 득세하여 다른 무슬림들과 몽둥이 및 칼을 휘두르며 패싸움을 벌였는데, 이들은 이븐 타이미야가 한 말 중에 "아랍어 이외에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선이다."[10] 라는 말을 써먹으며 무슬림들이 통역관으로 일하지 못하도록 적극 방해하였다. 이 사람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통역관들은 파나리오테스 그리스인들과 세파르딤 유대인 중에서 주로 충원되었다. 이미 와하브파의 기원 카디자드파부터가 무슬림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퇴보시키는 상황이었다.
무함마드 빈 압드 알 와하브가 이븐 타이미야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우드 가문과 함께 와하비즘을 창시할 무렵은 오스만 제국의 힘이 서서히 쇠락하던 시기였다. 심지어는 인구가 정체에서 감소세로 줄어들었다. 반면 유럽은 같은 시기에 인구가 폭증하고 국력, 경제력이 급속히 강해져 퇴물이 되어가는 오스만을 필두로 한 이슬람권을 역전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세계에서 맹주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오스만 제국이 사회가 노령화되고 활력이 떨어지며 제국을 구성하는 집단은 뿔뿔이 분열되었다. 바스라에서 공부하며 당시 부패한 오스만 제국에 환멸을 느낀 압둘 와하브는 "쿠란의 본위로, 무함마드가 있었던 그 시대로 돌아가자" 하고 주장하며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을 시작한다.[11]
사실 압둘 와하브는 경전을 그냥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학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에서 사우드 가문(이븐 사우드)이 와하브에게 관심을 보임으로써 와하비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최초 사우드 가문은 외진 곳의 한미한 가문에 불과하였다. 사우드 가문에게는 강력한 사상적 명분이 필요했고, 압둘 와하브는 자신의 주장을 지원하는 세력이 생긴 셈이다.
이슬람은 각 지역마다 특성이 다른데, 그 당시 도시 지역의 오늘날의 고정관념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이슬람은 무척 개방적[12] 이었고 자유주의적이었다. 사우드 가문은 이슬람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폭력적인 샤리아와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요하고, 그 당시의 주류 이슬람을 비판하였다. 19세기 중반 사우드 가문은 아라비아 중부를 복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파는 1801년에 시아파의 성지인 이라크 카르발라를 점령하고 5천명이나 되는 시아파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이 시아파 학살에 대해 당시 역사학자였던 우스만 이븐 바시르 알 나자디는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와하브파는 18세기 중반 나즈드 지역에서 탄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중부에 위치한 나즈드 지역은 리야드 시, 카심 주, 하일 주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변두리 취급을 받던 곳이다. 이러한 지역을 원산으로 하여 탄생한 종교적 개혁 운동인 '''와하브파는 결코 반식민주의 운동이라 볼 수 없다.''' 사실 최초의 와하브파 교인들은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가 무슬림 영토의 깊숙한 곳까지 얼마나 빠르고 깊이 침투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 이븐 와라크
때문에 시아파, 특히 이라크 시아파와 이란에서는 지금도 사우디에 대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원수지간이다. 사우드 가문은 1805년에는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까지 정복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커지자 당대 이슬람 세계 최대의 세력이자 칼리프를 칭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 지역의 안정을 위해선 하루 빨리 위험 세력인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파를 정리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1811년 오스만 제국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이집트 태수였던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자신의 군대를 아라비아 반도에 파견해 1818년 겨울까지 아라비아 반도의 와하브파 준동지역을 모두 수복했다. 그리고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이븐 사우드의 손자를 생포해서 이스탄불로 끌고 가 심문하고 참수해버렸다. 그렇게 사우디 왕국은 끝나나 싶었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망해버리자 권력 공백 상태에 빠진 아라비아 반도의 상황을 이용해 사우디 왕족들은 다시 나라를 일으켜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며 다시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메카를 다스리던 헤자즈 왕국[14] 도 무찌르고 이슬람교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도 손에 넣었다. 결국 그렇게 와하브파를 이념으로 1932년에 다시 세워진 나라가 현 사우디아라비아이다."우리는 카르발라를 점령하고 살육을 벌였다. 카르발라의 주민들을 (전리품과 노예로) 삼았다. 알라께서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불신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들도 비슷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13]
이슬람은 움마라는 종교 공동체 조직을 통하여 정치적 논의와 결정을 행한다. 교회에 정치가 결합된 형태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사우디는 아라비아 반도를 와하비즘의 영역으로 통일하였다. 하지만 와하비즘이 당장 중동권에 영향을 크게 끼친 것은 아니었다. 당대 중동을 쥐락펴락하던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랍민족주의와 아랍사회주의가 주류 사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사우디는 와하비즘을 내세웠을 뿐이지 당시 여타 중동 왕정들처럼 서방에 줄을 선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만 엄격할 뿐이고 실상은 서방에게 줄을 선다''''면서 비웃음 받는 처지였다.[15] 사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 초반까지도 서방에서는 와하비즘을 위험시 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아랍사회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훨씬 위험한 사상으로 보았고, 실제로도 시리아, 이집트, 리비아, 이라크, 북예멘 등에서 아랍민족주의를 내세운 정권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아랍 민족주의는 중동 전역에서 큰 영향을 행사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집권하면서 아랍사회주의와 아랍민족주의의 대부를 자처하던 이집트가 경제 성장의 실패와 이스라엘과의 화해 노선 천명으로 중동 전역에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반대로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 사정이 급속히 윤택해진 사우디 아라비아가 막대한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이래저래 돈을 많이 쓰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사우디가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와하비즘의 영향 또한 커졌으며, 현재 우리가 가진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와하비스트들과 그 과격한 양상, 그리고 생활양식들이다.
