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락동-방이동 고분군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269호

'''270호'''

271호
하남 미사리 유적
'''서울 방이동 고분군'''
경희궁지

[image]
가락동 고분군의 분포도. 석촌동 고분군방이동 고분군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 개요
2. 가락동 고분군
2.1. 가락리 2호
2.2. 가락동 1, 2호
2.3. 잠실지구 발굴시 조사된 고분들
2.3.1. 가락동 3호분
2.3.2. 가락동 4호분
2.3.3. 가락동 5호분
2.3.4. 가락동 6호분
3. 방이동 고분군
3.1. 조사경과 및 내용
3.1.1. 방이동 1호
3.1.2. 방이동 3호
3.1.3. 방이동 4호
3.1.4. 방이동 6호
3.1.5. 방이동 2호분
3.2. 미조사 고분
3.2.1. 방이동7,8호분
3.2.2. 방이동9,10호분
4. 축조 주체의 문제
5. 석실의 구조에 대한 분석
6. 방이동 출토 신라토기
7. 석실 재 사용의 문제
8. 한성기 백제 중앙의 석실 도입의 문제
9. 결론


1. 개요


석촌동 고분군과 더불어 한성 백제의 중심 고분군으로 '''여겨졌던''' 고분군 . 일제강점기 지도를 보면 수십기의 봉토분이 잔존해 있었지만, 지금은 고분군 전체 서북쪽의 4기의 발굴고분과 4기의 미발굴 고분만이 보존되어있다.
'''백제, 신라 고고학의 뜨거운 감자'''이다. 하술하겠지만 이 고분군 축조 세력에 대한 논란이 있다. 통설대로 백제로 볼 경우 한성기 수도의 석실분으로써 의미가 있다. 수정설대로 고구려-신라로 볼 경우 5세기 후엽 이 지역에 진출한 고구려와 6세기 중엽 한강유역에 진출한 신라의 지배양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최근에는 가락동3호분은 백제, 나머지는 신라로 보는 견해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모두 백제 고분으로 보는 논자 역시 만만치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8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집중 토론회가 있었다 . 수십년을 끌어온 논쟁인만큼 결론이 나오진 않았지만, 일단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은 백제 유적으로써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제외되었다. 신라파의 판정승.

현재는 방이동 고분군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여 8기의 무덤이 보존되어 있다.

2. 가락동 고분군


크게 4차례에 걸쳐서 조사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분포조사와 발굴조사,1960년대 가락동1,2호분 그리고 1970년대 잠실개발지구 발굴조사.
당시의 행정구역명을 따랐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가락동 고분군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사실 가락동1,2호분은 현재의 석촌동 고분군에 위치하며, 가락리 2호분은 위치를 알 수 없다. 그 외에 가락동 3호분은 석촌동 고분군의 동쪽 끝과 인접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4,5,6호분은 3호분과 동북쪽으로 약 500m 떨어져 현재 방이동 고분군과 사실상 같은 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즉, 가락동 1,2호분은 충적대지 상에 조성된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이며, 가락동 3호분은 그에 연한 석실고분, 가락동 4,5,6호분은 석촌동 고분군과는 별개로 방이동 고분군과 사실상 같은 고분군인 셈이다.
이런 점을 먼저 알아두고, 각 고분의 조사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2.1. 가락리 2호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석실이다. 현재 가락동 구 2호는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데, 아래의 가락동 5호분과 도면이 매우 유사하다. 학계에서는 가락동 구 2호가 현재의 가락동 5호분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2.2. 가락동 1, 2호


즙석봉토분. 정확한 위치는 보고서를 봐야하지만 보고서가 없다.

2.3. 잠실지구 발굴시 조사된 고분들


[image]

