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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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자 現 한화 이글스의 단장. 등번호는 55→23번. 송진우와 더불어 한화 이글스의 마운드를 책임졌던 우완 에이스였다'''날 있게 해준 기반이다. 다이빙으로 치면 도약대고, 육상으로 치면 스타트 지지대 같은. 내 삶을 지켜준 발판이었다. 난 지금도 방송 부스를 나가면 '''한화 이글스 영구결번자다. 그런 자긍심 하나로 살고 있다.'''
- 정민철에게 한화란.
'''통산 다승 2위(161승)'''를 비롯하여 1992년부터 1999년까지 8년 연속 10승 이상, 평균자책점 2.80, 연당 평균 투구 이닝 188이닝, '''"퍼펙트 게임에 가장 근접했던 투수"''' 등의 기록을 가진 1990년대를 대표하는 선발 투수이다.[4] 반면 단 한 번도 다승왕을 기록하지 못하는 등 은근히 ''''비운의 투수''''이기도 하다.
꼴통쇼라는 정민철이 참여한 강연회가 있다. 정민철의 인생관과 유년 시절 그리고 깨진 퍼펙트 게임 에피소드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이종범과 비슷하게 일본 진출 전/후 수준으로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 있다.
2. 선수 경력
선수 시절 정민철은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우완 정통파 투수였다.'''내가 받아 본 직구[5]
중 최고는 정민철'''
- 박경완
3.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 시절 주무기는 빠른 공. 훗날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성기 시절 최고 구속은 152km/h였다고 하나, 실제 경기에서 찍히는 최고 구속은 145~8km 정도로, 강속구 투수였다.
'''사실 정민철의 강점은 구속보다도 구위 자체'''였다. 테일링이 좋은, 소위 말해서 공 끝이 좋은 타입. 즉, 원조 돌직구. '''동시대 선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대 최고의 구위로 평가 받는다.''' 특히 박경완과 이종범이 본인이 경험한 최고의 공으로 정민철의 공을 꼽았고, 전성기 정민철의 볼끝은 임창용과 오승환보다 더 좋다고 평가하였다.
슬라이더와 커브, 포크볼 등 당시 언론에서 언급되었던 변화구의 레퍼토리 자체는 다양했으나, 어느 하나 주 무기라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빠른 공 위주로 던지되 유인구로 슬라이더를 써먹던 전형적인 투피치 스타일. 제구력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칠 테면 쳐보라고 가운데로 팡팡 꽂아 넣었던 탓에 볼넷이 상당히 적었다. 스태미너도 좋아서 완투를 밥 먹듯이 한 전형적인 우완 정통파 파이어볼러 이닝이터 선발투수.
커브볼러로 유명한 김원형과 비교를 하자면, 김원형은 직구와 커브의 구속-궤적이 비슷한 것을 이용했다면 정민철은 확실한 직구와 그 직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커브를 사용했다는 것.
다만 2000년대 이후로 직구 구속과 구위가 급격히 떨어진 탓에 커브와 커맨드(제구력) 위주의 기교파 투수로 폼을 바꿔야 했다. 선수 시절 후반기에 사용한 주 무기는 커브였는데, 본인 스스로가 너클커브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탓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4. 코치 경력
4.1. 2010 ~ 2011년
은퇴 이후 2010년 한대화 감독 체제에서 바로 코치진으로 이동했으며 코치로서 한화 마운드를 볼 때마다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2010년 당시엔 불펜코치인데다가 별다른 언급도 없어서 그냥 평범한 투코로 1년을 보냈으나, 특이한 투구폼으로 10여 년간 코치들에게 투구폼을 변경해야 한다는 강요와 투구폼을 변경하면 오는 어깨의 통증 때문에 투구폼을 바꿔야하나하는 고뇌와 자괴감에 빠져있던 박정진에게 '''네가 정말 던지고 싶은 투구폼으로 던져라'''라는 조언과 신뢰를 보내줘서 2010년 그의 각성을 이끌어내 한화 이글스의 불펜#s-2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2011년 1군 서브코치로 코치 생활을 시작하여 한용덕 코치와 함께 장민제, 안승민을 성장시키고 양훈을 부활시켰다! 2011년 5월 2군으로 내려간 한용덕 코치 대신 1군 메인코치(?)가 되었다.
한화 투수들에게 자신이 현역시절 즐겨 던졌던 '''슬로커브'''[6] 를 전수시켰으며 실제로 2010시즌에 유원상이 슬로커브를 장착하면서 꽤나 재미를 봤다.
2011년 시즌이 지나가면서, 투수 교체가 서툰 한대화 감독을 대신해 투수교체 전권을 잡았다.[7] 그래서 생긴 별명이 바람돌이, 정간신#s-2(…). 선발 투수를 한계 투구수까지 던지게 하면서 최대한 긴 이닝을 먹게 했다. 이런 방향성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인 투수가 양훈. 조금 투구수를 많이 가져가게 하면서 완봉승을 하게 된 뒤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10이닝''' 연장전에서 선두 타자에게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사 2루의 위기를 처하게 되었음에도 한대화 감독을 설득해 양훈 스스로 이닝을 끝내게 하였고, 이후 양훈은 기복이 심했지만 2경기에 한 경기꼴로 류현진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주게 되었다.
다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이렇게 어지간한 상황은 선발 투수에게 맡긴 탓에 투수교체가 계속 한 타이밍씩 늦어져 결국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고 날려먹은 경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민철의 투수 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팬들도 다수.
