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기율 팔항주의
간화자: 三大纪律八项注意
영어: Three Rules of Discipline and Eight Points for Attention
1. 중국 인민해방군의 기본 규율
잠시 후 군복 바지 양쪽에 붉은 줄이 달린 중공군이 오더니 한국말로 "동무, 반갑소. 지금 동무는 해방되었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어 그 중공군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중략) 그는 수통을 꺼내 내게 물을 따라부어주었다. (중략) 그리고 자기들의 숙소인 농가로 데려가 방에 눕히고는 '''"동무, 안심하십시오. 우리는 절대 포로를 죽이거나 구타하지 않습니다. 오늘 동무는 제국주의 앞잡이들에게서 해방됐습니다."'''하고 상투적인 공산주의자들의 감언이설을 해댔다. (중략) 중공군 장교는 또 나에게 식량을 내밀며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말없이 거절하며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피우다 남은 미제 담배 '팔말'이 남아있었기에 꺼내서 한 대 피워 물면서 그에게도 권했다. 그는 내가 주는 담배를 사양하면서 '''"해방된 전사의 소지품은 일절 다치지 않기로 돼 있습니다"'''하며 자기 담배를 꺼내 피워물고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 박정인 前 국방부전사편찬위원장 회고록 <풍운의 별> 中
마오쩌둥이 1928년에 내세운 군 규율로 오토 브라운의 회고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태평천국 당시 태평천국군의 구호에서 아이디어를 땄다고 한다."부엌에서는 중공군 놈들이 무엇을 구우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략) 나는 정 상사를 보고 빙그레 웃는 것으로 작전을 암시하고 부엌문을 박차고 벼락같이 들이닥첬다. (중략) 우리는 무방비의 세명을 붙들어 새끼줄로 꽁꽁 묶어버렸다. (중략) 나는 그들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중공군이 남하하면서 국군 패잔병들을 죽이지 않았으며 동상에 걸린 국군은 모두 풀어줬다는 얘기를 들었다'''."
- 채명신
문혁 종결 후에는 예전처럼 그렇게 유난스럽게 강조되지는 않고 있지만, 규율을 만든 마오쩌둥이라는 인물 자체가 국부고 인민해방군의 정체성도 공식적으로는 인민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민을 존중한다는 이 규율의 효력 자체는 계속 존중되고 있다. 경험자들에 따르면 생각보다 친절한 집단이라고 한다.[2]
1.1. 비판적 평가
1948년 4월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군이 창춘을 포위했다. 그는 최고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아울러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국민당의 창춘방어군 지휘관 정둥궈에게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도시를 굶겨서 항복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1948년 5월 30일에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창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어라."'''
(중략)
창춘 시민들은 단체로 공산당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기나 어린아이를 병사들에게 맡긴 채 도망쳤고 어떤 사람들은 초소 앞에서 목을 맸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에 병사들은 단호함을 잃었고 일부는 무릎을 꿇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울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는 단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암암리에 피난민을 통과시키는 군인들도 있었다.
상부에서 이 문제를 시정시키자 또 다른 풍조가 발견되었다. '''군인들이 피난민을 때리고, 포박하고 총을 쏴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 해방의 비극 28~31쪽
"창춘은 마치 히로시마 같았어요. 사상자 수도 대충 비슷했지요. 다른 거라곤 히로시마는 9초가 걸렸고 창춘은 5개월이 걸렸을 뿐이죠."
- 인민 해방군 중위 장정룽
덩샤오핑의 주도로 공산당은 대략 500만명 이상의 남자와 여자들, 때로는 아이들까지 징발했다. 덩샤오핑은 마을마다 엄밀한 할당량을 배정하고 명령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엄중한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곡괭이와 삽을 든 수백만의 징용자들은 전선으로 식량이나 각종 물건을 지어 나르며 병참 지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부대의 맨 앞에서 행군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총알받이로 이용되었다.''' 공산당군 선두에서 비무장 상태의 마을 주민들이 물밀듯 몰려오자 국민당군은 당황했다. 당시 일반 사병으로 국민당군의 참호를 지켰던 린징우는, 적군을 막느라 총을 쏘다가 손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비무장한 일반인에게 총을 쏜다는 사실에 구역질이 났으며 눈을 감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사격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 해방의 비극 58쪽
1968년 12월, 윈난 성 혁명위원회에서 인민해방군 1000명을 샤디엔에 파견했다. 혁명열에 불타는 이 붉은 전사들은 이슬람을 믿는 촌민들을 무시하고 적대했다. 모스크를 숙박 시설로 삼아 기거했고, 촌민들에게 돼지 사육을 강요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고 남은 뼈를 마을 우물에 버리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경멸이고 치욕이었다.