3. 포교와 확장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가문과 카타르는 땅에서 채굴되는 자금력으로 각종 영상물을 제작하고 돈을 기부하며 사원을 건립하는 등 이슬람 근본주의를 전파한다. 파키스탄에서는 아프간 전쟁의 여파와 독재 정권의 보수 세력을 후원하기 때문에 세가 불어났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과거에는 온건 이슬람 지역으로 분류되던 국가들에서도 와하비즘 세력이 급속히 침투하여 테러리즘과 극단주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게다가 아프간 전쟁 이후에는 이집트와 사우디를 중심으로 와하비즘보다 한 단계 더 극단적인 종파인 살라피즘이 등장했다.
정작 중세 이슬람 황금기의 이슬람 사변철학 관련한 서적들은[16] 아랍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책조차도 일반인 입장에서 구하기 힘들며, 이슬람 신학 및 교육 관련한 서적들의 출간 및 보급이 대부분 걸프 산유국에서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대부분의 와하비즘 성향의 이슬람 선교 책자들은 개신교 극단주의 선교사들의 오류와 사건을 까는 내용을 다루면서, 이슬람의 상식적인 부분과 개신교 선교사들의 단점을 비교한 후에 자신들의 프로파간다가 무오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은근슬쩍 이슬람 근본주의를 끼워넣는다. 인문학 관련한 교양이나 비판적인 글 읽기 등을 배우지 못한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선교 책자를 보면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오하다는 이미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4. 사상적 기원: 한발리 학파
와하브파가 율법에 충실한 이유는 꽤 단순하다. 그 사상적 근원이 수니파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한발리 학파기 때문이다. 수니파에서는 샤리아, 즉 신법을 현실에서 실행하는 문제에 있어 몇 가지 법학 해석을 내놓았고, 최종적으로 정착한 4가지 법학파가 있다. 하나피 학파[17] , 말리키 학파[18] , 샤피이 학파[19] , 그리고 한발리 학파. 가장 관용적인 학파는 하나피 학파이고 메카의 전통에 가장 충실한 학파는 말리키 학파, 하나피 학파와 말리키 학파 사이에서 가장 중용을 잘 잡은 학파는 샤피이 학파. 그리고 그리고 가장 율법에 충실한 건 한발리 학파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를 제외하고는 한발리 학파를 따르는 지역은 원래 없었지만 1980년대 바트당이나 나세르주의 등 아랍민족주의, 아랍사회주의가 쇠퇴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코소보 전쟁, 파키스탄 독재 정권의 보수파 지원 등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와하비즘이 완강히 퍼졌다.
한발리 학파의 시조 아흐마드 빈 한발(أحمد بن حنبل)은 사실 법학자가 아니라 무함마드 언행록(하디스) 전승 학자였다. 한발리는 무함마드의 모범을 따라 살고자 하디스를 철저하게 연구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하디스를 모아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사고방식이 좀 꼬여서... 지나칠 정도로 극단 근본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이런 인물의 사상을 이어받은 한발리 학파 법학자들도 다른 법학자들과 비교해서 매우 수구적이었다. 한발리 학파의 율법해석은 사실 기독교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일단은 이슬람 경전과 무슬림들의 행적(쿠란, 하디스, 초기 살라프들의 전승록)을 기반으로 하니 원칙적으로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교조주의적이고 융통성이라고는 없다.
이슬람의 역사는 외부적인 팽창과 더불어 이런 '''근본주의자'''들과의 투쟁의 역사를 겸하며, 후기에 이르면 종교 지도자 인 칼리프가 아닌 세속 지도자인 술탄이 주요 실권자가 됨도 이 때문이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서방과의 교류 필요성도 있어서 대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세속적인 국가를 지향했고, 종교 근본주의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발리 학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한발리 학파가 완화되어서가 아니라 당시 부패한 권력층과 결탁해서였고, 와하브는 이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와하비즘의 본산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현재 부패의 전형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5. 교리와 성향
와하브파는 같은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극도로 수구적이고 전근대적, 극단주의적인 교리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며, 이에 대한 논란과 비판도 많다. 대표적으로 이들의 샤리아 해석과 교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1. 극단적인 유일신론( توحيد, 타우히드)
원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모두가 유일신론을 믿으며, 신은 오직 한 분임을 고백하고, 다른 종교나 다른 신, 이교도 종교 풍습을 따르는 것을 우상숭배로 금지하는 것은 다 똑같다. 와하브파에서는 이를 지나칠 정도로 극한까지 추구해 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신의 말씀인 쿠란과 하디스, 그리고 샤리아만을 따르는 건 당연하고, 나아가 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교도들이 세운 정부나 권력, 심지어 (본인들의 기준으로) 부패한 이슬람권의 권력들까지도 우상숭배자(شرك, 시르크)로 간주한다. 즉 창설자 와하브가 살던 당시 아라비아의 권력을 타파할 대상으로 봤던 셈. 당연히 기존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와하브 운동으로 건설된 와하브 왕국은 결국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졌으나, 그 뒤로 끈질기게 투쟁한 끝에 1927년 독립을 얻었다. 이것이 현대의 사우디아라비아이다.
