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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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제24대 임금 진흥왕이 6세기 중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관산성 전투에서 물리치고 새로 정복한 한반도 중부지방의 한강 유역을 직접 순시하고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설치한 비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 4기 중 하나이다.
또한 세워진지 천년 가량의 오랜 세월이 흘러 어떤 비석인지도 잊혀 있었던 것을,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추사 김정희가 직접 비봉 정상에 올라가서 비문을 해독하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역사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고구려와 백제에게서 빼앗은 후 그 영토를 선포하기 위하여 세운 순수비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한산 비봉(560m)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가 1972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긴 이후, 지금까지 계속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험준한 산봉우리 암반 정상에 있다 보니 신라 멸망 이후 잊혀졌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근에 승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막연히 무학대사의 비라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서유구가 처음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고, 1817년 7월 21일에는 금석학자 김정희가 비문 해독에 성공해, 마침내 이 비석의 가치가 드러났다. 이때 김정희는 기쁜 나머지 비석 옆면에 해설을 새겼는데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문화재 훼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저 어디에나 있는 지형지물일 뿐이었다. 고구려의 비석인지도 잊히고 마을 주민들에게는 선돌 정도로 인식되어 오던 충주 고구려비나 빨래판 신세로 전락했던 지안고구려비보단 나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누군가 낙서를 하면 반달리즘이겠지만 이건 과거 유명인물이 쓴 글씨라 이 글씨 또한 역사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1]
조선시대에 김정희가 비석 옆면에 새긴 글은 다음과 같다.
그는 고고학적 흥미가 생겼는지, 이듬해 다시 비봉을 방문해 그 옆에 또 글을 썼다[3]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
이 와서 읽고 감.
김정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재치를 발휘해, 비석의 탁본을 떠서 자신의 책에 실었다. 돌로 만든 비문이 이 상태로 더 있다가는 언젠가 풍화되어 소실될 것임을 감안하면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이제 와서는 19세기 김정희 이후로 2백여 년간 추가로 풍화되어 비문을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김정희의 연구는 금석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김정희가 펴낸 논문에 대해서는 금석과안록 참조. 이후 용인 사람 이제현이 비봉을 올라 글을 남겼는데, 위 사진에서 김정희가 쓴 양 문장 중간 희미한 줄이 그것이다.'''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
정축년(1817)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식별가능한 68자를 해독함.
비석 하단에 깨져 나간 부분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연유를 알 수 없다. 비석 상단에 크게 난 금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두동강 난 채 비봉 서쪽 30 km 밖에 굴러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해 다시 붙여놓은 것이나 #, 금 자체는 1916년에 찍힌 사진에도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에 이미 한 차례 이전에도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원래 비석 위에 지붕돌을 꽂았던 흔적이 있어 지붕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또한 비석의 뒷면을 보면 유난히 파인 자국이 많이 있는데, 이는 6.25 전쟁 후반 잦은 고지전 때 도비탄에 맞은 흔적이다. 여러모로 한국의 수난사를 잘 간직한 보물이다.
