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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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제7대 황제. 이름은 이형(李亨). 당현종 이융기의 아들로, 어머니는 원헌황후 양씨이다. 묘호는 숙종이며, 시호는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로 줄여서 선황제(宣皇帝). 초명은 이여(李與).
2. 생애
2.1. 분조의 편성과 즉위
그가 즉위하게 된 배경은 756년 6월, 안록산의 난으로 현종이 촉(쓰촨)으로 피신하면서 관중에 태자를 남겨놓고 분조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이 태자, 충왕 이형이 삭방 번진으로 패잔병을 모아 북상하면서 금군의 추대로 피난지 영무에서 7월 12일 황제로 즉위한다.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8월 12일에야 이 소식을 들은 현종은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선뜻 양위해 태상황에 오르면서 논란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이후에도 숙종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즉위시킨 신하들을 방위를 위해 이곳저곳에 배치하고 나자 문무 관원이 30명이 안될 정도로 분조의 규모는 조촐해졌으며 풀밭에서 조정을 세워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해졌다. 사람 손이 워낙에 없다 보니 심지어 아내인 장 황후(장량제)는 영무에서 자식을 낳고 4일 만에 일어나서 병사들의 옷을 꿰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4]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숙종은 박릉을 포위하고 있던 곽자의, 이광필. 그리고 안서 번진, 하서 번진 등에 명령해 병사들을 이끌고 영무에 오도록 했으며[5] , 오랜 친구인 명신 이필을 불러들여 그나마 조정의 위엄을 조금씩 세워가게 된다. 또한 제오기를 기용, 소금 전매법을 실시해 재정을 보충하기도 했다.
이로써 안록산의 거병의 의의는 퇴색되었고, 곧 안록산이 칭제하면서 민심은 당 조정으로 기울게 되었다. 또한 안록산이 낙양에만 머물며 장안을 비워둔 것도 관중의 민심이 안록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는 결정타가 되었다.
2.2. 반격과 양경 회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즉위한 756년 하반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하북이 넘어감은 물론 숙종이 직접 뽑은 장안 수복군 대장 방관의 삽질과 동생인 영왕 이린의 강남 독립 움직임으로 상황은 불리해진 것이다. 그러나 곽자의, 이광필의 활약 및 이필의 책략과 복고회은을 통한 회흘(위구르 제국)의 지원으로 상황은 점점 숙종에게 유리해졌다.[6] 757년 안록산이 안경서에게 살해된 뒤 이광필은 태원을 지켜내고 채희덕을 박살냈으며, 장안 근교의 봉상(鳳翔)으로 행재소(임시 수도)를 옮긴 숙종은 그 해 10월 양경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숙종은 봉상을 떠나 10월 27일 장안에 입성했고, 757년 12월, 근 1년 반만에 숙종과 태상황 현종은 장안에 입성한다. 하지만 돌아온 현종은 숙종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숙종의 권력이 삐걱거렸고, 사사명의 투항이 반란의 종결을 의미하는 줄 착각한 것이 사사명의 난으로 이어지는 큰 원인이 되었다.
2.3. 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죽다
758년 정월, 숙종은 연호를 건원(乾元)으로 바꾸고, 2월에 천보 3년 이후 '년(年)'을 재(載)로 세던 것을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이렇게 758년은 건원 원년이 되었다. 하지만 범양 절도사로 봉해졌던 사사명을 팽하려고 시도했던게 들통나면서[7] 사사명은 범양에서 재봉기하여 업의 안경서를 구원해버렸고, 그걸 막으려던 60만 당군이 지휘관 부재로 13만 사사명군에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에 숙종은 (모함 등의 이유도 있지만) 곽자의를 원수에서 물리고 삭방 절도사/병마 원수에 이광필을 임명했다.
