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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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야마모토 마사 (山本昌)
'''생년월일'''
1965년 8월 11일
'''국적'''
일본
'''출신지'''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3년 드래프트 5위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84~2015)'''[1]
'''SNS'''
트위터 인스타그램
'''1994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드래곤즈)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1. 개요
2. 커리어
3. 플레이 스타일
4. 그 외


1. 개요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前 야구 선수. 본명은 야마모토 마사히로(山本 昌広)이며, 야마모토 마사[2]는 등록명이다.
은퇴 시즌이었던 2015년 기준으로 '''현역 32년차, 만 50세의 현역 투수'''였다. 한국프로야구 출신의 동갑으로는 송진우, 한용덕 등이 있다. 당연히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최고령 현역 선수였으며, 가장 긴 커리어도 갖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령 선발 등판, 선발승(센트럴리그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을 가지고 있다.[3] 27년 연속 1군 등록은 노무라 카츠야의 앞, 쿠도 키미야스의 뒤에 위치하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 기록.[4] 그 외에 1군에 등록된 시즌이 가장 많은 선수이기도 하다.[5][6]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센트럴리그 소속이다보니 리그 최고령 안타, 타점이나 투수 부문 최다 희생타(2013년 기준 153희생타[7]) 같은 '''타격''' 관련 기록들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30여 년의 프로 생활을 모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보낸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로, 그가 기록한 219승은 주니치 구단 역사상 최다승 기록이다. 프로 평생을 주니치를 위해 바쳤지만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 특유의 영결을 잘 안 하는 문화와 관계가 깊다. 등번호 항목 참조.
통산 성적은 581경기 등판 219승 165패 평균자책점 3.45, 3348.2이닝 2310탈삼진.

2. 커리어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들어가 교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나, 1983년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5순위 지명을 받게 되면서 고심 끝에 프로야구 선수의 길을 택하게 된다.[8] 입단 후에는 줄곧 2군에서 머무르다가 1986년 막바지에야 1군 데뷔를 했지만 1987년에는 시즌 초반에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다. 그리고 1988년 초에는 당시 주니치와 업무제휴를 맺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당시 싱글 A 플로리다 주 리그)팀인 베로 비치 다저스에 파견되기도 했는데,[9] 여기서 야마모토는 25경기에 나와 13승 7패 평균자책점 2.00의 성적을 기록했다.
일본으로 귀국한 1988시즌 말부터 야마모토는 본격적으로 1군 무대에서 중용되기 시작했고,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선발로 뛰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에 커리어 첫 10승을 달성했고, 1993년에는 부상에서 돌아와 사와무라상을 차지한 이마나카 신지와 함께 역대급 좌완 원투펀치를 형성하며 17승 5패 평균자책점 2.05의 성적으로 다승,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며 2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1994년에는 19승 8패 평균자책점 3.48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다승왕에 올랐고, 사와무라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18승을 거두며 자신의 세 번째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한다.[10] 선동열이 활약하던 시절, 야마모토 마사와 카도쿠라 켄, 노구치 시게키의 선발 투구 경기에서 세이브를 주로 쌓았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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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주니치의 중심타자이자 절친인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좌 : 야마사키, 우 : 야마모토)
이후에도 10년 넘게 꾸준히 주니치 선발진의 든든한 기둥으로 활약했고, 2006년에는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하더니 그 해 9월 16일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령(만 41세 1개월)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12] 그리고 2008년 8월 14일, 홈구장인 나고야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완투승을 기록하며 NPB 역사상 24번째로 통산 200승 고지에 올랐다.[13]
2009년을 기점으로는 주로 땜빵 선발로 나오게 되었지만[14], 그래도 2012년에는 13경기 12선발 67⅓이닝 평균자책점 2.94를 기록하는 등 땜빵 선발로서 준수한 활약을 했다. 하지만 공인구 반발력이 상향조정된 것으로 밝혀진 2013년에는 4.46의 평균자책점으로 그간 모습과 비교한다면 노쇠화(?)가 완연한 모습을 보였다.
2014시즌에는 2군 경기에서 5이닝 2실점의 호성적을 내면서 1군 등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9월 5일 한신전에 1군 등판을 하였고, 5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해서 종전 하마사키 신지가 가지고 있던 최고령 등판 투수,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48세 4개월)을 경신하였다(49세 25일). 이 시즌부터는 포수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감독 겸 선수'''로 뛰게 되었다. 졸지에 '''감독보다 더 나이 많은 선수'''가 된 셈.
야마모토는 2014시즌에는 3경기 1승 1패, 평균자책점 4.50를 기록했다. 2014시즌 후 재계약에 성공해 2015년에도 뛸 예정이다.
2015년 8월 9일 자신의 '''50세''' 생일을 이틀 앞두고 선발 등판했다. 이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면 '''세계 최고령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지만, 제구 난조로 1이닝 1실점을 하고 강판되었다. #
2015년 9월 26일 은퇴의사를 발표했다. # 그리고 그 해 10월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시즌 최종전에 등판, 마루 요시히로를 2루수 땅볼 아웃으로 잡아내며 32년간의 길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은퇴 이후에는 니혼 TV, 도카이 TV 방송 등에서 시청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작전, 플레이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 해설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NEWS ZERO의 야구 코너에 건장한 아저씨가 나와서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거나 야구 해설을 하고 있다면 이 사람.