대한민국 시대에 들어서, 접근이 어려운 실외에 계속 방치하다가는 풍화 및 붕괴 위험이 있다는 당시 문화공보부의 판단 아래 1972년 8월 16일부터 8월 25일까지 산 위의 비석을 분리해 운반하는 프로젝트를 단행, 경복궁 종합박물관 수장고로 옮기는 데 성공했고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신라관에 전시해 현재에 이른다. 원래 비석이 있던 비봉 위에는 원본보다 약간 작은 레플리카를 설치했는데, 잔금 하나까지 굉장히 잘 복제했으므로 등산할 일이 있다면 보고 오는 것도 좋다. 순수비 실물이 국보로 지정된 것과 별개로 순수비가 있던 비봉도 사적 제228호 진흥왕 순수비 유지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비봉(碑峯)이라는 봉우리 이름은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데서 유래했다. 비석이 있던 비봉 정상은 그냥 하이킹한다는 생각으로 올라가면 피본다. 해발 560 m 지점이지만 여기 올라가려면 거의 암벽등반을 해야 한다. 다만 저곳에 올라가면 서울 도심과 한강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
3. 건립 시기
흔히 진흥왕이 555년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비문에서는 '''건립년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른 순수비처럼 이것도 세운 시기를 기록하기는 했을 테지만 현재는 해당 부분이 풍화되어 판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555년설이 제기되는 이유는 '삼국사기 진흥왕 16년(555)' 기사에 '(왕이) 북한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에 555년으로 추측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북한산과 직접 관련된 기록이 하나밖에 없으니 진흥왕이 딱 이 때 북한산에 왔으며, 와서 비석도 세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혀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6년(555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555년에 북한산에 행차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555년 10~11월 사이에 순수비가 건립되었다.'에 대한 참・거짓은 판별할 수 없다. 순수비는 왕이 순수(행차)했다는 일을 나타내므로, 진흥왕이 재위기간 수십 년 동안 북한산을 더 방문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만을 근거로 555년이라고 추정하기에는 삼국사기에 나머지 순수비를 세운 창녕, 황초령, 마운령을 방문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문제시된다.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復一年租調, 曲赦除二罪皆原之.
'''11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서 돌아왔는데, 거쳐 지나온 주(州)와 군(郡)의 1년 동안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고, (그 지역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의 사형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6년(555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沙湌)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8년(557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에서 북한산이라는 어휘는 2년 후에 행정구역을 북한산주로 명명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이 북한산주는 약 10년 뒤인 568년에 폐지되어 남천주로 재개편되는데, 일부 학계에서는 이것이 순수비의 건립년도를 짐작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기도 한다. 순수비 비문에도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관직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순수비가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같이 '''568년 또는 그 이후'''에 건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 이 쪽의 설이 555년보다 먼저인데, 대표적인 학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비석을 처음으로 조사했던 추사 김정희로 그의 논문인 금석과안록에서 이렇게 추정했다.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겨울 10월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29년(568년) 中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렇게 건립년도가 정확하지 않음에도 어쩐 일인지 각종 교과서와 시험에 등장하는데, 공식적인 기관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다. 후속 연구나 발굴로 순수비가 다른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역사 왜곡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상세내용 불명'으로 남겨두는 것이 상식이고, 교과서에 연도를 명기하거나 시험 문제로 출제해서는 안 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이 순수비의 건립년도를 묻는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555년을 정답으로 인정해 버렸다. 시험의 평가가 한국사 본래의 목적을 압도해 버린 셈이다.
4. 내용
진흥왕의 행차 사실과, 진흥왕을 보좌한 대신들의 이름과 직책을 열거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으로는 새로 신라로 편입한 지역의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인'에 대한 기록으로, 단순히 진흥왕이 영토를 확보하는 데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피정복민)에 대한 교화에도 신경 썼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 왕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지워져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마운령비 같은 다른 순수비에 남아있는 수행인 명단을 참고하면 여기에도 승려, 약사, 점쟁이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동행시켜 현지인의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5. 국보 제3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세운 순수척경비(巡狩拓境碑) 가운데 하나로,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碑)를 보존하기 위하여 경복궁에 옮겨 놓았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의 형태는 직사각형의 다듬어진 돌을 사용하였으며,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윗부분이 일부 없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m, 너비 69㎝이며, 비에 쓰여져 있는 글은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내용으로는 왕이 지방을 방문하는 목적과 비를 세우게 된 까닭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비문에 새겨진 연호가 닳아 없어져 확실하지 않으나, 창녕 신라 진흥황 척경비(국보 33호)가 건립된 진흥왕 22년(561)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진흥왕 29년(568) 사이에 세워졌거나 그 이후로 짐작하고 있다.
조선 순조 16년(1816)에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고 판독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비에 새겨진 당시의 역사적 사실 등은 삼국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