그래도 이 때까지는 박정진, 양훈, 김혁민,[8] 안승민을 키워낸 명코치라고 찬양받았다.
4.2. 2012년
2012년 들어 이해할 수 없는 투수 교체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줄줄이 말아먹으며 돌민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선수시절 그를 사랑하던 팬들도 한대화와 세트로 물러나기를 바라는게 현실이 되었다.
2012년 5월이 되자 2년동안 팀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던졌던 박정진을 5월 25일에 2군 가기 전까지 21경기 중 14경기에 올리는 백정질을 하였다. 박정진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콜업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올 때마다 두들겨 맞으며 몸과 멘탈이 함께 붕괴되었고 결국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012년 6월 7일 류현진 선발 경기에서는 7: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불펜 정민혁이 흔들려 연속 안타를 맞았는데도 바꾸지 않고 기어이 무사 만루를 만들어 3점을 내주고 볼넷머신으로 전락한 바티스타를 9회에 올려 결국 경기를 내지고 에이스의 승리까지 날려먹는 최악의 투수교체를 보여주었다.
2012년의 정민철의 투수 기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원칙'''이라 할 수 있으며, 필승조 역할을 하는 선수를 대패하는 경기에 무조건 연투시켜 정작 이기고 있는 경기에 내보낼 필승조가 없거나 지친 상태로 내보내게 하여 망친 사례가 끝도 없다.
또한 김인식#s-1 감독 밑에서 배웠는지 불펜투수를 무조건 혹사시키는 것에 재미를 들려 박정진, 정민혁, 안승민, 마일영 등 한화에서 얼마 남지 않은 쓸만한 불펜들이 모두 맛이 갔다.
결국 2012년 7월 6일 자로 2군으로 내려가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1군 투수코치를 맡은 이는 다름아닌 송회장님.
4.3. 2013년
전반적으로 투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지만 실전에서 굴리는 데에는 서투른 듯. 2013년 조지훈, 송창현, 이태양 등의 신인투수들이 2군을 다녀온 후 괜찮은 모습을 보이면서 육성능력을 다시금 주목받았다.
2013 시즌 전반기가 종료된 7월 18일 자로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었다. 팀의 전면 리빌딩, 그리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1군과 2군 코치간의 보직이 맞바뀐 것. 이로서 1년 전 보직을 맞바꿨던 송진우 코치와 다시 한 번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
4.4. 2014년
1군 투수코치직을 맡게 되긴 했지만 경기 중 잠깐잠깐 보여지는 덕아웃 광경으로는 실제 실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5이닝 63구밖에 안 던진 앤드류 앨버스를 강판시킨 경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정민철은 퀵후크를 좋아하는 투수코치가 아니다. 선발투수를 조금이라도 더 믿고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는 스타일. 팬들은 투수 교체는 김응용 감독이 실질적으로 다 하고 있으며 정민철은 불펜에 전화거는 셔틀에 불과하다고 대체로 생각하고 있다.
5월 8일에는 선발투수 송창현이 7이닝 2실점 호투를 이어가고 있던 터라 8회에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감독 쪽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던 송창현을 돌려보내고 어깨를 툭툭 쳐 주는 장면이 중계 카메라를 탔다. 이로써 투수교체에 관해 투수 코치가 전혀 권한이 없음을 인증했다. 사실상 투수교체에 있어 전권을 쥔 한대화 시절과는 상황이 다르기에 현재 본인에게 향하는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는 셈.
그리고 밑에 나오는, 그의 선수시절 등번호인 55번을 달 정도로 그를 존경하는 이태양과 윤규진. 속칭 "정민철 키즈"가 이번 시즌 각성해 각자 팀의 에이스와 마무리로 자리잡음에 따라. 정민철의 대한 평가와 기대치가 올라갔다. 송창현과 유창식의 볼질까지 잡는 데 성공한다면 투수코치로의 역량을 스스로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즌이 흘러감에 따라 정민철 역시 팬들의 질타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한화의 투수진이 리그 최악인 관계로 투수코치인 정민철이 집중포화를 받게 되었다. 특히 '''투수교체 절대 만능론(...)'''을 펼치는 대다수의 팬들은 2014년도의 투수교체의 책임자가 정민철이라는 논리로 극렬 비판하고 있는 상황.
그나마 일부 코어팬들에게선 "그래도 엉망징찬 수준의 한화 코치진 중에서 정민철만은 그럭저럭 쓸만하지는 않냐?"라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그래도 성실함과 선수들과의 인간 관계, 선수 관리 측면에서 정민철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프런트도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인지, 신생 김성근 체제 출범 하에서 수많은 코치들이 옷을 벗게 된 와중에도 이상군, 장종훈과 함께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레전드 출신 코치가 되었고, 29일 마무리 훈련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10월 30일 결국 자진사퇴하였다. 팀에서 물러나 좀 더 경험을 쌓을 계획이라고. 정민철의 코치 사퇴 소식이 전해지자 절친한 박찬호가 직접 해외에 자리를 알아봐주고 있다는 기사가 흘러나오는 등 해외연수를 가능성이 타진되었으나...
'''11월 6일 MBC SPORTS+ 해설위원 확정.''' 같은 팀 주루코치였던 이종범 코치와 함께 가게 되었다.
솔직담백한 인터뷰로 코치로서의 실패와는 별개로 훈훈한 반응을 얻고 있다.
5. MBC SPORTS+ 해설위원
2014시즌 종료 후 MBC SPORTS+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었다.