3. 플레이 스타일


186cm, 87kg[15]라는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아니었다. 전성기에도 최대 140km/h대 초반의 속구를 던졌고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5년에는 속구 최고구속이 130km/h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디셉션이 좋은 독특한 투구폼, 높은 회전수 등의 이유들로 인해 구속에 비해서 구위가 좋은 편이며, 투구에서 속구의 비중이 다른 공 느린 좌완 투수들에 비해 매우 높다고 한다.[16] 본인은 스스로를 기교파가 아닌 속구파 투수라고 하는데, 구속은 안 나오지만 무브먼트와 디셉션을 바탕으로 자신있게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꽂아넣는다는 마인드는 우에하라 코지트레버 호프만 항목에 언급된 부분을 떠올릴 수 있을 듯. 마이너리그 유학 시절에 배워왔다는 스크류볼#s-1(싱커)은 그의 전매특허 변화구이다.[17] 부상 위험이 높은 구질로 알려진 스크류볼을 던져왔는데도 30년 장수 커리어를 보낸 것도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09년부터는 풀 타임 선발투수로서는 수명이 끝났는데, 원체 선발 타입인 선수라 불펜이 아닌 2군에서 몸을 만들고 있다가 선발진에 구멍이 나면 한 경기 던지고 다시 내려가서 또 몇주일씩 몸을 만드는 식의 스팟선발로 2~3년간 활약했다.
말년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이조차도 힘들게 되어 몇달씩 들여 몸을 만들어서 1년에 2시합 던지는 식으로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그래도 이렇게 해서 2시합만 제대로 던져주면 14이닝으로 어지간한 패전조 B급 불펜 정도의 이닝수가 나오므로, 노장 선수의 활용이란 측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선수.