격분한 신도들은 쿤밍에 있는 성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도리어 탄압으로 되돌아 왔다. 반혁명 폭동을 진압한다며 더 많은 군인들을 파병한 것이다. 비극의 절정은 1975년 7월 29일이다. 새벽 3시부터 무차별 포격과 총격이 개시되었다. 소총만이 아니라 대포까지 동원되었다. '''삽시간에 사방은 불바다와 피바다로 변했다.''' 거의 모든 집과 모스크가 붕괴되고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공식기록으로 7700명 주민 가운데 900여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사후에 병사한 이들까지 합하면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즉사한 900명의 희생자 가운데 기사 아저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누나 등 일가족 9명도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매일 같이 기념비에 들려 기도를 드린다고 했다. 그가 18살 때 경험한 비극이다.
-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윈난 : 이슬람 중국'#
티베트 전쟁 내내 중국 인민해방군이 보인 잔학무도함은 너무나 심각해서, 수년동안 티베트 공산당 지도자였고 티베트 민족정치자문의원회의 부회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푼촉 왕걀마저 중국군이 저지르는 잔학 행위에 항의했다가 티베트인의 자유 투쟁에 동정을 표했다는 명목으로 투옥되었다.
또한 라싸에 주둔했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대 지휘관이었던 청호칭 대령은, 아군이 저지르는 끔찍한 학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티베트군으로 전향해 버렸다. 청 대령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미군과 싸웠고, 티베트로 파견되어 군인으로 몇 년을 더 복무했다가 티베트 저항군에 가담하여 예전의 동료들과 싸웠다.
그는 티베트 동부 지방인 캄과 암도에서 일어난 티베트 저항군과 중국군과의 전투로 인해 약 4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죽었으며, 중국군 수뇌부에서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봉기를 막기 위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는 식량 배급을 줄이고 통제를 강화하고 더 긴 시간 동안 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작성한 기록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청호칭은 롭상 타시라는 티베트식 이름도 얻었는데, 중국군의 탱크와 비행기가 티베트 민간인을 노리고, 티베트 마을들이 중국군 폭격기에게 폭격당하는 장면도 목격하였다. 청 대령은 인도에서 티베트 난민으로 여러 해를 살다 타계했다.
- 티베탄 리뷰 1979년 10월 호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있던 학생과 일반시민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고 전차로 역살하는 등 무력탄압해 다수의 사망자를 냈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산둥성 텅저우 거주 장스쥔은 2009년 홍콩의 빈과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압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정치 선전원으로 지정돼 총기를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들의 구호는 ‘인민을 부모로 보고, 학생을 자매로 보라'였다. 우리는 인민을 부모로 본다는 군대가 결국 중화민족 최대의 비극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머리에 흰띠를 두른 학생들이 피범벅이 돼 눈 앞에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마오쩌둥 기념관 우측 사거리에서 한 무리의 군인들이 나무몽둥이와 가죽띠로 시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봤다.”'''
당시 진압에 참가한 54군단 소속 지휘관들은 작전 후 일괄 승진했다. 주차오성 군단장은 허난성 군구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당시 사단 정치위원이었던 왕위파는 후에 홍콩주둔부대의 정치위원으로 승진한 뒤 나중에 광저우 군구 부정치위원을 맡았다.
- 중앙일보 천안문사태 진압 병사가 입을 열다
2011년 12월 2일, 중국 란저우에서 성난 민중들이 군용차량을 전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란저우군구 사령부의 차량이 난폭하게 정차한 후 6명의 군인이 차도를 점유하고 있던 노점상들을 구타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격노한 란저우 시민 1000여 명이 주위를 포위하며 군용차량을 전복시켰다.