뚜껑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성공 가능성을 높게 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전부터 선수 출신 가운데 외모와 언변이 역대 최고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탓에, 꽤 오래전부터 방송계나 팬들로부터 해설가로 전향해도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왔기 때문. 실제로 정민철이 코치직에서 물러나자 '''방송 3사 모두에게서 해설위원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2015년 3월 7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 LG 트윈스의 시범경기 개막전에서 이종범과 함께 해설위원 데뷔를 했다. 3월 2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 한화 이글스의 개막전에서 첫 중계를 맡았다. 대체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 젊은 선수 출신 해설자 중에서는 박재홍 위원의 뒤를 이어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친정팀이었던 한화는 12회말 서건창에게 끝내기를 얻어맞고 5:4로 패배를 당했다
같은 해에 은퇴해 영구결번을 받고 같은 해부터 해설을 시작한 선배투수가 구설수에 오르고, 친정팀으로부터 거부받은 것과는 달리 다행히 선방하고 있다. 현재 네이버 스포츠에서 송출 중인 라디오볼에서도 해설을 맡고 있다. 주로 박재홍과 함께 해설을 맡는데 퀄리티 높은 해설로 호평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데이터에 기반한 해설을 하고 선출 특유의 볼배합, 투수의 심리전에 대한 해설에 능하다. 투구이론에 능통한 모습을 보인다. 구위가 떨어지거나 제구에 난조를 보이는 선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코치때 욕먹은걸 생각해보면,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알려진 바 대로 기본적으로 언변이 좋아서인지 한번 말을 시작하면 더듬거나 비문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톤과 억양이 좋다. 지방 출신임에도 특유의 사투리 억양이 없는것이 다른 선출 해설들과 비교된다. [9] 중계 도중 가끔 깨알같은 개드립을 시전할 때가 있다. 김인식 감독과의 공동해설 때는 성대모사로 터뜨리거나 박지영 아나운서가 벌에 습격당했을 때 양봉드립을 친다던가...
경기중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 역시 좋은 편이다. 공수교대 중 한명재 캐스터가 화장실을 갔다가 볼일이 늦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상황에서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는데 "지금 한명재 캐스터가 없어서 제가 캐스터를 해야겠네요... (허겁지겁 들어온 한명재에게) 한명재 위원 오늘 경기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넘어간 적이 있다.
다만 한화와 타팀간의 경기의 해설을 맡을 때는 '''친한화 성향의 해설을 하는 경향이 종종 있어서''' 그 경우에는 까인다. 초창기에는 한화 투수들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비교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는 듯하다. 엠스플 해설위원이 되기 직전까지 한화맨으로 있었다보니 '''5강 후보로 매년 한화 이글스의 우승 예측을 계속 점쳐왔다.''' 그래도 2018 시즌에는 11년만에 준플레이오프 티켓을 받았으니 잘된 듯
2015년 5월 30일 울산에서 치렀던 경기에 MBC의 지상파(!) 야구중계 해설로 처음 투입됐다. 이후 2017년까지 이종범과 번갈아가면서 서브 멤버로 활약하다가 2018년 이종범이 LG 코치로 영입되어 하차하면서 사실상 허구연 해설과 같이 KBO 지상파 중계 고정 멤버가 되었다.
메이저리그 해설도 하고 있는데 2016년에는 MLB 올스타전 중계를 위해 정용검 캐스터와 함께 샌디에이고로 가게 되었다. 지상파 MBC에서는 류현진 등판일에 손혁 해설과 번갈아 참여했고 최근에는 김선우, 김병현과 번갈아가며 출연해 해설에 참여한다. 또 2019년 클리블랜드에서 펼쳐질 MLB 올스타전 중계 해설을 맡아서 미국으로 출국했다. 두 번째 MLB 올스타전 중계이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한국시간 2019년 7월 5일 열린 류현진 선수의 시즌 10승 경기를 관전했다. 2019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 해설을 맡았는데, 프로그레시브 필드에 취재차 MBC팀과 함께 미국 현지로 가서 MBC 김나진 아나운서와 함께 류현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10]
2018년 4월에는 한화경기를 해설하면서 선수시절 같이 활약한 한용덕 감독, 송진우 코치 등을 보면서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가 해설자로서 배운 것 을 활용해 지도자 시절 못했던 것을 만회하고 싶다" 등의 멘트를 날리며 한화 투수코치시절을 회상하며 언젠가 현장으로 돌아올 것을 희망하였다.
2019년 10월 6일 LG와 키움간의 준플레이오프 경기서 김하성의 보크 판정 여부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대부분 보크로 봤는데 보크가 아니라고 발언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보크는 투수 출신이 가장 잘 안다며 확신에 차서 말했던 것. 다만 김하성이 당시에 어깨에 대한 어필을 강하게 했었기 때문에, 정민철 또한 어깨 위주로 보느라 다리를 미처 못 봤을 가능성은 있다. 다음날 김하성이 정확하게 봤을거라며 정정하며 자신의 발언에서 한 발 물러났다.
