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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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 지휘봉을 든 에리히 레더
이름
'''Erich Johann Albert Raeder[1]'''
(에리히 요한 알베르트 레더)
출생
1876년 4월 24일
독일 제국 함부르크
사망
1960년 11월 6일
서독
복무
독일 제국군
 1894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크릭스마리네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해군 원수(Großadmiral[2])[3]
주요 참전
유틀란트 해전
베저위붕 작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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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의 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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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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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左)와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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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ich's Veterans day에서 경례[4]를 하는 에리히 레더.
1. 개요
2. 이력
3. 주요 보직 내역
4. 진급 내역
5. 주요 서훈 내역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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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해군 제독.

2. 이력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유틀란트 해전 등 주요 해전에 참여하였고, 전후에는 크릭스마리네의 재건에 힘썼다. 1928년 대장으로 진급, 한스 젠커 제독의 후임으로 해군 총사령관 직무를 수행하였다. 레더는 나치 정권을 싫어하였지만 해군 재건 계획을 지지하였고, 히틀러는 그를 크릭스마리네의 수장으로 유임시켜 해군 상급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1939년에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이래 처음으로 해군 원수에 임명되었다.
프랑스 전역 종결 후 집단군야전군 사령관들이 대거 진급하기까지, 레더는 전군에 단 3명뿐인 원수로서[5] 히틀러의 대외 행사를 수행하였다. 기록 영상 등을 보면 원수 지휘봉을 쥐고 히틀러의 뒤를 따르는 레더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군의 원로이자 각료로서, 그는 새로운 1939년 제정 기사 철십자 훈장의 최초 서훈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이제 해군은 멋지게 죽을 일만 남았다."'''고 한탄했다. 이 말은 당시 열세한 전력인 독일 해군의 암울한 상황을 설명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6]
레더는 독일 해군을 영국 해군공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덴마크노르웨이를 선수쳐서 터는 베저위붕 작전을 제안해 성공했다. 그러나 항공모함함재기에 대한 문제로 공군괴링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서 늘상 대립하면서 고생했고, 퇴역할 때는 히틀러에게 "해군과 저의 후임자를 괴링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부탁하고는 물러났다.[7] 레더는 자신의 후임자로 상급대장 롤프 칼스 제독[8]과 대장 카를 되니츠 제독을 추천했고, 히틀러의 선택은 되니츠에게 떨어졌다. 되니츠는 2계급 특진으로 레더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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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1945년 6월 23일에 레더는 전범으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의해 리히텐베르크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로 이송되었지만 1945년 10월 20일에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피고였기에 다시 뉘른베르크로 보내져 수감되었다. 이 때 군복의 계급장.서훈 등을 전부 소련의 반대로 강제 탈거했다.[9]그의 죄목은 침략전쟁의 공모 및 계획수립,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 행위에 관한 것이었는데 기소된 레더는 1946년 10월에 유죄가 확정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레더는 이미 70에 가까운 고령을 이유로 감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레더는 슈판다우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1955년 9월 26일에 건강이 악화되어 석방되었다. 군항이 있었던 킬로 이사한 레더는 회고록인 <나의 생애>를 편찬했다.
1960년 11월 6일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독일연방군의 주도아래 진행되었고, 10년형을 마치고 만기 출소한 되니츠가 조사를 낭독했다.
1930년대부터 해군이 정복 규정을 옛 황제 해군 시절 복식이던 해군 상급 부사관 및 장교들의 옷깃 세운 턱시도 셔츠와 나비 넥타이 조합에서 칼라를 내리고 넥타이를 하는 형태로 개정했는데, 레더 제독은 혼자 개정 이전의 복식대로 입고 다녔다.[10]