몇 시간 후 란저우 현장 사진과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한 란저우 시민은 “방금 봤는데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었다!”라고 했고, 또 다른 란저우 시민은 “군용차량의 난폭운전은 진작부터 민원을 제기했었다. 경찰도 감히 제지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민중들 스스로 (차량을) 전복한 시킨것이다!”라고 했다.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중공군에게 잡힌 UN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공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또 중공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터키인이 본 6.25 전쟁' 지음 :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중공군은 부상 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 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 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공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한 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공군 중 한 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공군 한 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국공내전 기간 동안의 삼대기율 팔항주의에 대해서 지나친 고평가가 이뤄지면서 빠가 까를 만드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예컨대 삼대기율 팔항주의가 민심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많지만 이 민심이 그동안 중국공산당이 수십년간 홍보했던 것처럼 절대적이었냐는 것에 대해선 의문을 표하는 입장이 존재한다.장진호 전투 제 3 일 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 되자 '''중공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
어디까지나 이런 규율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썩 좋다고는 못하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비교적 군율이 엄격했다던 국공내전 기간에도 중국 공산당군이 위기에 처하면 민중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삼대기율팔항주의의 정신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무자비한 강제징집과 사실상 약탈에 가까운 강제적 물자공출 등 민간인을 쥐어짜기 일쑤였다.[4] 그러나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되면 다시 군율이 엄격해지긴 했다. 당시 중국은 공산당, 국민당, 지역 군벌 등등 수많은 세력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현대판 삼국지, 난세였고 이 와중에 이런 규율조차 갖고 있지 못한 수많은 무장집단들이 보통사람들 상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그런 집단들에 비하면 공산당군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중공군이 항상 친절하거나 제네바 협약을 잘 지킨 것도 아니며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 전쟁에서는 교묘한 방법[5] 으로 포로들을 세뇌시켜 자국 군대의 장병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중국 국민으로 국적을 변경시켰다. 포로의 신변은 둘째치고 이건 엄연히 납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마오쩌둥의 집권 후반기에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등 굵직한 사고가 터지기 시작하면서 이 규율도 단순한 군율이 아닌 마오쩌둥 우상화에 악용되기 시작했고, 팔항주의의 5번 항목을 유권 해석해 홍위병들에게 쪽도 못쓰고 당하거나 그들의 만행을 팔짱 끼고 방조하는 등 흑역사까지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규율이 있는 것만큼, 어느 정도 지키려는 노력을 했을 확률은 충분히 존재하기에 희석되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당시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군과 일본 제국의 일본군의 만행이 압도적이라 굳이 비교하는 사람은 적다.
2. 위의 규율을 바탕으로 한 군가
1935년 (또는 1936년)에 나온 노래로, 당시 홍군 제25군 정치부장이었던 청탄(程坦)이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탄이 직접 작곡한 것은 아니고, 위안스카이가 집권할 당시 톈진에서 불리기 시작한 북양군의 군가를 개사해 만들었다. 규율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홍군에서는 공식 군가로 취급되었고,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마오쩌둥이 만든 규율이라고 해서 그의 어록에 곡을 붙인 소위 '어록가'이자 혁명가요로 여겨져 민관군 가리지 않고 수없이 불려지고 TV랑 라디오로도 수시로 방송되었다.
규율과 마찬가지로 문혁 종결 직후에는 그 반작용으로 가창이 암묵적으로 자제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군가로 계속 애창되고 있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문혁을 배경으로 한 문예 작품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나오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중국과 대만이 공동 참가했을 때 개막식에서 이들의 국가인 의용군 진행곡과 중화민국 국가를 양측이 정치적 문제로 모두 거부하게 되자 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에서 중국과 대만 양 측과 인연이 있던 이 곡을 양측의 입장 음악으로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중국과 우방국인 북한의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이 부른 문화어 번안판도 있다.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나오지만 링크는 코렁탕을 들이킬 수 있으므로 금지.
2.1. 가사
2.1.1. 문화어 번안판[6]
혁명군인 명심합시다 3대규률 8항주의를
첫째로는 모든 행동 명령에 복종해야 승리합니다
둘째로는 인민의 재산 바늘 실 하나 다치지 말고
셋째로는 전리품을 바치여 인민들을 도와줍시다
3대규률 지키여가고 8항주의 잊지 맙시다
첫째로는 말을 할 때 겸손하며 인민들을 존중합시다
둘째로는 모든 물건을 공평하게 팔고삽시다
셋째로는 인민들의 물건을 빌려쓴 다음 돌려줍시다
넷째로는 손상된 물건 제값으로 변상합시다
다섯째는 구타욕설 하지 말고 군벌작풍을 극복합시다
여섯째는 행군전투 때 농작물을 애호합시다
일곱째는 녀성들을 존중하고 불량행위 하지 맙시다
여덟째는 포로들을 구박천대 하지 맙시다
우리모두 서로 돕고 통제하며 규률위반 하지 맙시다
혁명규율 명심하고 인민들을 사랑합시다
조국 위해 한몸바쳐 싸워갈 때 인민들은 환영합니다
2.2. 동영상
중국 인민해방군 군악대 가창
중국 인민해방군 군악대의 취주악 편곡판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