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소녀 영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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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 이전
3. 사건 발생
4. 이후
5. 유사 사례
6. 둘러보기


1. 개요


2001년 2월 12일 강원도 삼척 사무곡 오지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사건 자체는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지만, 당시 워낙 유명하면서도 서민적인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이라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2. 사건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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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생인 이영자 씨(당시 19세, 현재 42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1]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약초 캐기만으로 살아가던 산골 소녀였다. 그러던 이영자 씨와 그녀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시골과 오지를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사진 작가[2]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2000년 7월 KBS 2TV 인간극장 '그 산 속에 영자가 산다(5부작)'를 통해 이후 엄청난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초등학교를 일주일 다닌 거 빼곤 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그녀를 위해 수많은 후원이 이루어졌으며, 영자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초등 과정 검정고시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유명세를 통해 이동통신 회사인 LG텔레콤광고까지 찍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인간극장의 인기는 최고점에 이르게 되면서 훈훈하게 이 에피소드는 끝나는 듯 했다.
여기서 화면 속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은 그 뒤 사건을 예측한 걸지도. 방송을 본 사람들은 기억나겠지만 영자의 아버지는 프로그램 내내 영자가 산골에서 나가는 걸 매우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때문에 영자가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투덜대거나 속상하셔서 울기도 했고, 제작진들이 나서서 "애 인생 망칠 일 있냐"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모습이 방영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살인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에 "아버지가 이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이라며 영자가 울었다던 카더라 소문도 인터넷에 잠시 돌았었다.

3. 사건 발생


이영자 씨가 서울에 상경하여 검정고시 준비에 열심히던 2001년 2월 12일, 그녀의 아버지가 산골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시신은 왼쪽 쇄골에 깊은 상처가 나있었으며, 콧등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처음 경찰은 초동수사에서 이영자 씨의 부친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결론 내렸다가 언론과 국민들의 항의와 거센 비난에 부랴부랴 타살로 결론 내린 다음 수사를 실시했으며, 결국 2001년 3월 13일 50대의 남자 양재동[3]을 용의자로 구속했다. 당시 기사.
양씨는 이영자 씨와 그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 산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범행이 용이하다는 점을 파악한 후 CF 출연료와 후원금을 노리고 2001년 2월 9일 이영자 씨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진술했으며, 정작 아버지에겐 현금 10여만 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 사건에 전 국민이 경악했는데, 2001년 2월 27일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영자 씨의 후원회장이 소녀의 출연료와 인세를 횡령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온 후 후견인에게 돈을 모두 뺏기며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를 당했던 것.[4] 이 후원회장이란 작자의 아내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남편 잘했는데 왜 가두냐"라는 망언을 했다. 결국 오가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야유와 욕설만 들었다.
이 두 사건 이후 이영자 씨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속세를 떠나 인근 모 산사로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이것도 비구니가 되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떠난 것이 아니라 주변 친지 몇명에게만 말하고 그냥 홀연히 사라진 것인데, 각종 뉴스와 언론사들이 영자가 사라졌다며 그녀의 행방을 사방으로 취재해 다니다가 절에 들어갔음을 확인한 것이다.
훗날 절에 처음 찾아온 그녀를 돌봐주었던 혜설스님은 "절에 처음 찾아왔을 때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피까지 토했으며 대인기피증이 심했다. 자구책으로 여신도들만 있는 ○○사로 몰래 옮겼다. 이때 언론에서는 '영자가 실종됐다'면서 끊임 없는 관심을 표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불행한 사건은 계속해서 터졌다. 2001년 7월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라는 추모 시집이 발간되었는데, 책을 낸 신풍출판사에서는 전부터 이영자 씨의 아버지와 알고 지냈고 같이 시집을 낼 준비를 하다가 사고가 났으며, 갑작스레 세상을 뜬 고인과 최근 불교에 귀의한 이영자씨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책을 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집이 이영자 씨와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이영자 씨의 동의 없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가, 당사자인 영자가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상황이라 어영부영 책이 출간되긴 했지만 이미 그러한 소문이 퍼져서인지 판매는 저조했으며, 신풍출판사는 이후 문 닫았다. #

