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야구)/선수 경력

 


1. 아마추어 시절
2. 프로 시절


1. 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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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광고시절부터 뛰어난 좌완투수로 주목받았고 2학년때 황금사자기에서 세광고의 첫우승을 일궈냈다. 그러나 3학년때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한 출전을 강행하여 준우승을 이끌었지만 동국대로 진학한 이후 3학년 때 까지 투수로는 그리 많은 경기를 뛰지 않았다. 오히려 야수로서 타격재능이 꽤 좋아서 코너 외야수나 중요한 상황에서 대타로 기용되기도 했다.[1][2]
야수로서 수비는 '한국의 그렉 매덕스'라 불리는 급[3]. 기교파 투수로 변한 후 공배합에 따라 다음 수비위치를 정확하게 잡는다. 투수 직선타구, 투수 앞 땅볼, 번트 병살 처리는 KBO 리그 역대 최고급. 끊임없는 노력으로 대학 4학년 때 재기에 성공한다.

2.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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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협회의 강제적인 유보로 인해 프로행이 1년 늦춰진 송진우는 1989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다. 그 이전인 1988년에 한국실업리그세일통상 야구단에 입단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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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첫 해부터 송진우는 자신의 기량을 증명한다. 첫 데뷔전을 완봉승(9이닝 4피안타)으로 장식하며 그 해 기록 방어율 2.81에 9승 10패 9세이브를 기록했다. 비록 두자리 승수를 기록했던 이강철, 류명선, 박정현 등보다는 다소 부족했지만, 당당히 빙그레 마운드의 한축을 담당하는 주역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프로 2년째인 1990년에는 더욱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시즌 내내 마무리 투수 역할에 주력하며 방어율 1.82에 11승 7패 27세이브를 기록, 구원(구원승+세이브 수 기준) 부문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후 데뷔 4년동안 50승을 거둬 매년 평균 10승 이상을 올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었다. 또한 이 1990 시즌부터 그의 상징인 등번호 21번을 달기 시작했다. 데뷔 첫해인 1989년에는 등번호 1번을 달았다.
19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8회 투아웃'''까지 퍼펙트로 막아냈으나, 대타 정회열이 때린 파울플라이를 잡지 못하자 결국 볼넷으로 살아나가면서 깨졌고,[6] 이어 홍현우한테 안타를 맞고 노히트 노런 무산, 장채근한테 싹슬이 2루타를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1992년에는 선발-마무리 할것없이 경기에 나가[7]. '''구원왕과 다승왕을 동시에 차지'''(19승-25포인트)했다. 하지만 당시 김영덕 감독이 이를 위해 멀쩡히 호투 중이던 선발 한희민을 5회 이전에 송진우로 교체하여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 빛이 바랬다. 게다가 이날 송진우가 김영덕 감독의 무리한 교체 투입으로 다승 1위를 확정지은 경기 상대는 하필 18승으로 다승왕 경쟁을 벌이던 이강철의 해태여서 더욱 비난거리가 되었다.[8][9] 이는 빙그레의 우승 실패와 함께, 그 해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가 롯데의 신인 염종석에게 돌아가는 요인이 되었다.
송진우는 1989년 데뷔 이후 6년 간 사실상 풀타임 선발로 뛴 적이 '''단 한 해도 없다.'''[10] 김영덕 감독 체제에서 송진우의 기용 방식을 보면 김응룡 감독의 선동열 기용 방식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팀 내에서 최고의 구위를 지닌 투수를 정기적인 휴식이 필요한 고정 선발 대신 선발+중무리 방식의 혼합을 택한 것. 이로 인해 선동열과 마찬가지로 은근히 통산 기록에서 손해를 좀 본 케이스라고도 볼 수 있다. 송진우는 강병철 감독 체제하의 1994년 더블스토퍼를 통해 구대성이라는 마무리 대체재가 등장하고[11] 난 이듬해인 1995년이 되어서야 전업 선발투수로 활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보직을 넘나들며 관리를 받지 못한 후유증(구위, 구속 감퇴)이 나타나고 있던 시기라는 점이 아쉬운 대목.