2.3.1. 가락동 3호분


주요한 쟁점이 되는 석실 중의 하나. 신라토기와 함께 백제 고분에서 널리 쓰이던 방두형관정이 출토된 고분이다. 백제석실을 신라인이 재사용하였다는 '재사용설'의 주요 근거로 제시되는 고분이다.
분포도에 보이듯이 다른 고분과 떨어져 혼자서 산지에 입지하는거 같지만, 봉토가 없고 지하에 현실을 시설하는 백제 석실분 특성상 당시의 날림 조사방법과 수준으로는 주변 고분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실제로는 연기 송원리 고분군처럼 주변에 많은 석실분, 석곽분이 고분군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가락동 3호분도 조사단이 완전히 놓친 고분으로, 가락동 4,5,6호분 발굴 작업 중, 벽석을 조사하던 인부가 "어? 이거 내 텃밭에도 있는데?" 해서 조사단이 현장을 답사해서 트렌치 조사를 해서야 찾은 고분이다(...).
고분자체는 현실 가로세로 3m 이상의 대형의 현실에 우편재 연도가 달린 대형석실분으로, 다른 가락동, 방이동 석실분과 다르게 얇은 판석을 쌓아 올렸으며, 현실이 부푸는 듯한 형상의 동장설계도 관찰된다. 또한 천정부 가구 방식도 다른 고분과 다르게 사변석을 이용하여 면을 다듬으면서 궁륭상 천정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이만한 크기의 석실분은 한성기 백제에서는 연기 송원리 KM-016호분, 화성 왕림리 석실분 정도이며, 웅진기에는 송산리 1,2,3,4호분이 비슷한 크기이다. 신라 고분으로 볼 경우에는 최고 위계 고분인 경주 장산 토우총, 황성동 석실분, 전헌강왕릉 석실분보다도 훨씬 큰 대형이다. 이 고분 축조주체가 백제이든, 신라이든 최고위계 석실분이라는 소리.
밑에 축조주체 논쟁 부분에서 자세히 하술하겠지만, 대부분의 논자가 이 고분만큼은 백제 고분이라고 공히 인정한다. 다른 가락동-방이동 고분과 떨어져 위치한 입지, 석촌동 고분군과의 인접성, 그리고 지하식 현실의 동장형 현실구조, 사변석의 사용과 방두형 관정의 출토가 그 주요 근거이다.

2.3.2. 가락동 4호분


주요한 쟁점이 되는 석실 중의 하나. 삐딱한 묘도를 갖는 특이한 형태의 석실로써 신라 석실, 백제 석실 모두 확인되는 현상이다.

2.3.3. 가락동 5호분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구 2호분으로 추정되는 석실.

2.3.4. 가락동 6호분


파괴가 심하여 석실의 바닥면만 조사된 석실로써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하다보니 논의의 대상에서는 비교적 거론되지 않는 편에 속한다.

3. 방이동 고분군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270호'''
'''서울 방이동 고분군'''
서울 芳荑洞 古墳群

[ 펼치기 · 접기 ]
'''소재지'''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125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면적'''
31\,154㎡
'''지정연도'''
1979년 12월 28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image]
방이동 고분군의 서북쪽 고분군. 파란색 갑바가 씌워진 것이 방이동 1호[1], 그 뒤로 2호와 3호[2], 가장 오른쪽의 것이 6호분이다.
방이동 고분군이라고 하면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가락동 일대에 걸쳐 형성된 높지 않은 구릉지대에 위치하는 고분군으로 모두 8기의 삼국시대 고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분군을 지칭한다.
1917년에 가락동 고분군과 함께 방이동의 고분들이 처음으로 확인이 되었으며 이후 70년대에 들어서 국립중앙박물관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조사되면서 총 8기의 고분 가운데 1호, 4호, 5호, 6호를 조사하였다. 이후 한동안 발굴이 없다가 최근에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서 방이동 3호분이 조사되었다. 위의 사진 중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방이동 3호분이다. 한성백제박물관 홈페이지의 왕도 유적 가상체험 페이지에서 실감나게 볼 수 있다.[3]
방이동 고분군은 소재지의 남서쪽에 연이어져 있는 가락동 고분군과 성격이 비슷한 관계로 학계에서는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image]
방이동 고분군은 1~8호까지 확인이 되었고 발굴된 것은 5기이다. 1호와 3호, 4호, 6호는 석실이며, 5호는 석곽이고 2호는 발굴되지 않았다.

3.1. 조사경과 및 내용


1970년대 잠실지구를 개발하면서 급속하게(...) 발굴 조사가 행해졌다. 방이동 고분군은 상기 가락동3,4,5,6 호분과 같이 조사되었다.
당시 발굴의 수준은 수백미터 간격으로 탐색 트렌치(구덩이)를 파거나, 육안 관찰로 봉분이나 유물산포지를 확인하고 발굴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수많은 유적들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나 날림으로 했는지 일제강점기때 조사된 분포도에 표시된 고분의 반의 반 정도 조사했을 뿐이었다[4][5]

3.1.1. 방이동 1호


[image]
방이동 1호분의 도면[출처]

3.1.2. 방이동 3호


한성백제박물관 VR조사 내용 참고

3.1.3. 방이동 4호


[image]
방이동 4호분의 도면[출처]

3.1.4. 방이동 6호


[image]
방이동 6호분의 도면[출처]