무슬림이라도 이슬람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무쉬리킨(=우상숭배자, 위선자, 거짓 무슬림)로 간주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이슬람 국가들이 서방의 민주주의와 이슬람주의를 적절히 섞어서 법을 구성하기 때문에[20] '''와하비즘에 의하면 터키, 시리아, 이란,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 절대다수의 이슬람권 정부들은 처단 받아야 할 이교도 정부가 된다(!)''' 이들 와하비즘 성향 무슬림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막나가는 일부는 와하비즘의 총본산인 사우디 아라비아 왕실까지 이교도로 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교도 국가들을 정복했던 무함마드와 초기 이슬람 지도자들의 행적을 따르지 않고, 사악한 이교도 국가 지도자(미국이라거나...)들과 동맹 및 협정을 맺거나 와하브파 신학자들의 극단적 주장을 따르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는 절충해서 국정에 반영하기 때문[21] 에 우상숭배자라는 것(!) 이러한 논리를 적극적으로 따라 사우디 왕실을 적으로 돌리고 테러리스트가 된 인물이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현 지도자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
최근 ISIL이 이라크와 시리아, 리비아 등에서 준동했을 때, 이들이 내세운 '자신들이 아닌 전 세계의 정부와 국가들이 적' 이라는 주장에 황당함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이는 이들이 이러한 와하비즘 내지는 살라피즘적 유일신론 논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자칭 이슬람 칼리프 신정국가'(IS 조직)를 제외하면 모든 국가들과 사회 공동체들이 우상숭배 집단이자 지하드를 통해 섬멸하고 정복, 노예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신봉했기 때문에 전 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는 미친 짓을 했던 것이다. 단, 사우디의 경우는 정당한 이슬람 공동체의 기준이 자신들의 정부(사우디 왕국)일 뿐이고, ISIL의 경우는 '자칭' 칼리프 제국일 뿐이다. 즉 와하비즘은 '''이슬람과 타 문명권의 공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슬람이 아닌 다른 국가적 요소, 예를 들면 민족주의라던지 국가주의, 애국주의 역시 이단시한다. 이슬람이라면 단 하나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만이 존재하고, 이 외적인 요소는 모두 우상숭배라고 보는 것. 많은 와하비 율법학자들은 애국가처럼 공공적으로 국가를 노래 부르는 것조차 이단시하며, 와하비즘 신학을 철저히 따르는 ISIL이 시리아-이라크에서 세력을 잡았던 시기, 모든 아랍 민족주의적 교육, 서구적 국가관 자체를 부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와하비즘적 교리를 따르는 이슬람 무장 조직 보코 하람이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점령했을 때, 수괴인 아부바카르 셰카우가 "이곳은 나이지리아 정부와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다"고 선언했던 것도 이런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교리를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과격성 때문에 20세기 중엽까지는 와하비즘이 널리 퍼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바트당이나 나세르주의 등 아랍사회주의가 훨씬 더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아랍 사회주의가 서서히 몰락하고 이후 사우디의 오일 머니에 힘입어 전세계로 전파되어 전 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또 다른 와하비 국가인 카타르도 마찬가지로 사우디 다음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카타르 인구가 몇십만 명에 불과함을 고려한다면 비정상적일 정도로 수치가 높다. 미국 등 서구권에서 카타르 정권과 알 자지라를 안 좋게 여김은 결코 단순히 편견이나 선입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여러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타르의 이슬람 극단주의가 오히려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더 악질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1993년 이후로는 정부 차원에서 자유주의를 밀어주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사실 1990년대 이전에는 나름대로 보수적인 국가로 행세했던 상황이었다. 오히려 영토 분쟁으로 으르렁거리는 이웃 바레인이 카타르보다 월등하게 사회적 분위기가 자유롭다. 바레인/경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자원 부국이 아닌 바레인은 카타르보다 인재 발굴에 나서 수많은 여성들이 경제 중직을 맡으며 사회적으로도 자유롭게 생활한다.
5.2. 지나치게 가혹한 우상숭배 금지 교리
와하비즘에서는 이슬람권의 우상숭배 금지 교리를 엄청나게 엄격하게 해석하여, 우상숭배의 모든 기회도 금지한다. 대표적으로 어떠한 '''사람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지'''하며(반면 자연물체나 자동차 같은 인공물체 등은 허용한다고...) 특정 인물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집이나 공공장소, 또는 밖에 걸어두는 것도 우상숭배라며 금지한다.[22] , 더 막 나가는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아예 사람의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나 겨울에 눈사람을 만드는 행위도 우상숭배라며 금지하는 정신 나간 파트와(율법 해석)을 내기도 했다.
마찬가지 논리로 영화나 드라마, 사람을 묘사한 애니메이션 상영도 죄악으로 금지한다. 때문에 와하브파 교리를 엄격하게 따른다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관람하거나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나 예술 작품을 구경하는 것들, 집에서 애니나 드라마, 유튜브 방송 등을 시청하는 것, 사진전에 가서 다른 사람을 찍은 인물 사진을 구경하는 것은 모조리 우상숭배의 죄가 된다(...) 또한 게임도 거의 대부분 금지하는데, 대표적으로 최근 율법 해석 중엔 '''포켓몬고는 이슬람에 위반되므로 플레이하지 말라는 명령'''도 있었다.[23][24] 최근 사우디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으로 영화관과 음악 공연 등이 제한적으로 허가되었는데, 극도로 원리주의적인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이것도 죄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와하브파는 죽을 때 무덤에 묘비나 비석 조형물 등을 세우는 행위도 우상숭배라고 금지하며(...) 사우디 국왕의 무덤조차도 묘비도 아무것도 없다. 또한 초기 이슬람 유적들을 존숭함도 우상숭배로 이어진다는 이유로 나쁘게 본다. 그래서 사우디 치하에서 날아간 초기 이슬람 유적들도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 이슬람 유적들에 대한 파괴 선동은 사실 와하브파가 등장하기 수백년 전의 이븐 타이미야 같은 이슬람 신학자들도 주장한 내용이다. 와하비파 신봉자들이 많은 ISIL에서 메카의 카바 신전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이슬람권(+기독교, 유대교권)의 중요 예언자 중 하나인 유누스(요나)의 무덤을 폭파한 것은 절대로 '''그냥 심심하거나 파괴를 즐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사우디 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국가가 인정한 대 이슬람 학자)도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무함마드의 무덤!)를 파괴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여러 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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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파괴된 아미나(Aminah bint Wahb)의 무덤. 아미나가 누군고 하니 바로 '''예언자 무하마드의 모친'''이다.[25]
이러한 와하브파와 율법주의적 교리에 정신이 나간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의 무덤 파괴 현상(...)에 대해 시아파인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즈랄라는 레바논의 지지자 대중 연설에서 "무덤이나 파헤치고 폭파하는 야만인들"이라는 식으로 분노를 표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5.3. 샤리아 강요와 비무슬림에 대한 증오 선동
와하비즘은 극단적으로 엄격한 샤리아 해석을 통한 종교법을 집행하며, 와하비즘을 기치로 내건 국가나 단체(사우디, ISIL, 알 카에다 및 이슬람 극단주의 공동체)들은 현대 인권을 말살하는 샤리아 통치로 전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또 이들은 비무슬림에 대한 필요 이상의 맹렬한 증오심을 퍼뜨리기도 한다. 와하브파에서 출간하는 쿠란에는 종종 주석으로 이교도(기독교도와 유대교도)에 대한 폭력적 싸움을 선동하는 구절을 대놓고 달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문제는 해당 주석들이 하디스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닌 다소 작의적인 해석에 바탕을 둔 부분이 많아서 이슬람 교리에도 어긋나, 심지어 같은 수니파 무슬림들에게서 이단이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고.
