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타가야 일가족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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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田谷一家殺害事件.
2000년 일본 도쿄도세타가야구에서 일가족 4명이 살해당한 사건이다.
1. 개요
2. 사건 주변 환경
3. 시신의 상태
4. 당시의 상황
5. 범인상
5.1. 범인의 특징
6. 범인의 유류품
6.1. 범인의 이상한 점
6.2. 목격 정보
6.3. 범인은 한국인?
7. 인터넷의 범행 보고?
8. 그 밖의 이야기
9. 사건 발생 전 예고?
10. 사건 그 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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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31일 아침, 도쿄도 세타가야구(世田谷区) 가미소시가야(上祖師谷) 3정목(丁目) 23번지 6호 주택에서 미야자와 미키오(宮沢みきお, 당시 44세), 부인 야스코(泰子, 당시 41세), 딸 니이나(にいな, 당시 8세), 아들 레이(礼, 당시 6세)가 숨진 광경을 부인 야스코의 어머니가 발견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야스코의 어머니가 딸의 집에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여 방문해보니, 일가족이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2. 사건 주변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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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 내부도와 가택 외부.
미야자와 가족이 살던 곳은 카미소시가야(上祖師谷) 3번지에 위치했는데, 특이하게도 바로 옆 집과 딱 붙은 형태로 지운 2층 주택이었다. 이 옆집엔 부인 야스코의 친정어머니와 언니 부부가 살았다.[1] 이 주택지에는 200여 가구나 집들이 있었지만 공원 토지 확대 사업으로 재개발이 확정되어 다른 주민들은 이사를 갔기 때문에 사건 당시에는 불과 4가구밖에 없었다. 피해자 일가도 사건 4개월 뒤인 2001년 4월까지[2] 사이타마현으로 이사할 예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택 주변은 이미 집을 허문 곳도 있어 을씨년스러웠고 밤이 되면 아주 조용했다고 한다. 

3. 시신의 상태


1층 계단에서 발견된 미키오는 머리, 얼굴 등의 상반신과 엉덩이, 다리를 포함한 하반신을 칼로 무참하게 난도질당했는데, 시신 주변에 피가 잔뜩 쏟아졌다. 부인과 딸은 2층에 쓰러져 있었으며 얼굴과 목 등 상반신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앞니가 부러진 식칼로 수십 번 찔렸다.
특히 부인 야스코는 얼굴 부근을 칼로 파낸 듯한 깊은 상처가 났고 장롱에서 꺼낸 듯한 옷으로 얼굴이 덮힌 등 제일 참혹했다. 아들 레이의 시신은 2층 침실에서 발견되었다. 목을 졸려 사망했다고 추정하는데 칼에 찔린 상처는 없어서 그나마 시신의 상태가 온전했다.

4. 당시의 상황


조사에 따르면 범인은 12월 30일 밤 11시경 집 뒤에 있는 공원의 펜스를 발받침 삼아 피해자 집 2층 욕실로 침입하였다. 그 펜스 주변의 나뭇가지가 꺾였는데 창문 아래 지면에서 범인의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욕실 문에는 방충망이 있었지만 뜯겨져 지면에 떨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11시 무렵 집에서 다투는 듯한 소리를 근처 주민이 들었다. 옆집에 살던 어머니와 언니 부부가 30분경 "쿵!" 하는 큰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처음엔 피해자가 범인에게 습격당하고 계단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경찰이 샌드백으로 실험을 해본 결과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님이 판명되었다. 3층 로프트 침실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내릴 때 나는 충돌음으로 판단하였고, 범행은 밤 11시 - 11시 30분 사이에 일어났다고 추정하였다.
범인은 2층으로 침입하여 2층 방에서 자는 아들을 목 졸라 죽인 후, 2층의 소란을 듣고 1층에서 달려온 아버지 미키오에게 달려들었다. 미키오는 격하게 저항하며 범인과 싸웠으나 칼을 지닌 범인에게 무참하게 찔렸다. 부러진 앞 칼날은 미키오의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범인도 자신의 칼에 오른손을 찔려 상당히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미키오를 살해한 뒤 범인은 사다리를 타고 3층 로프트 방으로 올라가 잠자던 부인과 딸을 한꺼번에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끝이 부러지고 휘어버린 회칼로는 제대로 공격하기가 어려워서 다시 2층 주방으로 내려와 식칼을 찾았다. 그 사이, 경상을 입은 두 모녀는 도망치고자 사다리를 내려오다가 범인과 마주쳐 마구잡이로 난도질을 당해 사망했다.
후에 딸의 피가 묻은 휴지가 발견되었는데, 도망간 사이 부인이 딸의 상처를 치료한 듯하였다. '''일가족은 평화롭게 살던 자신의 집에서 갑자기 침입한 살인범 때문에 공포에 떨며 참혹하게 명을 다한 것이다.'''