3.1.5. 방이동 2호분


2017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조사

3.2. 미조사 고분



3.2.1. 방이동7,8호분



3.2.2. 방이동9,10호분



4. 축조 주체의 문제


방이동 고분군의 여러 고분들은 다른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 경주 대릉원과 같은 화려한 왕족의 고분들에 비해서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물론 잔디깔린 무덤이라는 점은 한결같이 같지만 대중적인 관심을 이끌만한 유물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대부분 후장을 하지 않는 석실이라 부장품이 많이 없고, 석실이다보니 도굴이 용이하여 이미 역사시대를 거치며 다 털린 지 오래고 현대에 출토된 유물이 소량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성기 백제 석실의 자료가 비교적 영성한 탓에 신라와 구분되는 석실의 특징[6]을 쉽게 찾기 어려우며, 석실의 특징상 도굴이 쉽기 때문에 연대를 특정할만한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석실의 축조 주체에 대한 판별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방이동 고분군이 백제 고고학에 관하여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일찍이 백제 고분 문화의 전개 과정을 방이동 고분군과 가락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가 백제라는 것에 대한 찬성론과 부정론 이 나뉜 상태에서 이후 웅진기, 사비기 백제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와 관련된 논의는 여전히 주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방이동 고분군이 일견 유적 자체만 볼 때는 별 볼 일 없는 유적일 수 있지만 연결된 여러 분석들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축조 주체의 문제는 현재에 접어들어서는 백제 고분군이냐 신라(또는 고구려 혼재)의 고분군이냐의 문제로까지 세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기존에는 거의 다 백제의 것 또는 신라의 것으로 보다가 현재 학계에서는 가락동 고분군까지 포함하여 가락동 3호는 백제, 방이동 5호의 수혈식 석곽은 신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다만 세부적으로 논자마다의 개별 고분마다의 설정이 다소간 차이가 있다.
나아가 논의 자체가 백제냐 신라냐를 넘어서 석촌동 고분군과 가락동 서쪽의 일부 고분군이 백제의 고분군이고 방이동 고분군이 신라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고분군이라는 설과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 전체가 원래 백제의 고분군이지만 신라인들이 이를 일부 재사용하면서 신라 고분군'처럼' 보이게 한다는 견해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나아가 석실 재사용론을 인정하면서도 백제 고분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이하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를 백제로 보는 측을 '''인정론''',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여러 세력이 축조 주체로 관여한 결과로 보는 측을 '''부정론'''으로 구분한다. 다만 인정론/부정론으로 구분하더라도 세부적인 견해는 인정과 부정이라는 각각의 큰 틀 속에서 논자마다의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주요한 견해만 서술하는 것으로 한다. 또한 특정한 주장과 반론, 재반론 등은 아직 완전히 인정받는다고 할만한 결론이 도출된 것이 아니므로 각 입장에서의 주장을 소개하는 형태로 서술한다.

5. 석실의 구조에 대한 분석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에서 확인되는 석실 및 출토 유물에 대한 분석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이 증가한 자료들과 함께 아울러 볼 때 백제의 석실이 아니라 신라의 석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가락동 방이동의 축조 주체의 판별에 대한 문제가 점차 점화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원래 다양할 수 밖에 없는데, 위의 본문중에도 있듯이 "우리는 ㅇㅇ국 사람이니 ㅇㅇ국 스럽게 만들자"라는 식으로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횡혈식 장법이라하면 생긴게 다 비슷하다. 그렇다보니 석실의 구조 분석은 정답 없이 다양한 토론이 오가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도 주된 기준이 있다면 평면형태와 묘도의 양상 등이었다. 다만 최근에는 입체적 구조물인 석실을 평면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지적 속에서 천장가구의 형태나 장단벽의 장동화[7]의 정도 등의 여러 기준이 보완되어 분석되고 있는 편이다.
또 묘도의 위치, 가락동 0호의 삐딱한 묘도부터 시작하여 우편재, 좌편재, 중앙연도 등의 구분마저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나아가 수평묘도냐 경사묘도냐의 구분까지도 추가되어 검토되기도 하였다.
논의된 여러 주요한 구조적 속성 중 하나로는 '''배수로의 여부'''로써 여러 쟁점 중의 하나다. '''인정론'''에서는 이러한 배수시설의 존재가 신라 석실의 구조적 속성에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신라 석실의 특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부정론'''에서는 한성기 백제 석실의 특징으로 경사묘도[8]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경사묘도라는 것이 현실 내부로 들어가는 무덤길이 내부로 기울어진 형태로써 묘도를 따라서 배수되는 형태의 배수로를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전형적인 신라석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까지 이어지면서 전형적인 신라 석실 고분군인 충주누암리 고분군이나 경주 금척리 고분군의 뒤에 있는 방내리 고분군의 구조까지 거론되었다. 누암리 고분군 및 방내리 고분군에서도 방이동 4호에서 보이는 배수시설이 확인되면서 부정론의 주장을 뒷받침 하였다.
다만 일정한 견해가 모아진 것은 아니고 사실상 인정론과 부정론 모두 석실에 대한 각 입장에서의 사용하던 분석 기준을 추구하다보니 석실 구조 분석으로는 토론이라기보다는 대립만 하고 있는 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의 부가적인 논의까지 추가적으로 인용되면서 석실 분석의 판별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타당함을 따지기도 하는데.. 여하간 점진적으로 다양한 주제에서 논의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6. 방이동 출토 신라토기