2019년 10월 7일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선 허구연 해설위원과 시너지를 이룬 편파 중계에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11] 그리고 바로 다음날 한화 이글스의 단장으로 선임되며 이 경기가 정민철의 마지막 해설 경기가 되었다. 다만, 원래 정민철은 본인의 현역 시절 경험을 토대로 한 투수 위주의 해설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술한대로 타자 입장에서 해설하는 박재홍과의 합이 3사 최고라는 평을 받아왔던 것인데, 이날도 본인은 항상 하던대로 투수 위주의 해설을 하는데 함께 합을 맞추는 허구연이 대놓고 LG 편파 해설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정민철까지 LG 편파 해설을 하는 것 처럼 보인 셈이다.[12]
6. 한화 이글스 단장
2019년 10월 8일 박종훈 전 단장의 후임으로 한화 이글스의 제10대 단장에 선임됐다. # 자신이 뛰었던 소속팀, 특히 고향팀의 선수와 코치를 거쳐 단장까지 올라온 세 번째 사례.[13] 이로써 5년간의 해설자 생활을 마무리하고 단장으로써 2014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한화로 복귀하게 되었다.# 다만 정민철이 이상군과 같은 온정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라 전임 박종훈 단장이 해낸 베테랑 정리가 흔들림 없이 이어질 수 있을지가 미지수라는 의견도 있고, 한용덕 감독이 정민철 단장의 선배인지라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14]
정민철 단장은 해설자 시절 “한화가 베테랑들을 너무 차갑게 대한다”, “대우해줘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박종훈 단장 체제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온 원인은 베테랑을 애매하게 쳐내면서 욕은 욕대로 먹고, 성적은 성적대로 나오지 않은 것이었기에 정민철 단장이 이글스의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15][16]
다만, 해설자 시절에 과거 자신이 투수코치를 하던 때 온정주의적 태도로 선수들 한 명 한 명의 사정을 봐주다가 팀을 어렵게 했다며 후회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기에 단장으로 복귀해서도 무조건 온정주의적으로 선수들을 대할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김경문호의 투수 코치를 프로팀 단장이 맡을 수는 없기에 2019 프리미어 12를 준비하는 김경문 대표팀 감독과 면담 후 대표팀 코치를 하차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는 최일언 LG 트윈스 투수코치가 맡게 되었다.
6.1. 2019년
19년 11월 20일 발표된 2차 드래프트는 무난하게 잘 치러냈다. 할 말만 하면서 이해창, 정진호, 이현호로 적절하게 보강했다. 포수 이해창은 확고한 주전 최재훈과 군면제 백업 지성준이 있는 상태에서 중복투자지만 베테랑 외야수 정진호와 롱릴리프 경험이 있는 이현호는 2차 드래프트 룰(1,2년차 자동보호, FA 자동보호, 40인 제외) 안에서 팀에 딱 필요한 영입들이다. 노쇠화하여 성적은 기대할 수 없지만 멘토이자 롤모델로서 후배 선수들의 성장에 이바지해줄 수 있는 정근우를 명단제외한 점은 반응이 엇갈리나 현장을 떠나있을 때 했던 말처럼 베테랑들을 마냥 온정적으로 대하는게 아니라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게다가 정근우는 소액 연봉자가 아닌 고액 연봉자이기에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단에서 데리고 있기엔 부담스러운게 사실이기도 하다.[17]
이후 투수 장시환과 00년생 포수 김현우를 대가로 백업 포수 지성준과 1루수 김주현을 보내며 정민철에 대한 비난과 옹호가 대립했다. 정민철의 판단이 옳았는지 옳지 않았는지는 2020년 시즌 종료 이후에 결론지어질...줄 알았는데 2020년 6월 26일 지성준이 미성년자 성추행 사실로 인해 무기한 출장정지를 먹으면서 생각지도 못한 쪽으로 정민철의 승리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선발진에서 외국인 투수 둘이 부진하고 김범수가 기복있는 피칭을 하다 7월말 고관절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장시환을 얻어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며 평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
6.2. 2020년
6.3. 2021년
선수단을 대폭 정리한 데다가 연봉 인상을 시켜줄 만한 선수도 최재훈을 빼면 많지 않은지라 40억 중반에서 연봉 선정이 완료될 것이라고 한다.
1월 30일 연봉협상을 마무리지었는데 평균 연봉은 약 7,500만원으로 2013년 이후 처음으로 평균 연봉이 1억 미만인 채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팬들은 이것도 많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한화그룹서 운영하는 호텔들이 코로나 여파로 손님도 줄은것과 한화구단은 코로나로 해외전지 훈련을 못 한다는 것을 감안하여 거제 리조트를 전세내었고 근처 하청구장을 야구장으로 리모델링하여 스프링캠프를 치르고 있다. 일단 단장으로써 구단지원을 전폭적으로 해주고 있는데 구장 흙도 문제여서 대전 한화 이글스파크에서 흙과 잔디를 한화구장과 비슷할 정도로 공수하거나 불펜 피칭장에 데이터 장비까지 설치할 정도로 개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7. 이야깃거리
- 한화 구단이 영구결번한 등번호는 23번. 그러나 정민철이 전성기 동안 달았고 가장 오랜 기간 달았던 등번호는 55번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다.[18] 23번의 경우, 2004년 부진한 성적 탓에 다음 해인 2005년 기분 전환으로 바꾼 번호[19] 였다. 그런데 정작 전성기 시절 포함, 선수 생활 내내 달다시피했던 55번이 아닌 23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다보니 팬들 사이에서 아쉽다는 이야기가 꽤 자주 나오고 있지만, 일이 이렇게 된 것은 프런트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윤규진에게 등번호를 물려준 것이 정민철 본인의 의사였기 때문. 윤규진은 정민철의 초-중-고 직속 후배로 어렸을 때부터 55번을 달았다고 한다. 은퇴 당시 프런트에서 영구 결번으로 55번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지만, 그 경우 후배가 사용 중인 등번호를 뺏는 셈이 되기 때문에 정민철 스스로 포기, 결국 23번을 선택했다. 어찌 되었건 정민철 본인의 선택이기에 존중해야 한다. 그 후 55번은 2021년부터 강재민이 사용하고 있다.