게다가 시아파와 수피즘 등 다른 이슬람권 종파에 대한 증오심도 장난이 아니다. 와하브 운동 당시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시아파 신도들을 무참히 학살하는데 와하브파 무슬림들이 앞장섰으며, 현재도 시아파와 이란에 대한 종교적인 반감이 장난이 아니다. 현 사우디 왕국의 그랜드 무프티(국가 공인 율법학자)인 셰이크 압둘아지즈 이븐 압둘라 알 아쉬가 "시아파 '''이란인들은 무슬림도 아니며, 조로아스터교 마법사(Magi)들 같은 이교도들'''"(!)이라며 공개석상에서 비난을 퍼붓는 것은 뭐 흥분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아예 민속 이슬람이나 수피, 시아파들을 정령숭배자나 무신론자만도 못한 이교도라고 극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한 2012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기독교 교회와 성당들을 모조리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사우디 밖의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폭풍 까임을 받은 적도 있다. 유럽의 가톨릭계에서부터 터키의 원로 이맘까지 이런 주장은 종교간 평화를 박살내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5.4. 심각한 여성차별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여성이 히잡 정도를 쓰고 옷을 정숙하게 입으면 혼자서도 밖을 돌아다니고 활동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보나, 와하브파는 여성은 히잡도 아니고 무조건 니캅 또는 부르카를 입어야 하며, 남성 보호자(마흐람, 남성 가족 혹은 친척이나 배우자)와의 동행 없이는 밖에 나가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이슬람 원리원칙에 충실해서라기 보다는 여성의 복장과 순결을 부족의 권위와 연관짓는 고대 유목민의 관습과 '''과시욕'''에 충실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여성의 사회 활동에도 극도로 부정적이다. 또한 이집트의 와하브파는 반인권 행위인 여성할례를 이슬람적인 관습으로 칭송하며, 적극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집트의 와하브파들은 '''콥트교 신도들을 지옥이 예정된 불신자라고 욕하면서도 정작 걸프 와하비야 국가들도 안하고 콥트교 신자들이 인습적으로 행하는 여성 할례는 옹호'''하는 모순을 보인다. 이렇게 '''와하브파 무슬림들은 여성의 의상이나 처녀성 등을 남편의 권위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일상생활과 공공장소, 공식 석상을 막론하고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악수하는 것'''조차도 와하브파에서는 금지한다(!) "혼인 관계나 가족이 아닌 남성과 여성은 어떤 신체 접촉도 하지 말라"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지키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리 중인 여성이 쿠란을 만질 때는 맨손으로 절대로 만져서는 안 되며, 항상 장갑을 끼고 만져야 한다는 것도 와하브파 성직자들의 가르침이다.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시도때도 없이 여성차별적인 언사와 종교 해석들을 내놓기로 유명하다. 사우디 성직자, 여성이 성희롱과 간음 강간의 원인.
2011년에는 그랜드 무프티(대 율법학자)가 무슬림 여성(무슬리마)는 남녀가 섞인 공간에서 일할 수 없다는 율법 해석을 내려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율법 해석에 따르면 사우디의 무슬림 여성은 상점 계산원 같은 단순한 일도 남자들과 섞여 근무한다는 이유로 할 수 없다. 물론 사우디 정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있지만.
와하비즘의 니캅과 부르카 강요는 포교 시에도 예외가 없다. 프랑스 등지에서 새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가출 청소년 출신 무슬림한테 니캅과 부르카를 쓰기를 강요하고 사실상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도록 조장한다던지 하는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인다. 참고로 니캅과 부르카를 쓴 여성은 서유럽뿐만 아니라 웬만한 이슬람 국가에서도 서비스 업종 취직 시에 거의 안 받아준다. [26]
선교사의 강요에 순진하게 속아 넘어간 부르카를 쓰는 여성 개종자는 사회에서 심각한 따돌림을 당하는 와중에, 와하비즘 선교사는 개종자가 니캅 쓴 모습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자신의 개종 실적을 자랑하는 등 막장 면모가 많다. 물론 이런 무책임한 행동으로 개종 실적을 자랑하는 선교사는 벌을 받는 대신 오히려 막대한 후원금을 받아 이를 당연하다는 듯 착복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5.5. 무슬림이라면 악한 통치자라 해도 복종할 것
와하브파의 정치관은 그야말로 중세 혹은 파시즘 그 자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가치관으로 악명이 높다. 와하브파에서는 11세기의 무슬림 신학자인 알 가잘리의 율법 해석을 따라 아무리 폭정이나 악한 행위를 하는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다면, 그 억압을 묵묵히 참으라고 가르친다. 일명 이슬람 신앙을 가진 악한 통치자의 억압이 비무슬림 통치 하의 종교적 혼돈보다 낫다는 가치관. 이는 원래 과거 셀주크 제국 시절에 아랍인/페르시아인들이 튀르크인 통치자들에게 반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온 논리로, 당시에는 괜찮은 해석이었을지는 몰라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비판과 조롱을 많이 받는 교리 해석일 뿐이다. 이런 허무주의를 따른다면, 아랍의 봄 같은 중동권의 정치 투쟁 역시도 아무 의미 없는 무가치한 행위인 것이다. 원래 율법과 종교 활동이 빡세기로 유명한 이슬람이지만 그래도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는 정의와 윤리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알라에게 권력을 위임 받은 지도자가 국민들을 괴롭히는 것에 대해 본인이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악행을 눈 감아주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행위다.