한편 사사명은 759년 3월 사용 가치가 끝난 안경서를 참살하고 스스로 연의 3대 황제를 자칭하며, 이미 죽은 안록산을 태상황으로 추존했다. 하지만 761년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사사명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다. 이런 와중에도 당은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는 군권을 장악한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 등에 의해 조정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보국은 760년 현종의 남아있는 강한 영향력을 두려워하던 숙종 주위의 분위기를 이용해 흥경궁의 현종을 감로전에 유폐시키고, 고력사 등을 귀양, 안진경을 좌천시켰다. 숙종이 현종의 유폐를 반대해도 이미 막을 수 없었고, 현종의 알현마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당 숙종은 병이 났고, 점점 깊어만 갔다. 이보국은 762년에 둘째 황자인 건녕왕 이담을 모함으로 죽여버렸고, 뒤이어 당 현종이 5월 3일, 감로전에서 승하한다. 이 상황에서 이보국과 손을 잡고 있던 장 황후가 환관 단항준과 공모해 5월 16일에 이보국과 태자를 죽이고, 셋째인 월왕 이계(越王 李係)를 황제로 삼으려고 하자 이번엔 황후와 월왕마저 유폐시킨다. 이 충격으로 숙종 역시 5월 18일 승하하고[8] 5월 20일 태자인 이예가 즉위하니 그가 당대종이다. 한편 이보국은 대종의 즉위 과정에서 황후와 월왕, 연왕 이현을 참살해 위협을 제거하고, 당 숙종은 물론 당 대종도 즉위시키는데 성공함으로서 세도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으나, 손을 잡았던 정원진에 의해 한 달 만에 실각하고 몇 달 뒤 암살당한다. 하지만 이보국은 '''환관의 손으로 최초로 황제를 즉위시키는''' 기록을 세우면서 앞으로의 환관 세도를 예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중당의 혼란을 야기한 혼군
늙은 당 현종이 제국을 망쳐놓은 상황에서 분조를 조직하고 당 황실을 살려낸 공로는 있었으나 용인에서 많은 실수가 있었다. 친구인 이필을 중용한 것은 분명 잘한 것이었으나, 섣부른 장안 공격의 책임자를 방관으로 한 것, 범양 공격을 막고 양경(낙양-장안)의 수복에 집착한 것[9] , 반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 끝난 것처럼 뒷처리에 들어간 것 등 미스가 많았다. 이필을 뽑아놓고 그의 조언을 상당부분 뒤집은 셈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앞서 말했듯 재위 후반에는 환관 이보국과 장 황후에 휘둘렸고, 특히 적장자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 후의 당대종 이예李豫)을 원수로 삼을 때를 전후로 이전에 군공을 세운 것 때문에 후계자 다툼을 할지 모른다고 여긴 둘째 건녕왕(建寧王) 이담(李倓)을 이보국과 장 황후의 참소만 듣고 기어이 죽여버렸다[10] . 또한 사사명이 다시 난을 일으키도록 빌미를 제공하고, 안양하 대전에서 60만의 참패를 빚은 것도 '''총지휘관을 일부러 선임하지 않은''' 숙종의 탓이었다. (이때 관군 용사 환관 어조은도 처벌을 받지 않아 대종 대까지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절도사에 대한 대접이 소홀했으니 절도사들이 등을 돌리는건 당연한 일. 게다가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국경을 지키는 군대들을 내란 해결에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회흘과 토번까지 끌여들였으니, 결국 중기 (이후 말기까지의) 당나라의 거의 모든 문제(절도사, 회흘/토번, 환관, 외척)들이 숙종의 손을 거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용두사미 격의 혼군. 현종 말년이 하도 막장 이미지라 그렇지 도리어 사태를 키워놓은 것은 숙종의 탓이 크다. 물론 최악의 막장 상황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으며, 오래 재위하지 못한 탓도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전란으로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분조를 운영했으나, 아버지의 위세에 눌려있었고, 말년에 국사를 망치고 궁중과 권신들에게 휘둘렸다는 점은 조선의 광해군과 흡사한 면이 있다. 물론 광해군은 아예 폐위됐으니 그나마 좀 나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습게도 자식을 죽인 숙종 역시 피해자인데 유년시절 형과 동생들이 기어이 아버지손에 죽임을 당하는것을 목격했고 동생이 부인을 아버지에게 빼앗기는 광경을 보는등 숙종 역시 아버지인 현종에 의해 형제들을 많이 잃어버린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낸인물인데 본인이 아버지인 현종이 했던 실수를 반복한것이다 즉 가해자가 된 피해자이다.