- 특이하게도 결혼식(1999년 3월 14일)을 계룡대 내의 한 군인회관에서 올렸다고 한다. 장인어른이 군장교라서 그런 듯. 직속 상관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인 김경아와의 만남은 극적인데, 1993년 군부대에서 단기사병(방위)으로 근무할 때 한 여고생이 매일 위병소 앞을 지나가서 안면이 있었다가 5년뒤인 1998년, 대전에서 포켓볼 치는데 누가 다가와서 "아저씨, 나 몰라요?" 하길래 봤더니 그때 그 여고생이었다고... 유튜브 채널 서경석TV에선 방위 때는 말도 못 걸고 있다가 우연히 커피숍에 만나서 열심히 대쉬했다고 한다. 당시에 정민철은 팔꿈치 부상으로 6,7월을 날리고 재활 중이었는데 낮에 재활을 마치고 저녁엔 시간이 나서 자주 만나다가 복귀 후 후반기에만 9승을 거두며 7년 연속 10승을 달성했고, 이듬해 스프링캠프 다녀오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 2005년 결혼식을 올린지 무려 6년만에 첫 득남했고, 그후 3년 뒤인 2008년 둘째를 득남했다. 2009년 9월 12일 대전 구장에서 열린 정민철의 은퇴 행사에 큰아들 우영군이 특별 시구를 맡았다.# 두 아들들에게는 운동을 권유하진 않았다고. 이유는 만일 이정후 처럼 했다면 시켰겠지라고.#
- 선 굵고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모난 데 없는 순한 성격에 특유의 눈웃음과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선남형 미남인데다 대전 최고의 프랜차이즈였기 때문에 연고지에서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은퇴 직전인 2009년에 살이 엄청 불어버렸지만 코치 선임 이후 다시 살이 빠져 예전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허구연의 말로는 선수 시절 잘 생겼었기 때문에 정민철이 젊었을 때 TV에서 전 경기를 중계했었다면 여성팬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한다. 여성 팬덤으로 유명한 정수빈보다 더 많았을 거라고.
- 마구마구 2015의 정민철(가명: 윤지현) 레전드 카드는 유니폼은 빙그레인데 한화 소속 선수로 적용되는(...) 오류가 있었으나 2014년 4월 20일 현재는 제대로 한화 유니폼 착용 상태. 그리고 커리어 하이는 1999년인데 1994년이 엘리트카드로 되어 있다.[21][22]
- 실력과 외모, 인성을 겸비하고도 이래저래 팀이 암흑기를 거친 데다 비인기팀이었고, 정민철 자신이 임팩트 있는 시즌이 없어서 생각보다 유명하지 않은 투수라 마구마구에서도 상대적으로 쓰는 사람이 적다. 덕분에 오랫동안 특이구종도 없었다가, 나중에 구종 패치에서 재평가 받아 MC투심이 추가되었다. 포심 슬라이더 투피치였는데 대체 잘 던지지도 않은 역회전 구종을 왜 준 것인지는 의문점이 있다. 마구마구에서 s계열은 특구가 나온 사례가 없으므로 포심의 구위가 좋아 소위 공 끝이 요동치는 직구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영 애매한 스탯과 특구, 잠재이기에 100판 돌려서 한 번 만나기조차 힘들다.
- 2000년대 초중반에, 1972년생이라 다른 팀 가면 최고참 급이지만 소속팀이 한화 이글스라서(…) 커피 심부름을 했던 사진도 있다. 물론 기자들 앞에서 장난 삼아 한 것. 정민철 이후에는 현대에서 수혈한 새로운 한화의 영건이 이러한 설정을 물려받기도 했었다(…).
- 리그 구조상 프랜차이즈가 많은 한국 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랜차이즈 스타가 많은 한화 이글스지만, 대전광역시만으로 따졌을 때 한화에서도 보기 드문 대전 사람.[23] 그런 걸 떠나서 2014년까지 평생 동안 대전을 벗어나 살아본 것은 단 2년뿐이다. 요미우리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2000년, 2001년을 제외하고는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느라 다른 도시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코치 연수한다고 외국으로 나가 생활한 적도 없다.
- 199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여자아이돌 SPEED의 팬이라고.
- 위에도 언급했지만 방위병 출신인데 32사단에 입소해서 훈련 받았었다고 한다.
- 요상하게도 똥과의 악연이 조금 있다. 2016 시즌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 파크 중계 당시 똥을 발에 묻히고 중계석에 들어온 적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했던 박재홍은 이를 회상하며 "해설 4년 하면서 똥을 밟고 중계실에 와서 중계실 바닥에 묻힌 사람은 정민철이 처음일 거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괌에서 골프 치던 도중에 똥을 밟아서 잔디에다 똥을 닦아낸 적도 있다고(...).
- '선수가 없다면 키워서 쓰면 된다',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며 경험을 쌓게 해줘야 한다', '투수마다 체력이 다르니 코칭스태프가 잘 판단하여 기용해야 한다' 등의 발언으로 김성근의 투수 운용을 정면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24][25] 이 때 시범으로 양쪽 팔을 모두 굽혔는데, 공을 계속 던졌던 오른쪽 팔이 완전히는 구부러지지 않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물론 감독 팬들이야 '정민철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이글스 팬으로서 감독님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팬 게시판에서 하며 난동을 부렸지만...