4. 그 외


  •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의 한국인 트리오가 주니치에서 뛸 때 그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끝나면 한잔하러 자주 같이 갔다고. 배영수와도 오프시즌 중 자율훈련에서 만난 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며, 배영수와의 인터뷰에서 조언을 전해준 것으로 몇 차례 언급되기도 하였다.기사1기사2
  • 무선모형 매니아로 유명하다. 주니치 시절 팀 동료였던 야마사키 타케시와 함께 스스로의 이름을 건 RC카 대회를 열었을 정도.그의 무선모형 취미를 다룬 영상 다만 최근에는 나이 때문에 오프시즌에 몸만들기에 전념하느라 자제하는 중이라고. 그 외에도 자동차 수집, 게임, 만화 등 왠지 최고령 투수의 무게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들을 다수 가지고 있다고 한다.
  • 1984년에 데뷔한 데다가 오랜 커리어 덕에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도 초대부터 가장 오랫동안 시리즈에 출전한 선수가 되었다. 게다가 실황 이전에 큰 히트를 쳤던 야구게임인 패미스타에도 초기 몇 작품을 제외하면 꾸준히 출연했다. 은퇴 후에도 OB선수 항목으로 출전 중. 한때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패미스타 첫 시리즈부터 실황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야구게임에 개근했었지만, 2008년 은퇴를 하면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09를 끝으로 현역으론 더 이상 출연하지 않는다. 거기다 기요하라는 후에 마약 복용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2017년판엔 아예 OB선수 항목에서조차 짤려버렸다. 초대 ~ 2013까지의 능력치 정리
  • 덧붙여, 패미스타 시리즈가 출시될 때부터 꾸준히 플레이해 온 유저이기도 하다. 출시 당시부터 주니치 클럽하우스에서 플레이했다고 하며, 반다이남코가 2018년 8월 시구식에 초청하기도 했다. #
  • 2014년 LG 트윈스의 마무리 투수 봉중근이 개인훈련장소를 일본 돗토리로 바꾸면서 야마모토를 비롯해 아사오 타쿠야, 이와세 히토키 등 주니치의 필승조 선수들과 개인훈련을 같이 했는데, 야마모토에게 마구를 배워왔다고 언급했다. 야마모토가 먼저 다가와서 가르쳐줬다고 한다.기사 새로 배워온 구질은 스플리터였다고 한다.
  • 기자들이 좋아하는 선수라고 한다. 이유는 인터뷰를 굉장히 잘 받아준다고. 하다못해 클럽하우스에서 나와서 집에 가려고 차타고 시동 걸은 상태에서 인터뷰한다고 들이닥친 기자에게 싫은 내색 하나 안하고, 오히려 시동끄고 아예 차 밖으로 나와서 인터뷰에 응해줬다고 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게 왜 대단한거냐면, 보통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면 쌩까고 그냥 가던가(...) 차에서 그냥 창문만 내리고 "귀찮으니 짧게 하소" 오오라를 풍기면서 인터뷰 하는게 보통인데, 야마모토 마사는 그런상황에도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기 때문에 더더욱 기자들 사이에서 평가가 높다고 한다.
  • 일본에서도 투 머치 토커 이미지로 유명하다. 행사 시간을 넘겨서 방송녹화 일정 늦을까봐 걱정하는 영상도 있을 정도. 달변가로 유명하여 해설 외에도 광고, 예능, 강연, 각종 행사에서 섭외가 계속 들어오는 중이다. 대외적으로 저술활동도 많아서 책도 많이 내고 일본경제신문, 주니치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 투구할때 혀를 위로 내밀고 투구하는 버릇이 있다. 뭔가 특이한 뜻이 있다거나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동경하던 선배투수인 아라키 다이스케의 투구시 표정을 흉내내면서 던지다 보니 어느샌가부터 혀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 축구는 고향팀 카와사키 프론탈레 팬으로 보인다. 카와사키의 2017 J리그 우승 축하 트윗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구단 행사에 초청받은 이후로 프론탈레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
  • 히로시마 원정 201승에 도전한 경기에서 이병규의 결승 솔로 홈런으로 201승에 성공했다. 이 날 이병규는 1군에 콜업된 날이었으며, 3회 선제 쓰리런을 포함 2홈런-4타점으로 맹활약했다. 특히 9회 결승 솔로 홈런이 나왔을 때 야마모토 마사가 웃음을 드러내는게 카메라에 잡혔다. 당시 야마모토는 8이닝 4실점으로 마무리한 상태였고, 8회에 본인이 동점을 허용했던지라 더욱 더 극적이었다.