4. 고려와의 연관
한국사에서 가장 큰 떡밥은 그가 고려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아버지라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 고려의 전설을 바탕으로 기록한 본국편년강목, 편년통록,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는 그를 태조 왕건의 증조부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말이 안된다. 앞에서 보듯 숙종은 안사의 난 이전엔 장안을 벗어난 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으며 그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난을 수습하느라 중국은 커녕 관중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신라에 가서 자식을 낳았을 리가 없다.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은 일개 지방 호족 출신으로 한 나라를 창건한 왕건의 집안이 사실은 다른 호족들과 같은 듣보잡이 아니라 당 황실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워 왕권을 높이려는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륭의 초명이 용건이고 이때까지 성씨도 제대로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 왕실의 성이 왕씨인 것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가 왕에게:
라고 물었는데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자 민지(閔漬)[11] 가 대신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 국사에 잘못 쓰인 것입니다. 사실은 당숙종이 아니고 당선종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제가 듣기로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의 숙종 황제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근거한 말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에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
이쯤 되면 단순한 진위 여부에서 나아가 국가의 위신까지 관계되고 말았으니 둘러댈 수밖에 없었긴 하다. 810년에 태어난 당 선종을 택하면 적어도 생몰년은 대강 들어맞고 증손 격인 왕건도 877년 생이니 대충 연도가 들어맞는다. 또한 선종은 젊을 때 황위와 거리가 멀어서 자유롭게 살다가 무종의 독살로 예기치 않게 즉위했으니 그 시절에 신라 땅까지 돌아다녔을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신빙성(?)은 생긴다. 원나라 한림학사 역시 민지의 대답을 듣고, '선종은 어렸을 때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고생 좀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고 납득하였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은 《왕대종족기》[12] 를 언급하며 당숙종이 증조부가 아니라 고조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고려 왕실의 모순을 쉴드쳐줄 이유가 없어진 조선왕조 때는 이런 설화를 모조리 부정했다. 하지만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니 세종대왕 때 정인지 등이 고쳐 쓴 고려사에는 당숙종 설화를 기록하여 논평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에 대한 계승의지를 가진 고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침략한 당나라 황제의 후손을 자칭한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신라를 공격한 건 당숙종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인 당고종이고, 당숙종 쯤 되면 신라는 물론이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의 적대관계도 어느 정도 누그러진 상태였다. [13][14]
일각에서는 고구려계 당나라 귀족이[15] 와전된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왕건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며 고려사를 중국에 귀속된 역사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속설이 사실이라고 쳐도 왕건의 중국 혈통은 전체의 1/16도 되지 않고, 국가 정체성도 고구려 계승으로 정했지 당나라 계승으로 정하지 않았다.
5. 둘러보기(계보)
[1] n재를 폐기하고 n년으로 회귀하였다.[2] 혹은 음력 5월 16일. 당 현종이 죽은지 13일만이란 것을 따른 것이다.[3] 당 현종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8월 12일.[4] 장 황후가 아닌 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5] 하지만 이 때문에 박릉의 사사명이 포위에서 풀려나게 되고, 안진경의 의용병이 괴멸되면서 기어이 하북이 안록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6] 숙종이 장안 수복시 약탈도 허용한다는 식으로 직접 청한 것이었다. (약탈은 광평왕, 즉 당 대종이 막아냈다.) 숙종은 토번에게도 '''조공하여'''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는 시의적절했으나 주변국에게 당의 약체화를 광고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7] 이때 사사명은 이광필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숙종이 그걸 들어줄 리 없었다.[8] 숙종이 독살당했다는 가설이 있다.[9] 범양 공격과 양경 탈환은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 쪽을 택하지 않았다고 잘못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숙종의 입장으로서는 당장 양경을 회복하고 조정의 권위도 회복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 난이 끝났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양경을 회복할 수는 있겠으나 난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필의 간언이 맞아 떨어진 것.[10] 그런데 정작 이담은 이숙과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 거기다 분조가 영무까지 도망갈때 습격받은 숙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창을 들고 상처까지 입어가면서도 숙종을 지킨 효자였다. 이런 효자를 후계자 다툼 할지 모른다며 대뜸 죽여버린건 정말이지... 이건 당현종보다 더하다. 최소한 당 현종은 쿠데타 의혹이 터진 다음에야 자식들을 사사했다. 정작 태자는 도리어 우애있던 친동생의 죽음에 두려워했으며, 이필은 후에 당숙종 본인에게도 이때 일을 가지고 비판하고, 손자인 당덕종과 이야기하면서 두고두고 깠다.[11] 본국편년강목의 저자.[12] 고려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 중 하나. 현재 전하지 않으며 고려사 등에서 이 책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13] 일본도 진무천황의 형이 신라왕실의 조상이라고 설명하기도 했고 당태종도 자신의 조상을 노자라고 주장하거나 금나라도 완안아골타의 조상이 고려 혹은 신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등, 군주의 조상의 출신을 타 민족과 연계하는 것은 당시 국가들에서 흔한 일이었다.[14] 어차피 정말 왕건의 증조부가 당나라 출신이라고 해도 왕건의 출신지는 고구려계 유민들이 많았던 지역이고 왕건 대쯤 되면 당나라보다는 고구려 혈통이나 정체성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15] 당나라는 번장제도등을 통해 이민족들을 수용하는 융화정책을 폈다.고사계나 고선지 부자, 왕사례등등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귀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