1997년을 기점으로 송진우는 통산 100승을 기록했지만 6승 12패 방어율 4.60으로 내리막을 걸었고,[12] 방어율이 4.79으로 치솟은 1998년에는 언론에선 은퇴를 거론하기도 했으며,[13] 시즌이 끝나자 구단은 그를 애리조나 교육리그로 보냈을 정도다.[14][15] 하지만 그 교육리그에서 서클체인지업[16]을 배우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기교파 스타일로 변화하게 되고,[17][18] 1999년엔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15승 5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4.00에[19] 9완투승 2완봉승을 기록한 2선발로서 18승을 기록한 1선발 정민철, 14승을 기록한 3선발 이상목과 함께 한화의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이후 송진우의 서클체인지업은 역대 최고의 명품 서클체인지업으로 평가받으며, 원래 슬라이더가 주무기였던 송진우의 새로운 주무기가 된다.[20][21] 당시 언론에서는 송진우의 체인지업을 언급할 때마다 애리조나 교육리그를 들먹이곤 했었는데, 정작 송진우 본인은 한 인터뷰에서 자기는 교육리그에서 그립만 배웠을 뿐이고, 실제로 쓰는 방법은 제이미 모이어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당시 제이미 모이어는 시애틀의 선발투수로 이따금 박찬호와 선발 맞대결을 펼치며 국내 TV에도 중계되곤 했었다. 송진우보다도 3살이나 더 많은 투수가 140이 안되는 구속에 서클체인지업을 활용하며 메이저리그 2선발로 맹활약하는 걸 TV로 보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시애틀 1선발은 랜디 존슨.[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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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클체인지업 그립
2000년 5월 18일 해태전[23]에서 최고령 노히트노런(115구, 탈삼진 6개, 사사구 3개)을 기록했다. 20세기 마지막 노히트 노런이자 2014년 6월 24일 찰리 쉬렉이 5,150일 만에 다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있었던 노히트 노런이었다. 국내 투수들 중에서는 여전히 마지막 노히트 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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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 3일, LG전에서 투수로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끝내기 안타'''를 쳐냈다. 그것도 2001년 다승왕, 구원왕, 승률 1위를 기록한 신윤호에게 말이다. [24][25]
2002 시즌 개막전을 완봉으로 장식하며 시작. 시즌 3승을 올린경기에서 당시 선동열이 가지고 있던 최다승기록 146승을 뛰어넘었고 5월 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150승을 기록했다. 결국 이 해에 18승을 거두면서 최고령 다승왕 최다 이닝 투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였다.[26] 2004시즌 KIA와의 경기에서 만 37세 7개월로 최고령 완투승 기록을 세웠고, 2005시즌에는 만 39세6개월로 최고령 완봉기록을, 그리고 대망의 2006 시즌 8월 29일 개인통산 200승을 달성하면서 200승-1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 일본프로야구 에나쓰 유타카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200승 100세이브를 기록하였다. 3번째 달성은 존 스몰츠. 같은 해 9월 24일에는 최고령 선발승(40세 7개월 8일) 기록도 세웠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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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06년 한국시리즈 기간 중에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이후 또 한 차례 부진을 겪게 되어 2007 시즌에는 주로 중간 계투요원으로 나와 2구원승을 거두는 데 그쳤고, 2008년에는 선발로 복귀하여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등 승운이 따르지 않아 6승에 그쳤으나 팀 내에서 류현진 다음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등 꾸준히 활약했다. 2009년에는 중간계투로 다시 전환하여 4월 8일 두산 베어스 전에서 구원승을 올려 최고령 승리투수 기록을 다시 갱신했다.