- 2017년 5월 21일, 1박 2일에 출연해서 "이 방송 보시는 10개 구단 단장님들, 제 눈 살아있습니다" 라고 본인을 어필하였다. 현직 복귀를 꿈꾸고 있는듯. 이 날 야구공으로 인형 맞히기 게임에서 25구를 던진 끝에 인형을 맞혔으나 뒤이은 이향 아나운서가 단 1구만에 인형을 뽑으며 안습이 되었다.
- 나 혼자 산다에 한때 팀 후배였던 윤현민이 고정으로 합류하면서, 준레귤러 멤버 수준으로 자주 등장했다. 상기의 1박 2일 촬영 당시에도 1박 2일 스케쥴이 끝난 후 곧바로 나 혼자 산다 촬영을 소화했을 정도. 단순히 같은 팀의 대선배였던 점도 있겠지만 마침 정민철이 MBC SPORTS+의 해설위원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7.1. 선수 시절 관련 일화들
- 손가락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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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때부터 화제가 되었을 정도. 특히 선동열이 "내 손가락이 정민철만큼 길었으면 슬라이더를 더 잘 던질 수 있었을텐데..."라며 부러워한 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 이 때문에 손가락이 길어서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변화구를 잘 던질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선수 생활 내내 들어야 했다. 물론 손가락이 길다고 변화구를 잘 던질 것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야구계 일각에 존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편견. 정민철 본인은 코치 시절에 이런 견해를 밝혔다. 기사[26]
데뷔 때부터 화제가 되었을 정도. 특히 선동열이 "내 손가락이 정민철만큼 길었으면 슬라이더를 더 잘 던질 수 있었을텐데..."라며 부러워한 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 이 때문에 손가락이 길어서 조금만 더 갈고 닦으면 변화구를 잘 던질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선수 생활 내내 들어야 했다. 물론 손가락이 길다고 변화구를 잘 던질 것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야구계 일각에 존재하고 있는 대표적인 편견. 정민철 본인은 코치 시절에 이런 견해를 밝혔다. 기사[26]
- 박경완이 평생에 잡아본 최고의 직구로 꼽았다. 기사 선동열의 직구가 돌덩어리를 잡는 느낌이라면 정민철의 직구는 공을 잡아도 그 안으로 파고드는 독수리 같다고... 역시 이글스의 상징다운 독수리 직구. 사실 박경완의 발언이 2000년대 후반의 팬들에게 유독 널리 알려졌을 뿐, 애초에 정민철은 90년대 초중반부터 계속해서 이런 식의 평가를 받아왔다. 포수 바로 뒤에서 공을 보는 심판들이 뽑은 최고의 직구로 정민철과 당시 OB 베어스의 김상진을 꼽는 기사도 있었고, 이종범 역시 최고 직구로 정민철의 공을 뽑으며, 오승환, 임창용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기사
- 선수 생활 동안 맞은 홈런 중 본인에게나 당시 팬들에게나 가장 임팩트가 컸던 홈런은, 1996년 8월 23일 이종범에게 바깥 높은 공을 던져 허용한 홈런. 9회초 2사 만루 4대 1로 앞서던 중 맞은 역전 만루 홈런이었기 때문. 이날 정민철은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혼자서 2병이나 깠다고(...). 기사 한편 이 홈런이 나온 경기가 바로 이종범이 9회말에 포수마스크를 쓴 경기이다. 즉, 9회초에 총력전을 펼치느라 포수가 교체 되었는데 역전 만루홈런을 치고 9회말에 포수가 없어서 대신 그 자리에 들어갔다. 사실 이런 역전패의 결과가 나오게 만든 최고 원흉은 다름 아닌 감독 강병철이다. 애초에 정민철은 이 경기 선발이 아니었다. 송진우가 8회까지 1실점으로 던지고, 9회에 힘이 떨어져 연속해서 주자를 내보내자 갑자기 정민철을 구원 등판시켰던 것. 그리고 구원 등판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이 경기에 패한 후 강병철의 인터뷰가 그야말로 걸작. "정민철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알아서 거를 줄 알았다"라나 뭐라나... 정민철은 통산 BB/9가 2.81에 불과할 정도로 볼넷을 꺼리는 타입으로 유명했으며, 1996년은 패스트볼 구위가 하늘을 찌르는 전성기 때였다. 그런 정민철이, 아무리 상대가 전성기 이종범이라고 해도 밀어내기를 감수하며 2사 만루에서 유인구로 승부한다? 그야말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 정말로 강병철이 2사 만루에서 이종범을 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명확하게 사인을 냈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경기 끝난 후에 선수탓으로 돌리며 입을 털어서는 안 되었던 일.
- 야구 대표팀과 별로 인연이 없었다.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전무. 처음으로 프로가 아시안 게임 등에 출전하게 된 것이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인데 이 때는 엔트리가 100% 미필자로만 채워졌었고, 2000 시드니 올림픽은 일본 진출 첫 해라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2007년 추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 전부. 다만 시드니 올림픽의 경우, 올림픽 예선전인 1999 서울 아시아 선수권 대표로 출전했었다. 또한 한일 슈퍼게임에도 1995년과 1999년 2회에 걸쳐 출전하여 호투했다.
- 상복하고도 담을 쌓았다. 신인 시절 염종석에게 신인상에서 밀린 것은 유명하지만, 그 이후로도 KBO 골든글러브 수상을 한 적이 없다. 두 자리 숫자 패전 때문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기 때문.