방이동 고분군에서는 1호분에서 토기 3점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정식 발굴을 통한 유물은 아니였지만 이후 신고에 의해서 입수된 것으로 처음에는 백제 토기로 보고되었으나 추후에 이 토기들이 신라토기인 것이 밝혀지면서 방이동 1호를 백제의 석실로 판단하였던 주장과 방이동 1호를 신라의 석실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하게 되었다.
토기에 대한 첫 판별 당시에는 발굴자료 및 연구 성과가 적었던 시절이다보니 그럴 수 있었던 일이 었다. 이후 후기 양식의 신라토기에 대한 연구가 누적되면서 방이동 1호 및 방이동 출토 토기를 신라로 보아야한다는 견해가 제기된 것이 었다. 백제 석실을 주장하던 연구자들도 토기에 대한 인식을 백제가 아닌 신라 토기임을 인정하는 견해로 일부 수정하기도 하였다.
신라토기임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방이동 고분군은 "석실"이라는 점으로 "추가장"을 염두에 둔 시설이라는 것이다. 석실은 소위 폐기의 동시성이라는 것이 확보되지 않으므로 신라 토기가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이 고분을 처음 만들 때 넣었던 부장품이 아닐 수 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토기의 존재로 하여금 축조 주체의 문제는 "신라의 석실 재사용"이라는 쟁점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7. 석실 재 사용의 문제


위의 토기의 판별과 관련된 문제의 연장선으로써 백제인의 석실을 신라인이 한성을 점령하면서 다시 사용한다는 주장 속에서 개진된 것이다. 특히나 이 논의가 나올 즈음에는 서울 우면동 고분군 및 서울 경기 남부 각지에서 한성기 백제 석실이 확인되면서 다각적인 비교검토가 가능해졌던 시점이었으며 '''석실의 재사용'''을 알아볼 자료들이 추가되어 이러한 논의가 진전될 수 있었다.
몇 백제 석실에서도 신라 토기가 매납되어 있는 경우가 확인되었었다. 청원 주성리 1호, 안성 장원리 2, 3호 등의 고분이 바로 그러한 사례로 백제 석실에 신라 토기가 매납되는 현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발굴결과를 살펴보면 석실 내부의 바닥의 층위를 살펴보면 기존의 백제 토기가 매납된 층 위로 신라 토기가 매납된 층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인정론'''의 입장을 취하는 측에서는 백제인의 시신이 놓인 시상대(屍床臺)를 흙으로 덮고 새로 신라인이 자신들의 무덤을 쓴다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사망자를 위한 매장 시설을 마련할 여건이 없음을 이유로 기존의 백제 석실을 사용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백제 권역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권 석실에서도 가야인들이 사용하던 석실에 신라 토기가 매납되거나 하는 현상이 상당수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이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신라토기는 신라인에 의해서 재사용되면서 나타난 것일 뿐 원래의 석실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부정론'''에서는 일부 고분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었다. 더 적극적인 반론으로는 나라만 신라로 바뀌어 신라토기를 매납하였지 그들의 가족관계는 계속 이어진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부정론의 가족관계를 계승한다는 관점은 결과적으로 석실 재사용론이 위의 가락동 방이동 출토 신라토기와 관련된 석실의 국적 판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반박할 타당한 근거가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인정론'''에서는 백제 유물이 포함된 층위(백제 시상대 포함)를 덮는 현상에 대해서 적대적 행위로써 규정한 반면 '''부정론'''에서는 이를 아래와 같이 분석하였다.
  • 첫번째 인물이 사망하여
    • 1차장 : 시신을 안치할 시상대(屍床臺)를 마련한다. 백제 토기가 매납된다.
  • 이후 연속적으로
    • 2차장 : 시신을 추가로 안치할 시상대를 또 마련한다. 백제 토기가 매납된다.
    • 2+a차장 : 석실 내부 공간 부족으로 인해서 석실의 바닥을 새로이 정리하고 다시 시상대를 마련한다. 백제토기가 매납된다.
      • 수 차례의 추가장 중 부패한 시신은 습골장(拾骨葬)[9]의 맥락에서 따로 인골을 모아 토기 안에 담아 정리한다.
  • 가장 끝으로
    • n차장 : 석실의 바닥을 정리하고 다시 시상대를 마련한다. 신라토기가 매납된다.
즉 가족장, 추가장을 위한 석실 내부의 공간 부족 현상에 따른 과정에서 나타는 현상이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소위 습골장의 과정에서 끝에는 꼭 신라토기가 매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빼박 백제 석실, 빼박 신라 석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당대에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8. 한성기 백제 중앙의 석실 도입의 문제