와하브파와 살라프파는 이 교리를 인정하는가 안하는가로 나뉜다. 살라프파 중에서 "무조건 우리편 아니면 다 불신자 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막장 이슬람주의 성향 혹은 "니캅 강요는 쿠란과 하디스에 근거가 없는 지역 문화이다."라고 소신대로 말했다가 사우디에서 쫓겨난 셰이크 알 알바니 같은 온건 성향으로 등등으로 나뉜다.
5.6. 비이슬람 종교나 관습에 대한 모방 금지
수구 성향의 와하비 극단주의 율법학자들과 설교가들은 '무슬림은 비무슬림의 관습을 따라하면 안 된다' 라는 하디스 및 샤리아의 규정을 지나칠 정도로 확대해석하여 지킨다. 대표적으로 영어와 비아랍어 교육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파트와를 내거나[27] , 군인들이나 경찰관들의 서구식 제복은 서양 기독교도들의 복식을 따라한 것이므로 금지한다는 파트와를 내지를 않나[28] , '''환자에게 병문안을 갈 때 꽃을 들고 가는 걸 금지'''하고[29] , 나쉬드나 자연 소리를 제외한 모든 '''음악을 금지'''한다.[30][31] 사우디아라비아 파트와 연구청에서 내놓은 율법 해석 중에는 이런 음악 금지 논리에 따라 휴대폰 벨소리를 음악으로 바꾸는 것도 금지한다. 이 명령은 ISIL에서도 똑같이 시행 중이다.
또한 담배를 금지[32] 하고, 축구 같은 서방에서 주로 하는 스포츠는 이교도의 운동 습관을 들여왔으므로 비이슬람적이므로 금지, 또는 이슬람식 전통 공차기 놀이(?) 수준으로 마개조해야 한다고 주장[33] 하는 등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슬람 교리 해석을 하기로 유명하다.
5.7. 현대 천문학 및 중세 이슬람 천문학(...) 부정
메디나 이슬람대학 부학장을 지냈고, 1993년부터 1999년에 죽을 때까지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대 율법학자)였던 와하브파의 거두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바즈는 1966년에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주장은 오류(!)''''라고 주장했으며, 1969년 미국의 달 착륙을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과학적 증거도 없이 "달에 인간이 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라는 파트와(율법해석)을 발표했다. 또한 "지구는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자기 발 아래에서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34]
당연히 이런 주장은 전 이슬람권의 비웃음과 비이슬람권의 반발을 샀다. '''지구 구형설 자체는 중세 이슬람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세 천문학이 점성술과 연관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중세부터 근본주의자 중 천문학을 이단시하는 경우가 있었다.[35] 참고로 이 와하브 율법학자는 1985년에 아랍 무슬림으로서 처음으로 우주 여행을 한 술탄 빈 살만 왕자와 만났는데, 술탄 빈 살만 왕자는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바즈 역시 세계가 원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것 같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36] 다행히도(...) 지구 구형설을 부정하는 와하브주의자들은 보코 하람마냥 주로 관심 끌려고 그러는 사람들로, 지구 구형설을 실제로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6. 현황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는 사치와 부패가 심한 편이며, 일반 국민들에게는 와하브파 교리에 따른 숨도 못 쉴 정도로 억압적인 중세적 샤리아 통치를 강요하기로 유명하다. 주변 아랍 국가들로부터 꼴통이라며 까임은 덤이다. 사우디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와하브파 이슬람 근본주의에 고분고분 순응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들도 사람이기에 내심 불만이 많기는 해서 간간히 종교 경찰을 조롱하는 등의 코미디쇼가 인기를 끌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종교 경찰과 가혹한 샤리아 율법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수시로 벌어지는 데다가, 기득권층이라는 왕실이 이슬람 율법을 강조한다면서 권력을 이용해 율법과 어긋나는 지나친 부패와 사치 행위도 서슴없이 해대니까. 그나마 사회 불만을 억제하기 위한 선심 정책의 일환으로 오일 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에게 집을 준다거나, 공공 요금을 싸게 책정한다거나, 자카트라며 수당을 주거나 하기 때문에 그런 대로 생활할 만은 했지만, 최근 불안불안한 유가 폭락으로 경제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이것도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2017년 이후부터는 늘어나는 왕족들의 사치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다는 기사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때문에 현재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 행보처럼, 사우디도 점차 시간이 갈수록 통제를 완화하려고 하는 추세다. 이미 21세기 초 압둘라 국왕 때부터 서구식 기술대학을 설립하고, 교조주의적인 와하비적 이슬람의 굴레를 벗으려 노력을 많이 했었다. 번번히 와하브파 율법학자들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어서 문제였지... 때문에 '''변화'''는 곧 사우디를 지배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며 두려워하는 와하브파 이슬람 신학자들과 왕실 지도부와의 보이지 않는 물 밑 갈등과 대립이 극심하다.
참고로 와하브파에서는 비주류 알코올에 대해서도 규제할 정도로 극도로 술을 금지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하는 교포의 증언에 의하면 눈치껏 집에서 틀어박혀 몰래 술을 마시면 그만이라고 하고, 돈 좀 있으면 술 마시기를 뭐라고 하지 않는 이웃나라 바레인에 가서 신나게 마시고 거기서 술 좀 깬 채로 오는 사우디인들도 많다. 여러 외신 취재에 따르면, 돈이 있는 사우디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로 주말을 이용해 바레인에 가서 신나게 놀고 술도 마시고 유흥을 즐기다 다시 사우디로 와서 경건한 척 위선 떨며 사는데 도가 텄다고(...) 한다. 그것도 아니면 좀 비싸긴 해도 사우디아라비아 고급 호텔에서 외국인들과 마시는 것도 막진 않는다.[37]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내에서도 대추야자술이라든지 옛부터 전해지는 술은 마시는 술도 많이 마신다. 거주하는 교포에 의하면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이 가끔 집에서 빚은 술을 마시라고 대접하는 경우가 있어서, 여기라고 술을 안 마시는 게 아님을 알았다고 한다. 다만 보란 듯이 길거리에서 취한 꼴을 보이다간 그땐 혼쭐난다. 더불어 대놓고 술을 가져오는 게 공항에서 걸리면 그것도 외국인도 용서하지 않는다. 2011년 어느 한국인이 팩소주를 상자째로 가지고 왔다가 사우디아라비아 공항에서 걸렸는데, 이걸 술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당연히 하나만 뜯고 냄새를 맡아본 공항 경찰이 아무리 봐도 술 냄새라고 화내자, 그 자리에서 마시면서 술 아니라고 객기를 부리다가 잡혀들어가서 회초리로 맞고 추방당한 실화가 있다. 기사 본문 하단.
