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판다우 교도소

 

1. 개요
2. 역사
3. 특징
4. 하루 일과
5. 뉘른베르크 죄수 명단
6. 슈판다우의 마지막 죄수
7. 기타


1. 개요


1881년 완공되어 1987년 철거될 때까지 베를린 슈판다우 지역에 존재했던 교도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나치 전범들을 수용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고 사라져간 교도소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주요 전범들의 출생일과 가까운 연도에 건설되어 마지막 전범과 함께 사라져간, 어찌보면 운명적인 탄생과 결말을 맞이한 교도소이기도 하다. 한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다가 반대로 독재정권의 수괴들을 가두는 역설적인 사건이 벌어진 무대다.

2. 역사


1881년 완공됐을 때 슈판다우 교도소는 군 교도소였다. 교도소치고는 아담하고 수용인원도 300명 밖에 안되는 건 군 교도소로 쓰기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1차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직후인 1919년, 초인플레이션으로 치안이 개판이 됐을 때 교도소가 모자란 나머지 민간 범죄자도 슈판다우에 수용했고 300명 정원인 교도소에 무려 600명을 수용하는 초과수용을 감행해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시절에는 나치에 반대하는 독일인 반동분자들을 수감하는 정치범 수용소가 되었다. 그리고 나치가 패망한 다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 받은 나치전범 7명을 수용하는 수용업무를 마지막으로 1987년에 철거되었다. 건물의 내구성에는 큰 문제[1]가 없었는데도 굳이 철거한 이유는 나치 추종자들이 슈판다우 교도소를 성역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철거 후 나온 폐자재들조차 추종자들이 성물화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바다에 뿌리거나 다른 건축물의 토대로 쓰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 특징


뉘른베르크 전범 수용 시점에서 '''수용인원이 고작 7명에 불과했던''' 이 교도소는 승전국인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에 의해 공동관리되었다. 특이한 점은 4개국이 동시에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매달 4개국이 교대하면서 운용인력과 경비병력을 자국 인원으로 교대, 배치했는데 여기서 운용인력은 그냥 교도관 뿐만 아니라 시설관리인력부터 주방장까지 전부 교체했다. 한마디로 죄수와 쥐새끼(...) 빼고 전부 갈아치우는 것. 그래서 죄수들에게 배급되는 식사의 질도 그 달의 관리국가에 따라 달라졌는데 제일 좋은 식사를 주는 국가는 프랑스였고 제일 나쁜 식사를 주는 국가는 소련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식사는 푸짐했고 더 달라고 하면 아낌없이 줬지만 정작 죄수들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하게 프랑스는 한때 독일에 점령됐던 국가답지 않게 부드럽게 죄수들을 대해줬는데 기본적인 교도소 수칙으로 일체의 주류가 금지였지만 프랑스가 관리할 때는 식사 때 가끔 와인이나 꼬냑도 배급해줄 정도였다. 그러나 소련의 관리가 시작되면 삼시세끼 삶은 감자, 흑빵, 스프 딱 이 3가지만 로테이션으로 줬다(...). 간식도 다른 국가는 과자를 줬지만 소련은 그냥 커피만 줬다고(...). 식사 뿐만 아니라 죄수를 대하는 태도도 소련이 제일 가차 없었는데 다른 국가 관리 하에서는 아침 기상 시간에 칼같이 일어날 필요는 없었지만 소련 관리 하에서는 딱 6시가 됐을 때 죄수가 기상해서 침구를 개고 있지 않으면 당장 일어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고 한다. 수감자 중 제일 건강이 안 좋던 발터 풍크는 아침 잠이 많아서 소련 관리 하에서 제일 많이 혼난 죄수였다.
다만 소련이 죄수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점은 러시아 네티즌들이 극력부정[2]하는 사실이고, 오히려 다른 서방 3국이 느슨하게 대하는 통에 전범들이 외부와 불법 서신을 교환하고 금지된 물건을 들여왔다고 주장해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관리가 상당히 느슨해지고 나중에는 검열만 할 뿐 전범 죄수들이 제약없이 서신 교환을 했다.

4. 하루 일과


아침 6시에 기상해서 8시에 아침식사 시간까지 세면 및 청소. 식사 후에는 12시 점심식사 시간까지 중정 텃밭에서 노역, 점심식사 후에는 2시까지 휴식한 뒤 다시 노역, 저녁식사 시간은 오후 5시였고 소등 및 취침시간은 10시였다.
죄수들은 각자 독방을 썼고 이른바 통방(몰래 연락하는 연통) 행위를 막으려고 각 감방은 하나나 두개씩 빈 감방을 사이에 두고 수용했지만 일과시간에 자유롭게 대화할 시간이 많아 별 의미는 없는 조치였다. 그런데 관리 주체인 4개국이 자기들 관점대로 일과를 해석하는 바람에 그 달의 관리국 성향에 따라 조금씩 하루 일과가 조정되었다. 영국이 관리를 맡은 달에는 점심식사 후 오후 휴식시간이 길었고 프랑스가 관리를 맡은 달에는 식사시간이 좀더 길었다고 한다.[3]