4. 이후


이후 한동안 대한민국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가해졌다. 산골에서 오순도순 잘 살고 있는 두 부녀를 억지로 도시에 끌어내어 결국 비극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건 이 부녀를 오직 돈으로 여긴 광고주와 인간극장 제작진들의 잘못이라는 주장이 널리 퍼진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으며, 대한민국 국민은 황금만능주의에 찌들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홍스구락부 제작자였던 조문홍은 자신이 제작한 '산골소녀 영자' CF 패러디를 홍스구락부 홈페이지에서 삭제했었다.[5] 홈페이지에 '영자' 버튼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놔뒀다가는 고인드립이 될 게 뻔하므로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가진 않는다.
속세를 떠난 이영자 씨는 '도혜'라는 법명을 얻고 고향 강원도의 한 암자에서 수행하는 삶을 택했다.
출가 이후에도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빌린 일부 언론들이 이영자씨를 찾으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특히 2007년 초에 한 여학생이 지상파에 출연한 후 유명세를 얻으면서 악플과 괴소문에 시달리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제2의 영자 사건이라며 일간스포츠 기자들이 카메라 들고 암자에 출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반장 스님이 "도혜 스님은 만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지금 너무나 밝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파합니다. 도혜 스님의 출가 전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스님들도 몇 안되니 그냥 돌아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내보냈다. 그럼에도 기자들은 다른 암자에 이영자 씨가 온다는 정보를 듣곤 그 암자에 취재를 갔다가 암자 주지 노스님이 "사람을 두 번 죽이려 드느냐!"며 호통을 치고, 다른 스님이 "왜 그렇게 가만히 계시는 스님을 못 건드려서 안달이냐"면서 "계속 이러면 우리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니 얼씬거리지 말라"는 항의를 하자 물러났다고 한다.
2012년 한 월간지에서 이영자 씨의 친척을 찾아갔는데, 그들도 비구니가 된 이영자 씨에 대하여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이 기사에선 영자가 살던 집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해마다 세금으로 1만 5천 원 정도가 나오며, 그냥 이 친척들이 부담하고 있고 집도 관리하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영자에게 집의 소유권이 이전되었지만 과연 돌아올지 모르겠다, 친척들도 고통에 시달리니까 더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라며 통보했다.
범인 양재동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자신을 죽여달라며 항소하기도 했다. 다만 이 항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검찰 측의 항소만 받아들여졌다. 피고인이 스스로 형량을 높이기 위한 항소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

5. 유사 사례


이 사건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나왔다.
사건 이듬 해에 개봉한 영화 집으로에 출연한 김을분 할머니의 경우도, 할머니가 유명세를 타면서 심지어는 할머니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루머 때문에 정체불명의 수상한 사람들[6]이 집 근처에 어슬렁거리게 되자, 결국 할머니의 자식들이 서울특별시로 모셔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거지가 전형적인 강, 절도 전과자들의 모습이다. 경찰차가 오면 잽싸게 사라지지만 범행 대상을 물색할 때는 담배를 피우며 느긋하게 살핀다. 뭔가 수상해보여도 일반인은 그 정도 가지고 당신들 뭐냐고 따져 묻기도 뭐하기 때문.
워낭소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이에 여기 나온 할아버지는 워낭소리 감독이 싫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모티브가 된 엄기봉도 비슷한 케이스. 산골 소녀 영자처럼 인간극장에서 처음 소개되어 인기인이 된 사람이지만 PD수첩에 의해 2002년부터 기봉이 아저씨가 출연한 각종 영화, 방송 그리고 각종 후원 행사에서 받은 후원금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기봉씨 모르게 유용된 것이 밝혀져 큰 사회적 파장이 있었다.[7]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제작한 PD가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할머니의 수익을 밝히지 않겠다고 말했다. 기사
산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는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의 경우 출연자의 신변 안전 및 사생활 보호를 위해 거주지는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으며, 달력 광고 등도 블러 처리된다. 간접 광고 방지도 있지만 달력 광고에 나온 업체명이 거주지를 유추하는 단서가 될 소지가 있으므로.

6. 둘러보기



[1]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에서 40분 정도 더 가야 되는 곳. 사무곡(지명).[2] 이 사람은 2010년쯤 자신의 블로그에 이 사건을 촉발한 게 자신이 알린 것이 화근이라는 후회하는 글을 썼다가 무수한 악플에 시달린 바 있다. 링크(2006년 때 쓴 글, 한겨레).[3]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냈고 잦은 절도강도 행각을 벌여왔다.[4] 인터넷에 영자가 아버지 살인자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루머가 떠도는데, 육체적인 학대는 살인자가 아니라 그녀의 후원회장이 저지른 일이며, 물리적인 폭행이지 강간은 아니었다.[5] 다만 다른 곳에서 올린 영상을 볼 수 있기는 하다.[6] 이들이 눈에 뜨일 수밖에 없는 게 동네 사람도 아니고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그전까지는 명절 아니면 근처에서 젊은 사람 보기가 힘들었을 정도로 상당히 고령화된 마을이었다. 똑같은 2~3명이 담배를 피우면서 할머니 집을 살펴보다가 할머니나 다른 사람이 오면 유유히 다른 곳으로 가길 반복했다고.[7] 출처: 기사 1, 기사 2, 기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