5. 범인상



5.1. 범인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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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장 175 cm 전후, 허리 둘레는 83 cm[3] 전후.
  • 범행시 미키오와의 몸싸움으로 손을 다쳐 묻은 혈액으로 A형이라고 판명.
  • 경시청 추정 1965년에서 1985년생(사건 당시 15세~35세).
  • 범행수법으로 보아 대담하며 뻔뻔함. 윗옷을 벗어 가지런히 접어놓은 것으로 보아 꼼꼼한 성격.
  • 피해자 자택에서 지문 수십 개가 나왔다. 지문은 소용돌이형이었는데 과거 범죄자들의 지문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전과자는 아니라고 추정함.

6. 범인의 유류품


범인은 유류품을 너무나도 많이 남겼지만 검거할 만한 실마리는 찾을 수 없었다.
  • L사이즈의 나그랑 셔츠
  • 유니클로의 L사이즈 나일론제 검은 에어텍 재킷(주머니 속에서 특정 해변의 모래와 버들잎 낙엽, 꽃가루, 애완용 새 똥 등의 흔적이 발견.)
  • 검은 돈피 털장갑(안쪽에 범인의 것인 듯한 A형 혈액형 흔적)
  • 녹색바탕에 빨강,주황 실선이 들어간 체크무늬 머플러 (130 x 30 cm, 제조사를 알 수 없는 염가품)
  • 회색 크러셔 모자
  • 흉기로 사용된 칼날 길이 21 cm 회칼 (후쿠이현 제조품)
  • 무인양품의 검은 손수건 2매 (45 x 45 cm) (프랑스 기라로쉬제 Drakkar Noir 향수를 뿌리고 잘 다려 줄을 잡았음)
  • 힙색(오사카의 한 업체에서 생산)
  • 족적에서 영국 메이커 슬래진저의 280 mm 테니스화(제조국은 한국)를 신었다고 판명.