2008년 6월 6일 대전구장에서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 히어로즈)를 상대로 선발 등판하여 8회 마지막 아웃을 남겨놓고 송지만 선수와 대치'''(송회장vs송집사)'''. 이 대결을 삼진으로 장식하며 대망의 2000 탈삼진을 달성했으며, '''3,000 이닝 등판'''이라는 또 다른 대기록을 4월 9일 두산전에서 이대수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내며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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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16일, 본인의 명성에 걸 맞는 피칭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 팀 리빌딩에 맞춰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가족, 그리고 구단과의 상의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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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경기는 2009년 9월 23일 LG 홈경기전에서 은퇴경기 겸 은퇴식을 가졌다. 또한 그의 등번호 21번도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1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된것은 박철순 이래 두번째. 단 한 타자(박용근)만을 3구로 상대해 내야안타를 맞고[30][31] 한화 이글스 좌완 에이스의 계보를 이은 류현진이 구원 등판하면서 그의 '''21년간의''' 프로야구 활약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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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데 야수로 뛰었어도 대성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 대학야구에서 대타로 나올 때 홈런을 자주 기록했으며 프로에 와서도 대타로 자주 기용되기도 했다. 실제로도 송진우는 끝내기 안타를 기록한 적도 있다. 2001년 6월3일 LG전에서 9회말 7-7 동점 상황인 9회말 1사2, 3루에서 대타로 나서 당시 강력한 중간계투였던 신윤호를 상대로 우전 끝내기 안타를 때리는 깜짝쇼를 연출했다.[2] 투수가 안타를 친 사례는 여러 번 있으나 끝내기 안타는 송진우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 통산 8타수 4안타의 뛰어난 타격재능을 보였다.[3] 그렉 매덕스는 골드글러브 통산 18회의 수상에 빛나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 부문 수비수였다. 특히 현역 마지막 해에 골드글러브는 물론 세이버메트리션들이 제정한 필딩 바이블 어워드의 초대 수상자이기도 하다.[4] 세일통상의 오너는 재일교포로 당시 KBO의 제8구단으로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시험삼아 실업리그에 뛰어들었다. 당시 송진우를 비롯 대학야구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세일통상 팀은 창단 4개월 만에 해체하게 된다. 야구단에 지나치게 돈을 쓴 것이 오너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그 직후 회사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송진우와 최해명(현 두산 베어스 코치)은 소속 팀이 없는 상태에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다.[5] 사실 프로 직행이나 다름 없었던 송진우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것은 88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 프로팀에 가지 못하고 1년 실업팀을 전전하게 된 것이었다. 82년 최동원, 이해창, 임호균, 김재박등과 같은 케이스. 당시에는 프로선수는 올림픽에 출전 할 수 없었다.[6] 특히 2-2 카운트에서 나온 볼 판정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거리다. 송진우는 지금도 그 때의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고, 해당 경기의 주심이던 이규석 주심 역시 그때의 판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시각이 엇갈린다.[7] 사실 무엇보다도 원래 마무리 투수로 낙점했던 김인권이 마무리 투수로서 자질이 영 형편없었고, 세이브 상황에서 불을 질러대는 김인권을 보다 못해 김영덕 감독은 세이브 상황에서 송진우를 올리는 수를 두는데 이게 꽤 먹혀서(...) 왠만한 상황에서 송진우를 올리게 된다.[8] 이에 질세라 이강철도 다음날 빙그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공동' 다승왕의 기회를 살리려 애썼지만, 그해 KBO 역사상 최초의 시즌 40홈런을 돌파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장종훈의 홈런 기록을 41개로 늘려주는 제물이 되면서 쓸쓸히 패전투수가 되었다.[9] 당초 송진우는 인터뷰에서 "이강철도 같은 상황에서 안 나올거라는 보장 없었다"고 말했다가 '그 감독에 그 선수'라는 식의 더욱 강한 비난을 받았고, 훗날에야 다른 인터뷰에서 '밀어주기는 나쁜 짓'이라며 후회하는 듯한 말을 했다.[10] 1990년은 아예 전업 마무리(중무리) 투수였다. 또한 1992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발 투수다, 마무리 투수다 의견이 갈리는데, 게임사와 야구팬들 사이에선 선발 투수로 분류하고, 일반인들은 마무리 투수로 본다. 그리고 1993년은 1990년과 더불어 유이한 마무리로 활약한 시절. 데뷔이후 그가 얼마나 혹사를 당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11] 정확히는 시즌 중반 구대성과 송진우의 보직이 각각 마무리와 선발로 변경되었다.