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하라 히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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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 선수. '''2020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퍼펙트 게임 투수'''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1980~19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했던 간판 투수였다. NPB 역대 15번째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투수이기도 하다.
아이치현립 오부고등학교[1] 시절부터 장신(187cm)의 파이어볼러로 이름을 날렸는데, 졸업반 시절이던 1981년에는 그 당시 고시엔 대회 최고구속인 147km/h를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1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 지명을 받으면서 입단한다.
입단 첫 해인 1982년에는 2군에 머물렀지만, 1983년부터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아 12승 9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7의 성적으로 센트럴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이 당시 NPB 최고구속이었던 155km/h를 기록[2] 하기도 했지만, 1984년과 1985년에는 제구에 어려움을 겪으며 꽤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투구폼과 패턴에 변화를 주게 되는데, 스피드가 줄어든 대신 컨트롤과 더불어 슬라이더를 비롯한 변화구의 완성도가 크게 향상되면서 리그 정상급 투수로 도약하게 된다. 1988년에는 18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탈삼진 1위[3] 에 등극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의 개막전 선발투수를 맡기도 했다.
특히 1994년은 마키하라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되었는데, 5월 18일 후쿠오카 야후 옥션 돔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홈경기[4] 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15번째로 퍼펙트 게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고[5] ,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 2승을 쓸어담으며 일본시리즈 MVP에 올랐다.
이후 1998년, 오릭스에서 마무리감으로 영입한 노무라 타카히토[6] 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팀은 후반기부터 마키하라를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키게 된다. 마키하라는 그 해 18세이브를 올렸고 다음 해에는 23세이브를 올리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빈말로라도 안정감 있는 클로저라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언론에서는 마키하라에게 '다메마신(ダメ魔神)'[7] 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0시즌 중반에 다리 부상을 당한 뒤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 맞춰 복귀했는데, 구원 등판한 1차전에서 다이에의 외국인 타자 멜빈 니에베스에게 홈런을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 등판 기회는 없었는데, 요미우리는 2연패 후 4연승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마키하라는 이 해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어깨 부상을 당했는데, 이듬해에도 재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은퇴를 선언했고, 2001년 9월 3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에서 팀 동료인 사이토 마사키, 무라타 신이치와 함께 은퇴 경기를 가졌다. 그리고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약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통산 성적은 463경기(334선발) 159승 128패 56세이브 2485이닝 2111탈삼진 평균자책점 3.19.
은퇴 후에는 TBS 테레비의 야구 해설자로 일하면서 주로 요미우리 경기 담당 중계를 하고 있으며 재미있고 정확한 코멘트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8] 방송인으로서 예능 프로그램에도 종종 모습을 비추고 있는데, 후술할 '''백스크린 3연발'''으로 인해 야구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카케후 마사유키와 콤비로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NHK에선 후루타 아츠야가 같이 거들며 진행하기도 했고 스포츠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마키하라와 카케후가 당시 상황을 재현한 것은 덤.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 선수. '''2020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퍼펙트 게임 투수'''
사이토 마사키,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1980~199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대표했던 간판 투수였다. NPB 역대 15번째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퍼펙트 게임을 달성한 투수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아이치현립 오부고등학교[1] 시절부터 장신(187cm)의 파이어볼러로 이름을 날렸는데, 졸업반 시절이던 1981년에는 그 당시 고시엔 대회 최고구속인 147km/h를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1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 지명을 받으면서 입단한다.
입단 첫 해인 1982년에는 2군에 머물렀지만, 1983년부터 로테이션의 한 축을 맡아 12승 9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67의 성적으로 센트럴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이 당시 NPB 최고구속이었던 155km/h를 기록[2] 하기도 했지만, 1984년과 1985년에는 제구에 어려움을 겪으며 꽤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투구폼과 패턴에 변화를 주게 되는데, 스피드가 줄어든 대신 컨트롤과 더불어 슬라이더를 비롯한 변화구의 완성도가 크게 향상되면서 리그 정상급 투수로 도약하게 된다. 1988년에는 18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탈삼진 1위[3] 에 등극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2년 연속으로 요미우리의 개막전 선발투수를 맡기도 했다.
특히 1994년은 마키하라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한 해가 되었는데, 5월 18일 후쿠오카 야후 옥션 돔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홈경기[4] 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15번째로 퍼펙트 게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고[5] ,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시리즈에서 2승을 쓸어담으며 일본시리즈 MVP에 올랐다.