5. 뉘른베르크 죄수 명단



6. 슈판다우의 마지막 죄수


다른 죄수들이 하나둘씩 석방되는 사이 마침내 슈판다우에는 딱 1명만 남게 된다. 바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은 루돌프 헤스. 헤스 말고도 에리히 레더와 발터 풍크도 무기징역이었지만 이 2명은 건강이 악화되면서 형집행정지가석방되었고 얼마 못 가 교도소 밖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루돌프 헤스는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건강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무기징역형을 살아야만 했다. 결국 헤스는 1987년에 93세의 나이로 자살할 때까지 슈판다우에서 살았다. 그리고 슈판다우 교도소는 1987년 8월, 루돌프 헤스가 사망한 그 달에 신속하게 철거되었다. 헤스의 자살로 슈판다우의 유일한 존재의의가 사라졌다지만, 헤스가 사망한 그 달에 바로 철거를 시작했기 때문에 헤스의 살해 현장을 없애려고 서둘러 철거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7. 기타


  • 교도소를 통틀어 죄수는 7명 밖에 없었지만 죄수끼리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발터 풍크, 발두어 폰 시라흐가 그나마 사이좋게 지냈고 풍크와 시라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 묘사됐다. 노이라트의 경우 수감자들 중 가장 붙임성있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알베르트 슈페어와 루돌프 헤스는 다른 죄수들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알버트 슈페어와 카를 되니츠 간에 사이가 안좋았 던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U보트 생산과 관련하여 알력이 있었으며 되니츠는 자신이 히틀러의 후계자가 된 이유를 슈페어의 추천으로 들어 이로써 자신이 전범재판소에 회부되어 형을 받았기에 원망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같은 사실에 대해 슈페어는 부정하였다. 또한 히틀러에 대한 헌신을 그만두라 한 슈페어의 설득을 되니츠는 끝까지 일축했다. 카를 되니츠와 에리히 레더는 친밀하지는 않지만[4] 같은 해군이었다는 소속감 때문인지 식사나 청소 시간 등 공동활동 시간에는 같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한마디로 군인 이외의 인물들에 대해선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으며 레더가 특히 그러하였다. 수감 생활을 끝마친 후에도 그 둘은 행사https://www.akg-images.com/archive/-2UMDHUQPIVL4.html에 원로로서 같이 참여하는 등 나름의 커넥션이 있는 편이었다. 레더의 경우 엄격한 체계와 규율을 중시했으며 오만과 무식을 싫어하였고 교도소 사서를 자처하면서 되니츠를 보조로 두었다. 되니츠는 옥생활 중 자신의 독일 내 평판을 위해 전 외무장관에게 서신을 통해 변호를 부탁했으며 아내를 통해 정치계에 입문하고자 여러가지 사안들을 보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헤스는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혐오했는데 옥내 노역을 기피하기 위해 일부러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하여간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갈등관계에 있던 수감자들 간엔 화해의 조짐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 교도소 중정에는 넓은 텃밭이 있었는데 전범 수감 시기에는 교도소에 7명 밖에 없어서 노역시간에 각자 키우고 싶은 작물을 취향대로 키웠다. 그 뒤 시간이 흐르면서 반드시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수칙이 느슨해지고 텃밭이 방치되자 알베르트 슈페어는 장기를 살려서 이 텃밭을 멋진 정원으로 가꿨다. 슈페어가 출소한 1966년부터는 유일한 수감자가 된 루돌프 헤스가 당근, 고구마, 해바라기 등을 심어 길렀다.

[1] 루돌프 헤스가 사망한 시점에서 지은 지 거의 백년에 육박하면서 건물이 심하게 노후화된 상태였으나 내구도에는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슈판다우 교도소는 슈판다우 요새와 동일한 축성기술이 적용된 성채나 다름 없었는데 독일의 성채답게 거주의 쾌적성을 포기한 대신 미칠듯이 튼튼했다.[2] 전범이지만 공정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주장.[3] 영국은 오후에 티타임을 즐기는 문화가 존재하고, 프랑스는 아침은 간소하게 해도, 점심과 저녁은 느긋하고 풍성하게 즐기는 문화가 있다. 이게 반영된 듯. [4] 전쟁 당시나 전후에 벌어진 상황을 두고 자주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재밌는 건 점심시간에 멱살잡이 하듯이 싸워놓고 저녁식사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식탁에 마주 앉았다고 한다. 확인된 건 아니지만 되니츠가 나는 총통으로부터 적법하게 정권을 이양 받은 독일 대통령이라고 주장했고 그 때마다 레더는 "아놔 이 양반 또 시작이네. 아니잖아 이젠." 식으로 빈정거려서 싸움이 났다고... 또 두 사람은 독일 해군의 패전에 책임이 서로에게 있다고 떠넘기기도 했다. 레더는 되니츠의 U보트가 독일 해군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고, 되니츠는 레더의 전함이 독일 해군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