[12] 선발과 마무리를 겸업하며 지나친 이닝을 소화한 후유증으로 구속과 구위가 꾸준히 줄어들었는데, 150km에 육박하던 구속이 32세이던 97년에는 140km를 잘 넘기지 못했다. 누가 보기에도 완연한 쇠퇴기였다.[13] 더군다나 이 해에 외국인 선수제도가 도입되면서 많은 외국인 타자가 들어왔는데, 이들은 긴 리치를 활용해 슬라이더를 걷어내며 빠른공-슬라이더 조합의 투피치 들에게 특히 강했다. 더군다나 국내타자들 마저 외국인 타자에 자극을 받아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화하며 타격기술을 향상시켜 1999년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로 남게된다.[14] 애리조나 교육리그는 20대 초반의 선수들을 기본기 위주로 가르치며 실전감각을 쌓게 하는 곳인데, 참가선수 연령이 20대 중반을 잘 넘기지 않는다. 30대 선수에게 교육리그에 참가하라는 얘긴 굉장히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실제로 송진우는 그 때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15] 박정진의 경우에도 2009년 방출대상에 올랐다가 한대화 감독이 부임하면서 기회를 얻었는데, 구단은 그를 애리조나 교육리그로 보내버렸다. 거기서 뭘 배워오라는 것보다는 루키들을 상대로 마지막 테스트를 해보려는 의미였던듯. 송진우나 박정진 모두 결과가 좋았던 점에서 최소한 정신 재무장 효과는 있는 것 같다. 만약 여기서 은퇴했다면 송진우는 그냥 빙그레 시절에 몇년 활약했던 에이스로, 박정진은 골수팬만 겨우 알수있는 무명선수로 남았을것이다.[16] 당시 교육리그 의 한 순회 코치가 젊은 선수들에게는 일일이 지시하며 가르쳤는데, 송진우 나이를 물어보더니 이게 좋을 것 같다며 서클체인지업 그립만 가르쳐주고 훈련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17]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박찬호배영수의 경우에서처럼 제구도 필요없이 힘으로 던져대던 파워피쳐가 자신의 약해진 구위를 인정하고 노화를 받아들인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송진우는 단순히 기교파로 변신하는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당대 투수 중 최고의 제구력을 인정받기까지 했다.[18] 하일성에 의하면 심판들도 겨울동안 쉬게 되면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서 각팀의 스프링캠프에 찾아가 감각을 익히곤 하는데 송진우의 공을 보면 스트라이크와 볼의 경계에 대한 감이 잡기 좋다고 했다. 그만큼 스트라이크존 끄트머리에서 공 반개씩 넣고 빼는 제구에 능수능란 했다는 얘기다.[19] 평균자책점이 다소 높기는 했지만, 이때는 역대 최강급의 타신투병 시즌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매우 준수한 평균자책점이었다.[20] 정작 송진우는 은퇴경기 해설에서 송진우를 구원해 등판한 류현진의 체인지업이 더 낫다고 평했다. 팔스윙의 균일함에서 류현진이 더 낫다고.[21] 일본 진출 전의 구대성에게 가르쳐주어 구대성의 주무기가 되기도 하고, 이것을 구대성은 류현진에게 전수하였다. [22] 송진우를 비롯해 크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활용하는 외국인 투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자, 수많은 국내투수들이 체인지업을 익히게 됐고 이는 2000년대 중반 투고타저가 극심해지는 주요 원인이 된다.[23] 송진우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이 날은 하필이면 해태 타이거즈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5월 18일에 광주 무등 경기장에서 홈경기를 연 날이었다.[24] 사실 투구사인을 읽어서 쳤다고 한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놀라운 사건이긴 하지만[25] 2015년에 한화 이글스에서 다시 한 번 투수 권혁이 끝내기가 가능한 상황에서 타석에 서기도 했다. 결과는 삼진.[26] 남들은 보통 은퇴를 고려하는 36세에 220이닝을 던졌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괴물이다. 게다가 노쇠화를 심하게 타는 투수라는 보직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놀라운 일.[27] 최고령 선발승은 2008년 9월 13일까지 갱신되었다.[28] 은퇴를 앞두고 박동희 기자와 인터뷰에서, 2군에 내려가 보름 정도 지냈을 때, 1군에 다시 못 올라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100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결국 손을 들고 은퇴선언을 한 것이라 말했다.[29] 그런데 재밌는 건 은퇴경기 당시 불펜피칭 자체는 한화 내 어지간한 다른 투수들보다 공 끝이 더 좋았다는 것(...). 몸 관리를 어떻게 한건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30] 투수 오른쪽 빠른 내야 땅볼이었다. 현역 시절 또 다른 내야수라 할 정도로 투수 수비의 일인자였던 송진우였다면 충분히 잡을 수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오랫만의 등판인데다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공을 놓쳐버리고 내야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31] 여담으로 만약 국내 골든글러브가 수비만을 평가하는 상이었다면 그 상은 송진우가 현역시절 독차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간결한 투구 후 빠른 수비동작, 번트 수비에 맞선 정확하고 빠른 송구로 선행주자를 잡아내는 것은 그의 전매특허. 전문가들이 수비를 잘하는 투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게 송진우다. 이래저래 한국의 그렉 매덕스라는 닉네임이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