이렇게 왕실과 부유층들을 위시한 상당수 사우디인들의 위선적 행보에 보수적인 와하브 학자들은 매우 분노하고 지속적으로 반발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왕가는 사우디 유일의 독재절대권력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최대 후원자라서 대놓고 뭐라고 하진 못하니 속으로만 분노하며 끙끙거릴 뿐이다. 사우드 왕가 입장에서도 손을 쓰기 애매한 것이, 와하비즘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이념과 같은 위치이기 때문에 함부로 손대기 어려울 뿐 아니라 종교계의 반발, 최악의 경우는 이란식 종교 혁명의 가능성까지도 있는 판이다. 그렇기에 와하비즘 자체는 장려하되 그 공격성을 사우디 내부의 부패나 문제점에 대한 고발보다는 지하드 선동이나 기독교, 유대교 등 타 종교, 타 문화권에 대한 증오심 선동으로 '''최대로 바깥으로 돌려고 시도하는 모양새'''이다. 종교계의 반발은 둘째치더라도 본격적인 개방화를 추구했다간 아랍의 봄처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사우디 왕가 자체가 뒤집혀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왕가 입장에서는 종교를 최대한 자기 편으로 끌여들여 '이슬람의 수호자' 타이틀을 얻어내 그나마 통치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현 상태를 유지함이 최선의 선택이다.
와하브파를 이용해먹는 사우디 왕실의 위선적 행보를 자세히 보면, 일단 국내 활동에 초점을 맞춘 테러 활동 및 테러 조직은 보안군을 동원해 철저히 탄압하고, 극단주의 방지라는 미명하에 테러리스트들을 풍족한 삶과 결혼, 돈으로 회유하며 테러리즘을 그만두게 설득하는 행위도 한다. '''그러나''' 사우디 외적으로의 이슬람 극단주의 지원이나 체첸,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전세계 해외 테러조직으로의 인적, 물적 자원 유입은 묵인하거나 오히려 물적 지원을 비롯해 대놓고, 또는 비밀리에 후원, 장려하고 있다..
9.11 테러 인원 중 80%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이란 걸 보면 알 수 있고, 오사마 빈 라덴 또한 와하브파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부가 수립되게 도와준 것도 파키스탄과 사우디의 합작이었고, 시리아의 알 누스라 전선(현 HTS) 계열 반군 단체를 '''사우디 율법학자들이 비밀리에 지원한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또한 알 누스라 전선 계열 반군의 테러리즘을 합리화하는 율법적 조언자 역할, 공개적 선전 역할을 하는 이슬람 신학자[38] 역시 사우디 출신 와하비 셰이크(학자)다. 체첸 과격 이슬람단체 등지에서 사우디에 지원 받은 유력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로힝야족 사태에서 미얀마 군경을 습격해 로힝야에 대한 보복성 제노사이드를 촉발한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 단체도 사우디에 위치한 로힝야 망명자 단체 출신 인물들의 지휘를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테러리스트의 50% 정도는 이 와하브파라고 보면 된다.
덕분에 지하드주의자들은 전 세계를 이슬람화시켜야 한다고 떵떵거리고 테러를 자행하면서도, 정작 사우드 왕가에 대한 테러는 그리 많지 않다[39] 다만 이건 앞서도 서술했듯 이런 유화책과 함께 철저한 소탕 방침에 의한 바가 크다. 오죽하면 ''''미국이 저XX들 언제 손절하고 페르시아에 손 벌릴까'''' 하고 궁리하는 지경이다.[40]
그 때문에 실제로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비즘은 상당히 변질되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종교계, 그리고 전국에 깔려있는 종교 학교들이 폭력적 지하드를 찬양[41] 하면서도 왕가에 대한 도전은 무엄한 것으로 치부하는 거의 어용종교에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9.11 테러 때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우린 그거랑 관계없다.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하고 말은 해두었지만[42] 국내적으론 테러리스트 찬양, 신의 천벌이 내려졌다고 좋아하는 분위기가 동시에 공존한다. 이 때문에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에서 음모론을 제시했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 산 돈으로 테러리스트를 훈련시켜 미국인들이 죽어나간 꼴이니...
물론 이 친구들보다 더 답이 없는 존재들도 있지만...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을 틈타서 그 친구들보다도 더 답이 없는 살라프파(살라피스트)가 뜨고 있다. 그리고, '''그 꼴통들의 정점'''은...
다만 살라피 자체가 와하브파와는 기원이 조금 다르지만[43] , 근본주의라는 점에서 서로 친화성이 강하다.
2016년 8월 그로즈니에서 열린 국제이슬람회의에서 모인 전세계 고위 수니파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와하비즘은 수니파 이슬람의 위험한 변형이고 원래의 가르침에서 일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이에 대해 사우디에서는 러시아-수피즘과 미국-시아파의 음모라며 발끈. 참고로 그로즈니 이슬람 회의는 이슬람권 외부에서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수니파 이슬람권 내부에서는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는데, 와하비즘 등의 극단주의 이슬람이 정통 이슬람의 가르침과는 틀린 가르침이라는 것을 수니파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테러리즘의 종식을 위해서 와하비즘과 결별하지 않고는 이슬람에 장기적으로 답이 없다는 것을 많은 무슬림들이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와하브파와 사우디의 입김과 자금력, 시아파에 맞서는 수니파의 맹주이자 성지의 수호자라는 명분 등이 전 이슬람권, 아니 전 세계에 너무나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공개적인 불만 제기도 잘 못하고 있다가, 결국 ISIL 등 이슬람 극단주의의 전세계적 창궐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맺고 있기에 이에 대해 성토의 목소리가 공식적으로 나온 것이다. 이슬람계 입장에선 과거에 비하면 꽤나 큰 발전.