3. 주요 보직 내역


  • 1925.1.10 ~ 1928.9.30 : 발트해 해군기지 사령관
  • 1928.9.24 ~ 1928.9.30 : 해군 총사령관 겸임
  • 1928.10.1 ~ 1935.5.31 :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 총사령관
  • 1935.6.1 ~ 1943.1.30 : 독일 국방군 해군 총사령관
  • 1936.4.20 : 제국 국무위원 위촉
  • 1943.1.30 ~ 1945.5.8 : 해군 감찰관
  • 1945.6.23 ~ 1945.11.20 : 소련군에 체포, 모스크바 압송 후 구금
  • 1945.11.20 ~ 1946.9.30 : 전쟁 범죄로 기소
  • 1946.9.30 ~ 1955.9.26 :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피고 출석. 반평화적 범죄를 위한 공모죄,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및 전쟁 범죄 항목에서 유죄 판결. 종신형 언도 후 복역
  • 1955.9.26 : 건강상 석방

4. 진급 내역


  • 1896.5.13 : 견습 생도(Seekadett)
  • 1897.10.25 : 예비 사관(Unterleutnant zur See)
  • 1899.1.1 : 소위(Leutnant zur See)
  • 1900.4.9 : 중위(Oberleutnant zur See)
  • 1915.3.21 : 대위(Kapitänleutnant zur See)
  • 1921.4.15 : 소령(Korvettenkapitan)
  • 1927.4.26 : 중령(Fregattenkapitan)
  • 1929.11.29 : 대령(Kapitän zur See)
  • 1932.8.1 : 소장(Konteradmiral)
  • 1935.9.10 : 중장(Vizeadmiral)
  • 1938.10.1 : 대장(Admiral)
  • 1939.4.20 : 상급대장(Generaladmiral)
  • 1942.4.1 : 원수(Großadmiral)

5. 주요 서훈 내역


  • 1907.6.22 : 프로이센 왕국 제정 붉은 독수리 무공 기장 4급
  • 1911.9.5 : 프로이센 왕국 제정 붉은 독수리 무공 기장 관4급
  • 1914.11.19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5.2.18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6.6.3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26.5.31 : 명예 철학박사 학위(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대학교)
  • 1934.12.5 : 최전선 전투 명예 십자 훈장
  • 1936.8.16 : 올림픽 개최 명예 기장 1급
  • 1937.1.30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금 명예 기장
  • 1939.9.15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26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30 : 기사 철십자 훈장 (최초 서훈)

6. 기타


  • 영화 뉘른베르크(2000)에서는 가브리엘 가스콘이 분했다. 재판 시작날에 "나는 무죄"라고 주장하는 대사 하나 밖에는 없고, 되니츠와는 달리 판결 장면에도 나오지도 않았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모습이 괴링의 뒤를 이어 감방으로 가는 장면 외에는 거의 없다.
[1] 자칫하면 Raeder를 라에더로 읽기 쉬운데, 독일어 Ä(에)의 대체 표기가 AE다. 따라서 Ä와 AE는 발음이 같다. 괴테(Goethe)의 oe도 이와 같은 원리.[2] 이 단어를 일본쪽에서는 직역하여 대제독이라고 부른다.[3] 칼 되니츠와 함께 크릭스마리네 사상 단 2명뿐인 해군 원수였다.[4] 유럽원수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이 지휘봉을 들었다 내리며 거수 경례를 대신했다.[5] 나머지 두 사람은 육군 원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1936년),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1938년).[6] 당시 독일 해군은 Z 계획 등 전력 증강 계획을 이제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과 U보트 함대를 책임진 카를 되니츠 (당시)대령 등 해군 수뇌부의 계획은 1945년까지 영국 해군과 맞설 수 있는 전력을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1939년에 히틀러가 덜컥 전쟁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7] 제발 루프트바페로부터 크릭스마리네를 지켜주십시오 [8] 1885.5.29 ~ 1945.4.15. 스페인 전역에서 독일 해군을 지휘한 기사 철십자 훈장 서훈자. 1943년 3월 1일까지 북부 해역 사령관을 맡았으며, 총사령관 인선에서 탈락한 후 예비역이 되었다가 종전 전에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했다.[9] 이는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과 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 해군원수 칼 되니츠,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도 마찬가지. 군인들은 전부 서훈.훈장 등 군복의 치장들을 소련의 반대로 전부 다 강제 탈거했다.[10] 이는 독일군, 특히 장교들 사이에서 많이 보이던 특징으로, 군복을 사비로 맞춰 입어야 했기에 일부러 구형 복장을 따르거나 이런저런 개조를 하는 경우가 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