6.1. 범인의 이상한 점


범인은 범행 후 자택 안에서 일가족의 물건들을 사용하고 생리활동을 하는 등 극히 대담하고 엽기적인 행동들을 보였다.
  • 일가족을 살해한 뒤 피해자의 자택 냉장고에서 플라스틱 용기에 든 음료와 멜론, 아이스크림 5개 가량을 꺼내어 먹은 흔적이 발견.
  • 범행 중에 을 씹고 있었다.
  • 오른손에 상처로 생긴 출혈을 자택에 있던 생리대를 이용해 막는 방법을 썼다.[4]
  • 범행 후 자택에서 대변을 보았다고 확인됐다. 심지어 변기 물을 내리지 않아 대변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시사통신의 2010년 12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대변에서 검출된 고마아에(胡麻和え, 야채에 참깨를 넣고 무친 음식)는 피해자들의 위에 있던 내용물과 식사에는 없다고 확인되었다.
  • 2층 거실 소파에서 수면을 취했다.
  • 2층 거실 소파에서 신용카드와 수첩, 은행 예금통장, 운전면허증 등 생년월일이 표시된 서류가 분류되어 있었다.
  • 찬장과 책상의 거의 모든 서랍은 아래서부터 순서대로 열려 있었고 욕실의 욕조 안에는 영수증이나 서류, 타올, 쓰레기 등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집 안을 탐색하고 쓸모없는 물건은 욕조에 버렸다고 추정함. 또한 욕조에 어질러진 서류와 광고지들은 가위나 손으로 찢긴 채로 발견되었다.
  • 1층 서재에 있던 컴퓨터로 인터넷을 한 흔적이 발견. 아이스크림은 인터넷을 하는 중에 먹은 것으로, 스푼을 사용하지 않고 컵 용기를 손으로 움켜쥐며 입으로 먹었다는 특이점이 보였다. 인터넷 기록은 피해자의 회사 사이트와 대학 연구실 홈페이지 등이었으며 극단 사계의 무대 티켓을 예약하려다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터넷을 한 뒤 콘센트를 빼서 전원을 껐다.
인터넷에 접속한 기록은 2번이다. 첫 번째는 오전 1시 18분, 2번째는 같은 날 오전 10시 2분 아내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였기 때문에 범인은 바로 도주하지 않고 10시간 동안이나 집 안에 머물렀다고 처음엔 추정했다. 하지만 이후의 조사로는 두 번째 인터넷 접속은 컴퓨터가 오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추정을 바꾸었다. 재현 실험 결과에 따르면, 마우스가 어떤 충격이나 움직임에 의해서 떨어지는 바람에 컴퓨터가 접속되었던 듯하다. 또한, 31일 새벽에 피해자 집의 불이 꺼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새벽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는 목격담이 있으므로 새벽시간에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 마디로 '''사람을 4명이나 죽여놓고 거기서 음식을 먹고, 화장실을 쓰고, 컴퓨터를 사용해 연극표 예매를 시도하고, 잠까지 잔 것이다.''' 집을 뒤지고 서류들을 분류한 것은 범행 후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한 행동이라면 납득이 가지만, 나머지 행동들은 '''엽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6.2. 목격 정보


사건 발각 당일 오후 5시 20분, 도부닛코역 도착 토부 열차 안에 손에 상처를 입은 남자가 있다는 목격담이 들어왔다. 처음엔 '반창고를 붙인 정도인 상처'라고 했지만, 조사 본부의 추적해보니 '오른손에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드러났다. 남자는 아사쿠사발 쾌속 열차에서 같은 역에 하차한 승객 20명과 함께 내려 사무실에서 역무원에게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으며 치료를 받았다. 상처의 원인을 묻자 "열차 안에서 칼을 떨어뜨려 손이 베였다." 하고 답했지만, 열차 안에서 혈흔은 발견되지 않은 데다가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단순히 칼이 떨어지며 베인 정도로 생길 리가 없으니 해당인의 답변은 거짓일 것이다. 남성의 외형은 30세 정도로 신장은 약 170 cm, 말랐으나 몸집이 컸으며 녹색의 룩색을 메고 검은 다운 자켓에 청바지와 하얀 운동화를 신었다고 한다.
이 정보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조사 본부에 들어왔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였는지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때는 10개월이나 지나서였다.

6.3. 범인은 한국인?