7.2. 입담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송진우에 따르면,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웃긴 사람이 바로 정민철이라고. 안타깝게도 팬들이 이런 정민철의 면모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2008년 두시탈출 컬투쇼에 출연해서 프로 선수가 던진 몸에 맞는 공이 얼마나 아프냐는 질문에 김태균이 "민철이 형 공은 맞아도 안 아프다"라는 말을 하자 정민철은 "태균이는 살이 쪄서 공에 맞아도 괜찮다"라고 받아쳤다(...). 은퇴 당시 감독이었던 김인식은 정민철의 성격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도자로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2018년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 입니다 에서는 DJ인 김신영에 ''삼성 중계 때 해설 한 번 하시겠냐?''는 말에 "욕 없이 화 없이 깔끔하게 중립한다는 장담을 못 한다"고 말했음에도 ''워낙 바쁘신 분이란 걸 알지만, 만약 삼성 라이온즈 경기를 중계하시면 시청률이 대박 날 것 같다"며 욕심을 드러냈다.[29]
MBC 스포츠플러스 엠스플 텔레비전에 출연해, 현역시절 어느 외국인 선수와 이종범을 상대로 뽕커브를 던졌을 때 일화를 소개했다. 외국인 선수의 입에서는 "fuck"이 나왔고, 이종범은 힘없이 투수앞 땅볼로 물러난 뒤 정민철에게 "아야? 실업야구냐? 실업야구선수여?"라고 따졌다고 한다.
쉘힐릭스에서 주최하는 사회인야구 트레이닝캠프에서도 자폭(?)성 유머를 날렸는데, 일본야구에 대해 조금 아는 듯한 사회인 선수가 "코치님한테 푸대접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지금까지 싫어한다."고 말하자, "에이, 저라도 저 안써요."라고 자폭한다던가, 선수들을 지도하며 시범을 보이다가 "힘들어서 못하겠다"며 주저 앉아버리는 등 털털하고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7.3. 팬 서비스
팬 서비스 관련 미담이 많은 편이다, 아니 '''팬서비스와 관련해서 역대 최고의 수준''''이다.
신인 시절부터 팬들의 사인 요청을 거절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며, 늘 친절하고 웃는 낯으로 대했다고 한다. 단순히 팬들에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신인 선수, 볼보이 같은 사람들에게도 신사적이며, 인품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그밖에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훈훈한 일화들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 2010년대 후반 한국 프로야구의 저질 팬서비스 수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지자, 이런 정민철의 투철한 팬서비스가 인터넷 상에서 새삼스레 화제가 되었다.관련기사 한 때 야구를 했던 김기무 배우가 푼 정민철의 일화#
- 한화 볼보이 출신의 증언
- 정민철에게 무등 탄 일화 출처
- 생크림 케이크 받은 일화[30]
- 90년대 초반에 데뷔하던 시절에도 팬서비스가 좋았다. 전주구장에서의 일인데 패전투수(...)가 되어서 나오는 길에도 쌍방울 어린이 팬과 대화를 하면서 나오는 일까지 있었다.
8. 연도별 주요 성적
[1] 한화 이글스가 배출한 영구결번 선수 중에 '''유일한 '''대전광역시''' 출신'''이자 ''''''해외 리그''' 경험자'''. 장종훈과 송진우는 나란히 충청북도 출신으로 둘 다 청주 세광고를 졸업했다. 공교롭게도 한화 그룹에서 운영하는 북일고가 한화 이글스 성골임에도 불구하고 북일고 출신 영구결변자는 없다.[2] 선수시절 프로필이고 은퇴 후에는 살이 불어서 그런지 95kg라고 언급했다.#[3] 1999년 3월 14일 계룡대 육군본부 무궁화회관에서 상명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일반인 여자친구 김경아와 결혼식을 올렸다.#[4] 1990년대 '''선발 투수 중 평균자책점 1위(2.80), 완투 1위(59), 완봉승 1위(19)이며, 정민철이 데뷔한 1992년도부터 1999년까지 다승, 탈삼진, 이닝, 평균자책점, WHIP, 완투, 완봉승 모두 정민철이 1위이다.'''[5] 포심 패스트볼[6] 현역시절 정민철의 커브는 ''''백팔번뇌 커브''''라고 할 정도로 위력이 좋았다. 150Km/h에 육박하는 직구를 던진 후 낙차폭이 큰 100km/h대의 슬로커브를 던져서 타자들을 많이 고뇌시켰다(…). 이 슬로커브 말고도 12시에서 6시로 낙차 크게 떨어지는 파워커브도 보유했다.[7] 표면상으로만 한대화 감독이 투수 교체 타이밍을 정민철 코치에게 물어보고, 대게 그의 의견을 거의 따랐다.[8] 김혁민은 2군에서 갑자기 달라져서 돌아와서 당시 2군 코치였던 송진우의 공이라는 말이 많았다.[9] 참고로 대전은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는 지역 중 하나이다. "~겨", "~여" 같은 충청도 사투리가 잔재하긴 하지만, 도시로서의 역사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시작할 정도로 역사가 짧다는 점과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특징 때문에 표준어 구사율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10] 류현진은 2019년 올스타전 선발 투수에 발탁되었다. 류현진의 2019시즌 하위문서 중 해당 항목 참조.[11] 박병호가 팀이 3점 차로 뒤지고 있던 8회 말에 천금 같은 홈런을 날린 장면을 보고서 정말 뜬금없이 이미 내려간 LG 선발 투수 차우찬을 칭찬했다. LG의 득점 땐 소리를 지르며 기뻐한 허구연 해설위원이 이 홈런을 보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 이제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다들 그러려니 했는데 키움 선수의 홈런을 보고 LG 선발 투수를 칭찬하는 신개념 편파 해설에 팬들은 어이없다는 반응.