[1] 사실 농담은 아니라 아랍권 TV 코미디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를 사우디가 제공해주다시피 한다(...) 물론 사우디에서 오일 머니를 이용해서 해외에서 들어오는 위성방송을 통제하고 싶어하지만, 사우디 영토가 너무 넓어서 일일이 통제할 수 없는 데다가, 위성방송조차도 막아버리면 재미 없는 사우디 국영방송이나 종교 방송만 보라는 말이라 반발이 거세서 별 수 없이 포기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사회 통제 정책은 계속해서 시행한다.[2] 사실 이건 아랍권에서 비종교적 위성방송이 매우 유행하거나 반극단주의 세력이 존재하는 등의 문화적 현상이 대한민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그나마 알려진 것이 카타르가 1993년 쿠데타 이후로 좀 더 자유주의 성향의 국가가 된 이후로 개국한 알 자지라에 대한 것 정도이다.), 무슬림 하면 무조건 테러리스트 지지자라는 이미지가 지배적이 된 점도 있다.[3] 사실 중동 국가에서 일어나는 테러는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축소판이자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4] 다른 종교를 증오했던 이븐 타이미야였지만,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이혼을 금지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본 듯하다. 이슬람에서도 이혼 허용을 좀 더 엄격히 해야 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5]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와하브파 학자들은 이븐 타이미야가 수피도 증오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븐 타이미야는 수피 교단과 친분이 있었다.[6] 이슬람 선교 책자에서 이슬람 중세 의학을 자랑하는 것 때문에 오해할 수가 있는데, 중세 이슬람 의학은 쿠란과 하디스에 바탕을 준 지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슬람 보수파로부터 자주 의심과 공격을 받던 분야였다. 중세 이슬람 의학의 본좌였던 이븐 시나는 이단으로 취급 받던 이스마일파였기에 보수파의 공격에도 위축되지 않고 의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븐 시나는 자신의 저서에 '상사병에 걸린 사람은 난교(...)를 하면 낫는다'고 쓰기도 했다.[7]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들도 이 주장이 논란이 된다는 걸 알았는지, '우리 스승님은 몇 가지 결점이 있긴 했지만 장점이 훨씬 많았어요.'라면서 얼버무려야 했다.[8] 현재 가장 권위 있는 쿠란 해설서를 쓴 이븐 카시르가 그의 제자이다.[9] 일단 기초적인 수준의 경제학 지식 같은 부분은 공감하는 편이었으며, 비무슬림은 지옥불에서 영원히 불에 탄다는 주류 이슬람 학설에 반기를 들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비무슬림이던 무슬림이던간에 최종적으로는 죄가 다 계산되면 천국에 간다는 소수파 관점을 지지했다.[10] 아랍어 대신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튀르크계 통치자들을 저격하는 말이었다.[11] 같은 맥락에서 수단에서도 반 터키, 반 서구 성향의 마흐디 운동이 일어났다.[12] 이혼 후 재혼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동성애가 사실상 처벌 받지 않고 방치되었다.[13] Gabriel said Reynolds, <The emrgence of islam Classical Traditions in Contemporary Perspective> p.124, 사미 무바예드 저, <IS의 전쟁>에서 재인용.[14] 무하마드의 직계 후손인 후세인 빈 알리가 다스렸다. 그의 차남의 후손이 현재의 요르단 왕가.[15] 사우디아라비아가 와하비즘의 성지이자 끝판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 왕족이나 높으신 분들은 해외만 나가면 와하비즘에 반대되는 세속적인 면을 보이는 데다, 금기시 되었던 여성의 운전과 선거권을 허가하는 등 나름대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조금씩 보이고 있다. 와하비즘을 고수하는 것도 사실상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것에 더 가까우며, 오히려 와하비즘을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꼰대로 취급 당하고 있다.[16] 무으따질라 같은 완전히 이단으로 취급되는 학파는 말할 필요조차 없고, 알-가잘리 같은 온건 사변철학자들의 저작을 포함해서.[17] 터키,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우세한 위치를 점한다. 중세 시대에는 조금이지만 술을 먹어도 좋다는 해석까지 내놓았을 정도로 관용적이다. 탈레반과 아프간 지역에서 다수 학파인 데서 알 수 있듯 관용이라고 하면서 이슬람에는 없던 유목민들의 악습까지 죄다 흡수하기도 한다.[18] 북/서아프리카에 주로 분포한다. 마그레브라고 불리는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 이슬람은 죄다 말리키 학파다.[19] 소말리아를 비롯한 동아프리카와 예멘, 동남아시아에서 우세하다.[20] 당장 터키와 인도네시아만 해도 대통령을 선출하는 공화국에 대륙법을 적용하며, 터키에서도 헌법에는 이슬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집트와 알제리 등 몇몇 아랍/북아프리카 국가들도 국교만 이슬람이고 샤리아가 아닌 대륙법을 적용한 곳들이 있다. 또한 샤리아를 적용하는 국가들도 그 형벌의 방향이나 정도는 이란처럼 적당히 수정함이 보통이다. 말레이시아와 파키스탄은 영미법을 적용한다.[21] 사실 사우디나 카타르 정부 입장에서는 정말 아니다 싶은 종교인들은 쳐내고 어느 정도 절충해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와하브파의 정신 나간 신학자들의 주장과 파트와를 다 따르게 되면, 농담이 아니고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탈레반 시기 아프가니스탄은 양반으로 보일 만큼의 광신으로 미친 세상이 도래'''하기 때문이다.