일본 경찰이 감식한 결과 서울시에 거주하는 한국인 남자의 지문과 범인의 지문이 일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건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한국으로 조사원을 파견했으나, 한국 전과자들의 지문과 대조해보니 지문이 동일한 전과자 기록은 없었다. 일본 경찰의 감식 결과로 서울에 거주한다는 것까지 안다면 범인을 못 잡았음이 오히려 이상하다. 사건이 일어난 2000년에 일본에서는 외국인 입국할 때에는 지문날인을 했기 때문이다.
범인이 신었던 신발은 영국 브랜드 'Slazenger'로 한국의 메이커가 1998년 10월부터 2000년 11월 사이에 4530켤레를 제조하여 판매했다. 신발을 제작한 곳은 중국 길림성연변 조선족 자치주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유류품으로 남겨진 힙색이 한국제[5]였는데, 간토 지역의 할인매장에서 판매되었다고 확인하였따. 그러나 가방 표면에 묻어있던 세제가 일본 내에서 판매하지 않은 종류이고, 안에서 검출된 모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게 나타나 미국인이거나 미국과 관계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범인은 '일본 이외의 나라에 갔다온 적 있는 인물'로 추정하기도 했다.
범인이 신고 있던 신발 사이즈는 한국 사이즈로 28 cm, 또는 일본 사이즈 27.5 cm이다. 당초 28cm 사이즈는 일본 내에서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신발 외곽이 한국 사이즈 28cm와 같은 27.5cm의 물건은 일본 내에서도 판매했다고 확인되었다.
2015년에 발매된 <세타가야 일가 살인사건, 15년째의 새로운 사실(世田谷一家殺人事件 ―15年目の新事実―)>의 저자인 저널리스트 히토츠바시 후미야(一橋文哉)[6]의 말에 의하면 이 사건의 범인은 재일교포 출신으로 지하세계에서 암약하는 부동산 브로커이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46세 카네다 히데미치(金田秀道)라는 인물이고[7] 이자에게 사주를 받아 범행을 실행한 자는 이인은(李仁恩)이라는 32세 경기도 수원시 출신 남자라고 한다. 즉, 김수도가 교사범이고 이인은이 정범(범죄실행자)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인은을 범인으로 지목한 7가지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범인이 신었던 27.5, 28 cm 테니스 슈즈 슬레진져는 한국 한정 판매품이었음을 비롯해 힙백이나 모자 등 범인의 유류품은 한국 제품이 많다. 이인은은 서울에 거주하며 자신의 활동권 내에 있는 슈퍼 등지에서 이러한 제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2. 현장에 남겨진 점퍼 주머니에서 이인은의 본가가 있는 한국 경기도 수원시 주변의 것과 유사한 토사 입자가 검출되었다.
3. 미야자와 씨 집에서 발견된 지혈대의 라텍스 고무의 파편과 블레이 테스탄트 부츠의 가죽 조각, 심지어 감정 결과 범인이 현관 문 열림 자물쇠에 활용한 것으로 보이는 스위스제 육군 나이프는 군대의 장비품으로 판명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한 경험이 있는 이인은이 소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4. 미야자와 씨 집에서 미세한 분말이 검출되었는데 벤제도린이라는 마약으로 밝혀졌다. 이인은 역시 약물 중독자였다는 의혹이 있다.
5. 힙백 안에 부착된 특수한 필름 조각과 티탄산 바륨의 미세한 분말이 모두 사용되는 곳은 인쇄 가공 공장인데 이인은 역시 이 사건 전에 인쇄 가공 공장에서 일했던 바 있다.
6. 이인은은 범인의 유류품과 같은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던 데다 악우들에게 자신을 "키드"라[8] 하고 다녔으며 범인이 손수건에 뿌렸던 향수인 드러커 누어를 애용했다는 정보가 있다.
7. 이인은이 사건 전인 12월 상순에 연극을 보러 방문한 스기 나미 구의 연극 스튜디오 주변에서 범인의 지문이 발견되었다.
이상 7가지 공통점을 근거로 경기도 수원시 출신 이인은이란 인물을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히토츠바시의 말에 따르면 이인은이란 인물은 본래 한국에서 불량 그룹[9]의 리더였던 인물로 미야자와 집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다만 카네다 히데미치 즉, 김수도는 이야기가 다르다. 사건 당시 미야자와 가족은 카미소시가야의 공원 확장으로 토지를 도쿄도에 매각하여 1억 수천만 엔이 넘는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일본 내에도 살인 청부업자가 있었겠지만 꼬리가 밟힐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경기도 출신 재일교포 김수도가 같은 경기도 출신인 이인은을 이용해 범행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결국, 미야자와 가족의 재산을 노리고 범행을 사주했다는 것이 이 저널리스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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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황당한 것은, 미해결 사건의 범인을 추측하는 방송 프로그램 'TV의 힘'에서 일본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의 초능력 조사관(?)을 불러 용의자의 몽타주를 그려보게 했는데, 얼굴의 형상이 '광대가 진 일본인 얼굴이 아닌 한국계 얼굴'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

7. 인터넷의 범행 보고?


