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중성 전투
1. 개요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위치한 칠중성(七重城)에서 고구려와 신라 간에 있었던 전투.
칠중성은 본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가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 때 신라에 편입되었다.[1] 임진강 중류의 남쪽 강가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어서 고구려가 남쪽으로 쳐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고 신라 입장에서는 핵심 방어선 중 하나였다. 이 칠중성 산성에 국한된 전투는 아니었지만 훗날 나당전쟁의 매소성 전투, 그리고 6.25 전쟁의 고랑포 전투와 설마리 전투도 이 곳 근처에서 벌어졌을 정도로 시대를 넘나드는 남북의 군사요충지가 파주 칠중성이었다.
2. 제1차 칠중성 전투(638년)
638년 음력 10월 겨울, 고구려 군대가 신라의 칠중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에 한강 유역을 잃은 뒤에도 온달 장군이나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한강 유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한강 유역 수복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칠중성의 신라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고, 선덕여왕은 대장군 알천에게 명해 동요한 백성을 안정시키게 했다.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대와 맞붙어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clearfix]
3. 제2차 칠중성 전투(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나당동맹에 대항해 백제와 고구려는 여제동맹 관계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여제동맹이 실질적인 동맹관계가 과연 맞는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660년 8월 백제의 멸망은 나당연합군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 하나가 줄어드는 것이고 고구려의 안보에도 나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 직후 옛 백제 땅에서는 귀실복신 등이 일어나 백제부흥운동이 진행되었고, 고구려는 백제 멸망의 보복으로 신라 북측을 공격해 백제 전선에 있던 신라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나아가 과거 신라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까지 조금씩 되찾으려 했다.
660년 10월 고구려군이 칠중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칠중성 성주는 필부(匹夫)였는데, 태종 무열왕이 충성스럽고 용맹한 인재로서 백제, 고구려, 말갈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유능한 인재를 수소문해 직접 앉힌 뛰어난 장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에 맞서 필부는 약 20일 간 수성전을 펼쳤다.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사기가 높아 함락시킬 수 없겠다며 포위를 풀고 철군하려 했는데, 고구려와 내통한 대나마(大奈麻) 비삽(比歃)이 몰래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칠중성 안의 식량이 떨어졌고 힘이 다했으니 다시 공격한다면 항복할 것이라고 알렸다. 고구려군이 이에 다시 칠중성을 공격했고, 필부는 전말을 눈치채고 비삽의 목을 베어 성 밖에 던졌다.이에 성 내 군사에게 고하기를,
이에 병든 사람까지 모두 일어나 성에 올라 싸웠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바람을 타고 화공을 하며 공격해 왔고, 병사의 기세가 피로하고 지쳐서 죽고 부상당한 자가 절반이 넘었다. 필부 등은 상처로 피가 흘러 뒤꿈치를 적실 정도까지 활을 쏘며 싸우다 죽었고 무열왕은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필부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했다.“충신과 의로운 사람은 죽어도 굽히지 않는다. 힘써 노력하라! 성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있다.”
4. 제3차 칠중성 전투(673년)
고구려부흥운동군과 당나라의 전투. 이근행의 당군이 고구려부흥군을 격파했다. 남은 고구려인들은 신라로 망명해 9서당에 흡수되어 당나라와 싸웠다.
5. 제4차 칠중성 전투(675년)
나당전쟁 당시 신라군과 당, 거란, 말갈 연합군의 전투. 칠중성을 포위했는데 신라군은 지방 장관인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당군을 격퇴했다.
6. 제5차 칠중성 전투?(1951년)
설마리 전투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