방이동 고분군에 대한 인식과 분석 초창기에는 석실의 도입, 즉 새로운 장법의 등장은 해당 국가의 대내외적인 교류망의 수준이나 선진화의 척도로 보는 경향도 있다보니 백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입장에서는 한성기에 석실이 존재하였음을 반드시 상정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 우면동 고분군을 비롯한 빼박 한성기 백제 석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한 요건은 아니다. 다만 백제 중앙, 다시말해 백제의 왕묘역이라할만한 곳에서 석실이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논의가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와 관련된 논쟁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의 관전포인트로써 참고해둘만 하다.
나아가 가락동 및 방이동 고분군의 석실이 한성기(475년 이전)이라고 고정할 수 있게되면 백제 중앙의 석실로 볼 수 있는 것이며, 백제의 석실 도입과 관련하여 낙랑과 관련된 석실의 도입과정에 대한 문제가 비교적 말끔(?)하게 설명되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하다.

9. 결론


지금까지의 정리된 결론은 가락동의 서쪽 고분군은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성격의 백제 고분군, 가락동 동북쪽 고분군 및 방이동 고분군은 백제의 가능성을 일부 갖고 있지만 신라/고구려 석실로 보는 것이 다소 대세적이다. 상술했다시피 인정론도 처음에는 다 백제고분군이었다가 견해의 일부 수정을 거치면서 몇몇 석실의 경우 신라 및 고구려 석실임을 인정하는 쪽으로 노선을 살짝 바꾼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인정론과 부정론이 가락동 방이동의 특정한 몇기의 고분이 백제냐 아니냐를 두고 논박하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 전체의 성격이 고백신 모두 띄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추가로 한성백제박물관의 방이동 3호의 발굴을 착수하게된 결심의 원인 중의 하나가 이러한 축조 주체의 문제를 해소할 단초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되려 더 많은 학술토론을 격발되는 촉매가 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원래는 사적 명칭을 서울 방이동 백제 고분군으로 정하려다가 위와 같은 축조 주체의 복합적 상황 때문에 그냥 서울 방이동 고분군이라고 정했다. 참고
[1] 당시 우천으로 봉분이 유실되어 정비 공사를 하고 있었다.[2] 사진 각도 때문에 잘 안보이지만 가운데 고분을 잘 보면 2기가 겹쳐서 찍힌 것이 보인다.[3] 링크로 말고 홈페이지에서 직접 들어갈 경우 백제학 연구>백제왕도유적 발굴조사> 왕도 유적 가상체험에서 볼 수 있다. 팝업허용을 눌러놔야 원활하게 들어갈 수 있다.[4] 당시 일제강점기 조사 도면자료는 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연구자들은 이를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5] 특히 외따로 떨어진 가락동 3호분 주변에서 수많은 백제 고분이 소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락동 3호분과 같은 백제 횡혈식석실분은 표면상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지하식인데다가, 봉분도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출처] A B C 김규운, 2014,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으로 본 백제 횡혈식 석실의 성립과 전개, 선사와 고대 40호 에서 수정 후 인용, 원도 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단, 1977, 1978[6] 특히나 당대의 사람들이 “우리는 신라 소속이니깐 신라스럽게 무덤을 만들자”라는 식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축조 주체와 사용주체 등을 판별하는 것은 관심을 갖는 각계 연구자들의 몫이기도 하다.[7] 일찍이 한성기 석실의 특징 중의 하나로 거론되었던 것이기도 하다.[8] 위의 각 석실들의 도면을 참고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모두 평면묘도이다. 즉 백제 석실이 아님을 뜻한다. 당연히 인정론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9] 뼈만 남은 상태의 시신을 뼈만 다시 모아서 항아리 같은 곳에 담아서 정리하는 형태의 장법을 뜻한다. 실제로 석실의 한쪽 모서리에서 인골편이 비교적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 이를 통해 추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