이후 1998년, 오릭스에서 마무리감으로 영입한 노무라 타카히토[6] 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팀은 후반기부터 마키하라를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키게 된다. 마키하라는 그 해 18세이브를 올렸고 다음 해에는 23세이브를 올리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빈말로라도 안정감 있는 클로저라고 말하기는 어려웠고, 언론에서는 마키하라에게 '다메마신(ダメ魔神)'[7] 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0시즌 중반에 다리 부상을 당한 뒤 다이에 호크스와의 일본시리즈에 맞춰 복귀했는데, 구원 등판한 1차전에서 다이에의 외국인 타자 멜빈 니에베스에게 홈런을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 등판 기회는 없었는데, 요미우리는 2연패 후 4연승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
마키하라는 이 해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어깨 부상을 당했는데, 이듬해에도 재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은퇴를 선언했고, 2001년 9월 30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에서 팀 동료인 사이토 마사키, 무라타 신이치와 함께 은퇴 경기를 가졌다. 그리고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약 20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무리지었다.
통산 성적은 463경기(334선발) 159승 128패 56세이브 2485이닝 2111탈삼진 평균자책점 3.19.
3. 은퇴 이후
은퇴 후에는 TBS 테레비의 야구 해설자로 일하면서 주로 요미우리 경기 담당 중계를 하고 있으며 재미있고 정확한 코멘트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8] 방송인으로서 예능 프로그램에도 종종 모습을 비추고 있는데, 후술할 '''백스크린 3연발'''으로 인해 야구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카케후 마사유키와 콤비로 같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NHK에선 후루타 아츠야가 같이 거들며 진행하기도 했고 스포츠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마키하라와 카케후가 당시 상황을 재현한 것은 덤.
4. 기타
- 투구 내용도 뛰어났고 강팀인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것에 비해 통산 승리는 159승으로 승운이 매우 없었던 투수다. 단일시즌 개인 최다승은 1993년에 기록한 13승으로, 팬들은 명구회에 가지 못한 걸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다.
- 1993시즌이 끝난 후 고향 연고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로의 이적을 염두에 두고 FA 선언을 했는데[9] , 이 때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마키하라의 등번호에 맞춘 17송이의 장미꽃을 들고 직접 마키하라의 집에 찾아가서 잔류를 부탁한 것은 꽤 유명한 일화. 그런데 마키하라의 말에 의하면 20송이였다고 한다.
- 1군 데뷔 3년차 시즌이었던 1985년 4월 17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한신의 클린업 트리오인 랜디 바스, 카케후 마사유키,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허용한 3타자 연속 홈런, 이른바 백스크린 3연발은 마키하라의 대표적인 흑역사로 꼽히는 장면.[10] 그리고 1999년 6월 12일 한신전에서 신조 츠요시에게 고의사구를 던지다가 끝내기 안타를 맞은 장면도 유명한데, 이 두 경기의 임팩트 때문에 일부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한신전에 약한 투수'라는 이미지가 박히기도 했다. 다만 마키하라의 통산 한신전 성적은 38승 10패로 오히려 한신 킬러라 불려도 무방한 수준이다.
[1] 아카호시 노리히로도 같은 고교 출신이다.[2] 이 당시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이던 코마츠 타츠오와 함께 '스피드건 시대의 산물'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3] 센트럴 리그에서 탈삼진왕 타이틀이 신설된건 1991년이다.[4] 다이에 호크스의 홈구장이나 NPB는 팬 서비스의 일환으로 타 구단의 홈구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한다. 교진군도 오사카 돔에서도 홈경기를 개최한 적이 있다.[5] 이 때 일화로 퍼펙트 게임이 이어지는 후반부에 당시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선수들을 불러 모아 마키하라에게 퍼펙트 게임에 대한 부담을 주지 말자고 지시하였다. 문제는 집합한 선수들 중에 '''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다행히도 퍼펙트 게임은 달성할 수 있었다.[6]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좌완 중간계투로 뛰기도 했지만, 은퇴 뒤에 마약 복용 혐의가 걸리며 완폐아로 몰락했다. 이후 팀동료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마약복용에 대해 방송에서 증언하기도 했다.[7] 당시 NPB 최강의 마무리 투수였던 사사키 가즈히로의 별명인 '대마신(大魔神)'을 패러디한 것이다.[8] 2017년 WBC에서는 구로다 히로키, 하라 타츠노리와 같이 해설을 맡았다.[9] 이 때문에 구단에 찍혀서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 요미우리의 지도자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10] 이날 당시 교진 감독이던 오 사다하루한테 아구창 털렸다고 한다.[11] 1995년 10월 8일 히로시마전.[12] 아들이 해적전대 고카이쟈 고카이 블루로 나온 야마다 유우키이다. 현재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수비주루코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