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부치 코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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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한신 타이거즈, 세이부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의 뒤를 잇는 '''제 3대 미스터 타이거스'''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또한 홈런을 칠때 비거리가 크고 아름답게 날아간다 해서 홈런 아티스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사업가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타부치는 중학교 시절 야구에 입문하여 호세이 대학 제 1고교에 진학한 후 포수 겸 4번 타자로 맹활약 했고 3학년 때엔 여름 고시엔 대회 도쿄 예선 준준결승 까지 진출한 경력이 있다. 호세이 대학에 입학한 타부치는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통산 22개의 홈런으로 리그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참고로 이 기록은 1997년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경신하였다.
1968년 한신 타이거즈의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 되었는데, 도쿄 토박이로서 당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지명을 기대하고 있었던 타부치는 예상 밖으로 한신의 지명을 받고 크게 낙담하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한신의 유니폼을 입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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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동료 에나츠 유타카(왼쪽)와 함께.
한신의 멤버가 된 타부치는 강한 어깨와 타격을 바탕으로 단박에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찼고, 1969년 시즌 홈런 22개[1] 를 기록하는 장타력을 뽐내며 포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하는 경사를 누렸다. 이듬해인 1970년 8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와의 경기 도중 상대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2] 의 투구에 왼쪽 관자놀이를 직격당해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으며 다음 시즌까지 말아먹는 횡액을 입었으나[3] , 1972년 한발 타법으로 타격폼을 바꾸며 그 해 홈런 34개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팀 에이스인 에나츠 유타카와 이른바 '''황금 배터리'''를 구축하며 멋진 콤비 플레이를 보였다. 그러나 프로 초기 콩나물, 기린 이라 불릴 정도로 호리호리한 몸매였던 타부치는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며 '''타부타'''(タブタ, 부타는 돼지라는 뜻)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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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체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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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렇게 불었다.
아무튼 체중은 늘었을 지언정 타부치는 한신의 슬러거로 명성을 떨쳤고, 1972~1976년, 1978년 시즌 까지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 하였으며(1977년엔 23개의 홈런을 날렸다), 1975년 에는 43개로 홈런왕 타이틀을 쟁취하며 오 사다하루의 14시즌 연속 홈런왕 장기 집권을 저지한 바 있다. 한편으로 1974년 시즌 도중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에 가보라는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의 권유를 뿌리친 채 그날 경기에 그대로 출장하여 투런 홈런을 기록하는 근성을 선보인 적도 있다.
이렇듯 한신의 4번 타자로 맹활약하던 타부치 였지만, 뜻밖에도 1979년 세이부 철도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를 인수하여 탄생한 세이부 라이온즈에 2대 4 대형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되었다.[5] 이는 세이부 감독이던 네모토 리쿠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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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타부치. 한신 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빠졌다.
갑작스러운 트레이드 였지만 타부치는 이적 후 첫 동계훈련 때 독기를 품고 체중을 줄여 거의 루키 시절의 체구로 돌아가는 등 세이부의 멤버로서 최선을 다 했고, 1980년 시즌 부터는 1루수 겸 지명타자로 전향하여 변함 없이 세이부의 중심 타선을 지켰다. 1980년에 홈런 43개를 때리며 5년 만에 40홈런을 기록하였고, 한신 시절엔 경험하지 못했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제패를 1982~1983년 2년 연속으로 경험하며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특히 1983년엔 일본시리즈 우수 선수상과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984년 시즌 기량이 쇠했다고 느낀 타부치는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 16시즌 통산 '''1532안타, 타율 0.260, 474홈런[6] , 1135타점'''의 기록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다.[7] 여담으로 타부치의 친정팀 한신 타이거스는 타부치가 은퇴한 바로 다음 해인 1985년에 세이부를 꺾고 그토록 바라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8] 당시 맹활약한 한신의 주전 선수에는 타부치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마유미 아키노부가 있었다.
한신에서의 말년에서부터 이 시기까지의 타부치와 퍼시픽 리그를 코믹하게 그려낸 이시이 히사이치의 만화 "힘내라! 타부치 군"(がんばれ!!タブチくん)[9] 인기리에 연재되어 도쿄 무비에서 3차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다만 애니판의 경우 한신 타이거스에서의 말년시절은 다루지 않고 세이부 라이온즈 초기 시절만 다룬다.
현역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85년부터 5년간 TBS 테레비의 야구 해설위원 으로 활동했다. 1987년 시즌 종료 후 요시다 요시오 후임으로 한신 타이거스 감독에 취임한 무라야마 미노루가 타격 코치 직을 제안했지만 예전에 트레이드 당했다는 마음의 앙금 탓인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무라야마의 의향과는 달리 한신 구단에서는 타부치의 복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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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스 감독 시절.
그 후 1990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이 시절의 호크스는 노무라 카츠야가 1977년 떠난 이후 1997년까지 계속 하위권만 찍던 저주받은 구단인 관계로(...)''' 그 성적에 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54) 결국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했고, 이후 다시 TBS 해설위원 으로 일하던 중 2002년 평소 절친한 사이이던 호시노 센이치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신 타이거스 수석 겸 타격 코치로 친정팀에 복귀하였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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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코치 시절(우측). 좌측은 호시노 센이치 감독.