[22] 우스운 사실은 와하브파를 국교로 삼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국왕이나 왕실 지도자의 사진을 건물 밖이나 공공장소에 걸어놓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런데도 정작 와하브파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물주나 다름없는 사우디 왕실이기에 이에 대해 별 말 못한다(...) 현실은 시궁창.[23] 또한 포켓몬 카드나 유희왕 카드 같은 카드놀이도 금지라고 한다.[24] 그런데 게임이나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극단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학자들의 해석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 이슬람을 소개하는 청년 캠프인 WAMY 캠프에서 사우디 이맘과의 QA 시간에 따르면 이슬람 율법 상 비디오 게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율법학자들은 비디오 게임, 인물화 등을 죄악으로 본다. 와하브파의 입김으로 자꾸 근본주의화되가고 있는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서도 포켓몬고 등의 게임을 금지한 나라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25] 참고로 여담이지만, 와하브파를 비롯한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모친 아미나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무함마드가 그렇게 말했다는 전승록이 있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은 새로 이슬람에 입교한 무슬림이 무함마드에게 우리 부모님은 사후에 어디 계시냐고 묻자, 유일신 신앙을 믿지 않았으니 지옥에 있을 거라고 말해서 그 무슬림이 화를 내며 돌아갔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그 무슬림을 붙잡고, 자신의 부모님도 그 사람 부모님과 같이 지옥에 있게 되었다고 말하며 위로한 것. [26] 극단적인 경우로 고등학생 때 이슬람으로 개종한 프랑스인 여성의 경우 와하비즘 선교사들의 권유로 니캅을 쓰고 다니다가 왕따를 당하고 나서 트라우마가 생겨 마약에 손을 대고 매춘까지 하게 되었던 사례도 언론에 소개되었다.[27] 사우디 율법학자 셰이크 이븐 알 우사이민의 파트와.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영어/비아랍어 학습을 금지시킨다는 건 국제 사회와의 소통을 아예 끊어버리겠다는 막장짓이라는 걸 사우디 정부도 알기 때문.[28] 이 정신 나간 파트와를 따른다고 가정하면, 사우디군이나 습관적으로 서양식 군복 외투를 걸치고 다닌 오사마 빈 라덴도 비이슬람적 죄인이 된다(...)[29] 사우디 파트와 연구청 발표. 이는 비무슬림들에게서 유래한 관습라서 그렇다고 한다(...)[30] 참고로, 한국 무슬림의 대표적 인물들 중에서는 사우디 아라비아 유학파 출신들이 많은데(대표적으로 명지대 최영길 교수라거나 이태원 모스크의 이주화 이맘 등), 이들 중 일부는 와하비즘의 극단적 교리를 한국에서도 따라 나쉬드를 제외한 모든 음악을 금지하는 걸 자랑스럽게 주장하여 이러한 행위를 혐오하는 한국의 네티즌들과 격렬한 논쟁이 있기도 했다.[31] 참고로 하디스에서 음악과 술을 마시며 여자를 끼고 노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을 금지하지, 음악이 술이나 음란 행위를 권장하는 게 아닌 이상 음악 자체를 금지하지는 않는다.[32] ISIL에서 이런 와하비즘 교리에 따라 일반 궐련과 물담배를 막론하고 모든 흡연을 강제로 금지시키고, 담배를 압수하여 길거리에서 공개 소각하는 장면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알 카에다 노선을 따르는 알 누스라 전선 계열 테러리스트들도 이 논리에 따라 담배를 금지한다.[33] 사우디 율법학자 셰이크 압둘라 알 나즈디의 파트와.[34] 월스트리트 저널 전 편집장 캐런 앨리엇 하우스의 저서, <사우디아라비아>, 212p.[35] 대표적인 학자가 이븐 타이미야의 제자 중 하나였던 이븐 알 카이윰 알 자우지야. 물론 중세 사람이다...[36] 캐런 앨리엇 하우스, <사우디아라비아>, p.213[37] 참고로 1979년에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이 메카를 무력 점거하고 수백 명이 죽은 메카 그랜드 모스크 테러 사태 때, 주도자들이 이러한 뒤로 몰래 즐기는 타락(?)적 분위기에 참을 수가 없어서 테러에 가담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38] 압둘라 알 무하이시니. 와하브 신학자로 ISIS의 투르키 알 비날리처럼 시리아 내 알 카에다 계열 반군의 테러와 극단주의 행보에 이슬람적 정당성을 주고 반군 참전을 무슬림들에게 선동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39] 사우드 왕가에 대한 테러가 없는 건 아니다. 1975년 파이잘 왕이 조카에게 살해당한 사건에도 개혁 정책을 폈던 파이잘 왕을 싫어하는 와하브파가 배후에 있지 않은가 말이 많고, 1979년에는 메카 성지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수 주간 점령당해 엄청난 피를 뿌리기도 했으며(그랜드 모스크 점거 사건), 최근까지도 사우디 왕가를 노리는 테러 조직이나 시도는 꽤 많다.[40] 그러나 이란도 사우디만큼은 아니지만 종교적으로 꽉 막힌 나라인 데다, 무엇보다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핵 개발을 해서 두 나라가 친해질 확률은 낮다. 2020년에는 미국이 솔레이마니를 폭사시켜버려 아예 외교 관계가 파탄났다.[41] 해외에서 지하드에 참가할 것을 아주 대놓고 장려하고 있다. 이는 정규 교육의 대부분이 종교 교육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교육 체계의 특성과 석유 산업의 비중이 지극히 높은 경제 구조의 문제로 청년층의 실업률이 굉장히 높고, 거의 선심성에 가까운 복지 정책... 이라기 보단 현금 살포로 불만을 억누르고는 있지만, 이 실업계층의 압력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지 않으면 큰 사회 불안 요소, 즉 왕가와 왕가의 돈을 받아먹는 종교계에 위협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 답이 없음을 와하브파 스스로도 알고 있으면서 고의적으로 대놓고 이러는 것이다.[42]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미국의 주요 맹방이기도 하고.[43] 아라비아에서 기원된 와하브와는 달리 살라피 운동의 기원은 이집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