2000년 12월 27일 2ch의 익명 게시판 '애완동물 너무 싫어 판'에서 현 사건의 범행 예고로 보이는 스레드가 올라왔었다. 게시판의 170번 글로 어릴 때부터 동물들을 학대해 죽이는 경험을 늘어놓으며 마지막엔 "최근엔 인간을 갈라서 내장을 보고 싶다. 가부키쵸에서 일어난 비디오 가게 폭발사건의 용의자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근처에서 행복해 보이는 가족을 보면 오이타 일가 상해 사건처럼 망쳐버리고 싶다. 실행일은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이다. 21세기가 오기 전에 빨리 죽여버릴까 생각하고 있다."[10]라는 글을 남겼다.
사건 직전인 12월 26일 'J9'라는 닉네임의 인물이 'H씨에게, 이번 일에서 <학대 행위 대책(残虐行為手当て)>은 가지고 계신가요?'라는 글을 쓰자 'H'라는 인물이 '바나나는 과일이기 때문에 간식엔 안 들어갑니다'라고 답변했다.
사건 발각 직후인 2001년 1월 4일 오전 9시 47분경 'J9'가 '입금 확인했습니다. 저항을 만났지만 물리적 소거는 성공했습니다. BuP는 서쪽 ひ32b에 맡겨놓겠습니다. 참고로 유류품은 어원(御苑)[11]에서도 팔고 있습니다'라는 수수께끼의 메세지를 남겼다. 'H'에게서 '데이터 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답장이 왔다.
사건 조사 관계자 측도 이 게시글을 예의 주목했다. 'J9'는 '학원(일본어로 쥬쿠)'이라는 의미로 미야자와의 아내가 자택에서 학습 학원을 운영한 것에서 따온 사건의 실행범이며 'H'는 '범인(한닌), '진짜 범인(혼보시)의 약자로 살해를 사주한 공범으로 추측했다. 글이 쓰여진 시기가 너무 잘 맞는데다 '물리적 소거', '유류품', '학대 행위 대책' 등 단어가 현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맞아드는 내용이라 더욱 의심을 샀다.
조사원은 게시판을 세운 인물의 사정청취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2ch는 특성상 일체 통신 기록이 남지 않는 시스템이라 조사의 단서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8. 그 밖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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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를 찾는 전단
평소 피해자 가족은 정의감이 강한 성격으로 자주 규칙 위반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택 근처 스케이트 보드를 탈 수 있는 광장에서 밤에도 그곳을 이용하는 스케이트 보더가 있어 피해자 자택과 소음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그밖에 뒤편에 있는 공원에 드나드는 폭주족들과 트러블이 일어났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사건 당일 밤에도 싸우는 것이 목격되었다.
사건현장의 서쪽에는 남북으로 센카와(仙川)라는 조그만 시내가 흐른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0일이 되는 2001년 4월 9일, 센카와 시내의 건너편에서 동남아시아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60 cm짜리 석조 지장보살 입상이 발견됐다. 지장보살상은 피해자의 집을 바라보는 위치로 있었다는데 누가 왜 가져다놓았는지는 모른다. 불교에서 지장보살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이끌어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필 이런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곳 근처에, 사건이 일어난 지 백일째 되는 날 사건현장을 바라보는 위치에 지장보살상을 놓았음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물론 범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제3자가 다만 죽은 이들을 가련하게 여겨 지장보살상을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지만, 범행과 관련 있는 자가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일본 경시청은 이 지장보살상에 대해 아는 사람도 찾는 중이다.
피해자 일가족은 공원 확장으로 집을 팔고 이사 갈 예정이었는데, 이때 부동산업자들로부터 보상보다 많이 받게 해 줄 것이니 집을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은 끝내 거부했다고 한다.

9. 사건 발생 전 예고?