[12] 물론 아무리 투수 위주의 해설이더라도 그런 극적인 홈런이 나왔다면 그 홈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게 맞고, 그 부분은 정민철의 미스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다만 그 해설들을 정민철이 LG 편파 해설한다고 한다면 본인 입장에선 다소 억울할지도 모를 일이다. [13] 대전 출신으로 빙그레-한화에서 선수로 뛰고 코치를 거쳐 단장까지 올랐다. 정민철처럼 자신의 전 소속팀, 특히 고향팀에서 선수-코치-단장을 맡은 사람은 정민철 외에 조계현 KIA 타이거즈 단장과 차명석 LG 트윈스 단장이 있다.[14] 류중일-차명석처럼 감독이 선배임에도 감독과 단장 모두 특유의 화술로 잘 지내는 경우도 있으나, 이쪽은 같은 팀 직속 선후배 사이인데다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둘 중 하나가, 최악의 경우 둘 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팀이 흔들릴 수도 있다. [15] 사실 베테랑을 박대하거나 푸대접했다고 보기도 뭐한 것이 타 팀이었으면 주전 보장도 어려웠을 선수들의 내부 FA 신청을 다 받아주고 적당히 보장도 할만큼 해줬다. 홀대받는다며 스스로 실언을 하거나 타 팬들이 두둔하던 이적생들 대부분 타 팀에서 WAR 마이너스(...)를 찍으며 있느니만도 못한 성적을 찍었다.[16] 현재 이글스 라인업의 대부분을 베테랑이 채운 상태인데다 타 팀에는 있는 20대 중후반의 중간층이 없는 이글스는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 인위적인 리빌딩을 시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17] 아직도 정근우의 악마 같은 2루 수비를 잊지 못한 몇몇 팬들은 정은원이 아직 풀시즌을 소화 해내기에는 체력적으로 무리니 정근우를 백업으로 기용 했어야 했다고 주장 하지만 당장 정은원이 2018년 데뷔 시즌 1군에 올라온 이유가 정근우의 노쇠화가 만연해 수비 실책이 상당했었기 때문인지라 이는 상황을 잊고 하는 발언이다. 일단 본 포지션인 2루 수비를 마지막으로 본 게 2018년 5월 31일이라 다시 2루 글러브를 끼기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기에 대체 포지션이었던 1루는 이성열이란 중심 타자가 버티고 있고, 지명타자엔 김태균이 있다. 외야는 정근우도 말로는 크게 표현하거나 내색하진 않았지만 버거워 하기도 했고, 2019시즌 종료 직후 지속적으로 보강을 해온터라 객관적으로 설 자리가 없다. 그의 2020시즌 연봉이 3.5억인데 이미 한화에선 프렌차이즈 스타도 아님에도 2차례의 FA로 대접할 만큼 대접한데다 황혼기가 온 82년생 선수에게 3.5억이나 주고 플래툰 지타나 땜빵 수비요원, 대타감으로 쓰는 건 선수에게나 구단에게나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닐 것이다.[18] 1992년 입단할 때, LA 다저스의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를 좋아해서 달았다고 전해진다.[19] 본인이 마이클 조던을 좋아해서 그의 등번호인 23번으로 했다고 한다.[20] 전성기 정민철의 커브는 주무기였던 돌 같은 직구를 받혀주기 위한 부무기였고 전성기 김원형의 커브는 희대의 마구인 주무기였던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21] 다승을 기준으로 하면 1999년이 커리어 하이이나, 1994년의 평균자책점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1999시즌은 심각한 타고투저시즌 이였기에, 1999년을 커리어 하이로 뽑아도 무방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94년 이닝, 평균자책점, 탈삼진 1위에 WAR도 1999시즌인 5.9보다 2.8높은 8.7이지만 정명원의 KBO 최초 40세이브 때문에 골든글러브 수상 실패 등으로 1994년이 가려져 1999시즌이 커리어 하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22] 1994시즌 WAR 1위는 이종범(11.7), 3위는 정명원(8.0)[23] 한화의 레전드 중 대전 출생은 정민철과 강석천, 구대성 세 명뿐이다.[24] #[25] 그런데 정민철의 저 발언들은 김성근 감독이 야인으로 있을 때 "한화 투수들은 지옥에서 던지는 것이다."는 평과 함께 한화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했던 발언과 거의 비슷하다. (...)[26] 다만 포크볼 등의 일부 체인지 오브 페이스 계열 구종구사에 있어서 긴 손가락은 대단한 메리트를 가지는 건 사실이다. 짧은 손가락으로는 구사 자체가 힘들기 때문. 실제로 불미스러운 일로 야구계를 떠난 사이드암 투수 박현준은 일반인들에 비해 손가락이 마디 하나 정도 더 길어서 포크볼 구사가 힘든 사이드암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포크볼을 선보인 바 있다.[27] 솔직히 배가 나오기 시작(...).[28]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볼때 선동열은 팀을 가리지 않고 좋은 투수가 나오면 애착을 갖는 듯하다. 인터뷰를 봐도 자기와 같은 케이스인 직구-슬라이더를 잘쓰는 김광현, 심지어 같은 팀 후배 겸 제자인 윤석민보다 타팀 에이스 류현진을 더 아끼는 발언이 있다.[29] 김신영은 삼성 라이온스 팬임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밝히기도 했다.[30] 이에 대해 정민철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잘 안나지만 해당 일화에서 언급된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어느 한화 레전드가 어린 팬들에 한 만행(?)', 진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