[1] 참고로 한국프로야구가 1982년에 출범하였고, 2015년에 은퇴한 것을 기준으로 '''31년간 현역생활(!)'''을 했었다.[2] 성인 '山本'가 아니라 '山本昌'(야마모토마사)까지가 정식 등록명이다. 전광판에도 '山本昌'로 붙어서 나온다.[3] 최고령 완봉승기록까지 가지고 있는데 이시점에서 동기생인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세이부, 1년 후배인 노무라 겐지로는 히로시마 감독이었다.[4] 29년 연속 1군 등록한 나카지마 사토시가 있기 때문이다.[5] 이 기록은 앞서 말한 나카지마 사토시와 함께 공동 1위. 야마모토는 32년을 뛰었지만 3년은 1군에 못 올라왔으나, 나카지마는 29년을 뛰고 모든 시즌을 1군에서 잠깐이라도 보냈다.[6] 나카지마 사토시는 사실 2007년부터 코치로 전업하였다. 그러나 나카지마의 소속팀 닛폰햄 특성상 팀 1군은 홋카이도에, 팀 2군은 치바에 있기 때문에 수도권 원정을 갈 때가 아니면 2군 선수를 1군에 콜업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백업 포수가 부족해서 저렇게 1군에서 오래 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 나카지마의 역할은 백업 포수도 아니고 백백업 포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가끔 경기에 들어갔으며, 플레잉 코치로 처음 뛴 2007년에는 15타석에 들어섰으나, 그 이후로는 타석에 거의 서지 않고 대수비로만 들어가면서 간간히 나왔다. 플레잉코치로 9년 동안 110경기에 나왔는데, 첫 해인 2007년에 60경기에 나왔으니 8년 동안 50경기밖에 안 나온 셈. 그나마 그 50경기에서도 11타석 들어섰다. 또한 2011, 2012, 2014, 2015년에는 타석에 전혀 들어서지 않았고, 최후의 안타는 2009년에 친 것이었다.[7] 153 희생타는 일본 전체 1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8] 여기에는 아버지가 주니치 드래곤즈의 팬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한다.[9] 여담으로 당시 주니치와 LA 다저스의 유니폼 디자인이 비슷했던 것 은 이 업무제휴 때문이었다.[10] 하지만 팀은 나고야돔 입주 첫해 '''꼴찌'''를 찍고 말았다. 9월까지는 요미우리가 독보적인 꼴찌였으나 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가 화약고인 마무리자리에 조성민을 꽂아버림과 동시에 팀이 갑자기 상승세를 타면서 4위로 마쳤다.[11] 이중에 카도쿠라 켄과 노구치 시게키는 요미우리가서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게 된다.[12] 이 경기에서 야마모토는 안타도, 사사구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3루수 모리노 마사히코가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땅볼 타구 때 실책을 범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퍼펙트 게임은 달성하지 못했다. 당연히 모리노는 주니치 팬들에게 신나게 까였는데, 오히려 야마모토는 "모리노의 실책 이후 더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 노히트노런을 달성할 수 있었다." 라며 모리노를 감쌌다.[13] 이때는 올림픽기간이었는데 주니치가 상대팀인 요미우리보다 훨씬 차출이 많이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200승찍은건 정말 대단한거다. 요미우리는 이승엽, 우에하라 고지, 아베 신노스케 3명만 차출되었다. 이 중 이승엽은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차출되었고 준결승전에서 호시노 재팬을 분쇄해버린다. 이틀뒤 베이징에서 그의 룸메인 이와세 히토키는 '좌완킬러'답지 않게 좌타 대타인 김현수에게 털린것도 모자라서 야마모토 마사가 200승 찍은지 8일뒤에는 '''커리어 최악의 삽질'''을 벌이고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이승엽에게 시원하게 X털리면서 패전. 이와세를 필두로 주니치 출신의 애제자들과 야마모토 코지, 타부치 코이치 등 절친들을 잔뜩 데려가놓고서는 졸전만 펼치다 기어코 요미우리 소속으로 2008시즌 개막전 4번타자로 출전했던 한국인 선수에게 일격을 맞고 메달도 못 따고 돌아온 호시노 센이치로서는 2008년은 '''요미우리와의 악연의 최정점'''이기도 했다.[14] 그와중에 2010년에 최고령 완봉승도 기록했는데 허용구단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이다. 이승엽은 7번타자로 선발출장해서 초노 히사요시와 함께 삼진을 2개나 쳐먹었다.[15] 이건 프로필상 기록이고, 본인이 밝힌 바에 의하면 실제로는 188cm, 98kg라고 한다. 젊었을 적에 등록한 프로필을 갱신을 안 한 듯. 흔한 케이스다.[16] 비슷하게 롱런한 투수인 제이미 모이어도 이미지에 맞지 않게 속구 비중이 투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높은 투수였다.[17] 여담으로 그의 등번호 34번은 NPB의 전설이자 400승을 달성한 가네다 마사이치의 등번호이자, 야마모토의 마이너 유학시절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좌완 스크류볼러였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의 등번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