피해자 집 바로 옆집에 살던 미야자키 부인의 친정어머니는 집 앞 도로에 계속 차가 서 있음을 목격했다.
사건 3일 전 피해자 집의 형세를 살피고 있는 40대 중반의 의심스러운 남자가 목격되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 29일 15시경 현장에 남아있던 가방, 운동화, 비슷한 복장을 한 젊은 남자가 세이조가 쿠 엔마에 역(현장에서 1.5 km 거리)에서 목격되었다. 목격한 주부에 따르면 12월이라 하기엔 얇은 옷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이 남자는 사건 당일 30일 21시경 피해자의 집 근처에서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피해자 가족이 통일교 신자였고 종교와 갈등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0. 사건 그 후


사건 현장은 사건 전 공원 토지 확대를 위해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계획이 흐지부지되었다. 주변 주택들이 모두 허물어진 지금도 사건 현장은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크게 다루어질 정도의 강력 사건이기 때문에 세타가야 근방에 방범등과 누르면 바로 신고가 되는 신고장치기계를 설치[12], 현재도 피해자 자택엔 방범설비가 철저히 되있고 경찰관이 매일 순찰을 돌므로 단순히 현장에 접근만 해도 의무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유족들은 일본에서 일어난 강력 범죄 사건의 유족들과 함께 공소시효의 폐지를 위한 '살인사건 피해자 유족 모임' 통칭 '소라노카이(宙の会)'를 결성했다. 2010년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기 위한 형사 소송법이 성립되어 해당 사건 및 과거의 미해결 사건들도 시효가 폐지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경시청은 2007년 현 사건의 유력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 현상금 최대 300만 엔을 내걸었으며 '사건 조사를 협력하는 모임'이라는 사적 단체에서 최대 2천만 엔(약 1억 8200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이는 일본 현상금 사상 최고금액이라고 한다.
사건 이후부터 건물의 진입로는 차단되었다. 2015년 3월에 촬영된 구글 스트리트 뷰의 사진을 보면 건물 주변에 가림막이 추가 되었는데, 건물 노후화 때문에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한다. ## 현재까지 경시청은 조사원을 연인원 23만 명이나 투입했고, 지금도 38명이 매달려 있다. 현장 보호를 위해 24시간 경찰관이 상주해 사건 현장을 지킨다. ###

2020년 1월, 유가족들이 허가하여 살인현장이 공개되었다.

[1] 어머니와 언니 부부가 거주한 건물은 1975년 이전부터 존재했고, 바로 옆에 붙은 사건이 일어난 미야자와의 자택은 1980년대 초반에 증축되었다. 1990년 5월, 친가측과 미야자와 부부는 이 땅과 건물을 공동구매하여 입주했다.[2] 미야자와 부부의 막내 아들은 발달장애가 있어서 괴성을 지르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주변의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육아를 할 수 있는 조금 황량한 현 거주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다른 이웃들보다 이사를 최대한 미룬 이유도 육아문제 때문이었다고 언니가 증언.[3] 약 33인치[4] 생리대는 피를 흡수하는 용도지만 긴급시 지혈용도로도 사용가능.[5] 경시청 공식 발표문에는 힙색과 모자가 한국제라는 말은 없다. 이는 이 사건이 입소문을 타고 돌면서 루머가 더해지며 생겨난 많은 오류 중의 하나이다. 범인이 남긴 많은 유류품들 중 한국 제조품이라고 공표된 것은 슬레진저 테니스화 하나뿐.[6] 유명한 사건의 탐사 위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대부분 해당 사건의 범인을 단독으로 만나 봤다거나 새로운 증거나 세기의 특종거리를 찾아냈다는 식의 수식어를 붙여서 책을 내지만 언론이나 수사기관에서는 전혀(...) 참고하지 않는 수준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그다지 신용할 만한 저널리스트가 아니라는 것.[7] 카네다 히데미치는 일본에서 쓰는 통명이고 본명은 김수도다. 경기도가 고향이라고 한다.[8] 해적 캡틴 키드라는 뜻이다.[9] 일진또는 조폭[10] 원문: 最近では人間を切り裂いて内臓を見たいとも考える。あの歌舞伎町で起きたビデオ屋爆破事件の容疑者の少年が供述していたように。今では隣の幸せそうな家族を見るとあの大分一家殺傷事件のようにしてしまいたいとも思う。決行日は12月31日午後11時59分だ。21世紀がやって来る前にちゃっちゃと殺ってしまおうか考えている。[11] 일본 황실 소유의 정원. 신주큐교엔, 아카사카교엔 등이 있다.[12] 2017년에 전부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