타부치는 한신 선수들의 타격을 열정적으로 지도하며 2003년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했으며 한편으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가르쳐 주는 반면[11] 성적이 부진하거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선수는 냉정하게 내치는 엄격한 지도 방식 이었다고 한다. 2003년 시즌 이후 호시노가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한신 감독 자리를 내려놓자 후임 감독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타부치는 "나는 감독감이 아니다" 라고 거부하며 스스로 한신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라운드를 떠난 타부치는 2004년 부터 TBS 해설위원으로 복귀하였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수석 겸 타격 코치로 합류하여 대표팀 감독이 된 호시노 센이치를 지원하였다. 그 외에도 2009년 한신 타이거스 OB회 제 6대 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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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수석 코치 시절. 오른쪽은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
2011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에 취임한 호시노 센이치의 권유로 라쿠텐 수석 겸 타격 코치를 맡아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라쿠텐 타선의 침체에 대한 책임으로 그해 6월 타격 코치직을 내려놓고 2012년 시즌까지 수석 코치직만 맡았지만 결국 2012년을 끝으로 라쿠텐 유니폼을 벗었다.
2013년 시즌 부터는 TBS라디오 해설가, 스포츠 닛폰 평론가로 활동 중.
1. 소개
일본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한신 타이거즈, 세이부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후지무라 후미오, 무라야마 미노루의 뒤를 잇는 '''제 3대 미스터 타이거스'''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또한 홈런을 칠때 비거리가 크고 아름답게 날아간다 해서 홈런 아티스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 아마 시절
사업가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타부치는 중학교 시절 야구에 입문하여 호세이 대학 제 1고교에 진학한 후 포수 겸 4번 타자로 맹활약 했고 3학년 때엔 여름 고시엔 대회 도쿄 예선 준준결승 까지 진출한 경력이 있다. 호세이 대학에 입학한 타부치는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통산 22개의 홈런으로 리그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참고로 이 기록은 1997년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경신하였다.
1968년 한신 타이거즈의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 되었는데, 도쿄 토박이로서 당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지명을 기대하고 있었던 타부치는 예상 밖으로 한신의 지명을 받고 크게 낙담하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한신의 유니폼을 입기에 이르렀다.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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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배터리를 이루었던 동료 에나츠 유타카(왼쪽)와 함께.
한신의 멤버가 된 타부치는 강한 어깨와 타격을 바탕으로 단박에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찼고, 1969년 시즌 홈런 22개[1] 를 기록하는 장타력을 뽐내며 포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하는 경사를 누렸다. 이듬해인 1970년 8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와의 경기 도중 상대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2] 의 투구에 왼쪽 관자놀이를 직격당해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으며 다음 시즌까지 말아먹는 횡액을 입었으나[3] , 1972년 한발 타법으로 타격폼을 바꾸며 그 해 홈런 34개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팀 에이스인 에나츠 유타카와 이른바 '''황금 배터리'''를 구축하며 멋진 콤비 플레이를 보였다. 그러나 프로 초기 콩나물, 기린 이라 불릴 정도로 호리호리한 몸매였던 타부치는 부상에서 회복된 이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며 '''타부타'''(タブタ, 부타는 돼지라는 뜻)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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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랬던 체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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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렇게 불었다.
아무튼 체중은 늘었을 지언정 타부치는 한신의 슬러거로 명성을 떨쳤고, 1972~1976년, 1978년 시즌 까지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 하였으며(1977년엔 23개의 홈런을 날렸다), 1975년 에는 43개로 홈런왕 타이틀을 쟁취하며 오 사다하루의 14시즌 연속 홈런왕 장기 집권을 저지한 바 있다. 한편으로 1974년 시즌 도중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에 가보라는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의 권유를 뿌리친 채 그날 경기에 그대로 출장하여 투런 홈런을 기록하는 근성을 선보인 적도 있다.
이렇듯 한신의 4번 타자로 맹활약하던 타부치 였지만, 뜻밖에도 1979년 세이부 철도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를 인수하여 탄생한 세이부 라이온즈에 2대 4 대형 트레이드로 이적하게 되었다.[5] 이는 세이부 감독이던 네모토 리쿠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4.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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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타부치. 한신 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빠졌다.
갑작스러운 트레이드 였지만 타부치는 이적 후 첫 동계훈련 때 독기를 품고 체중을 줄여 거의 루키 시절의 체구로 돌아가는 등 세이부의 멤버로서 최선을 다 했고, 1980년 시즌 부터는 1루수 겸 지명타자로 전향하여 변함 없이 세이부의 중심 타선을 지켰다. 1980년에 홈런 43개를 때리며 5년 만에 40홈런을 기록하였고, 한신 시절엔 경험하지 못했던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제패를 1982~1983년 2년 연속으로 경험하며 야구선수로서 최고의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특히 1983년엔 일본시리즈 우수 선수상과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1984년 시즌 기량이 쇠했다고 느낀 타부치는 그 해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 16시즌 통산 '''1532안타, 타율 0.260, 474홈런[6] , 1135타점'''의 기록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었다.[7] 여담으로 타부치의 친정팀 한신 타이거스는 타부치가 은퇴한 바로 다음 해인 1985년에 세이부를 꺾고 그토록 바라던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8] 당시 맹활약한 한신의 주전 선수에는 타부치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마유미 아키노부가 있었다.
한신에서의 말년에서부터 이 시기까지의 타부치와 퍼시픽 리그를 코믹하게 그려낸 이시이 히사이치의 만화 "힘내라! 타부치 군"(がんばれ!!タブチくん)[9] 인기리에 연재되어 도쿄 무비에서 3차례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까지 했다. 다만 애니판의 경우 한신 타이거스에서의 말년시절은 다루지 않고 세이부 라이온즈 초기 시절만 다룬다.
5. 은퇴 이후
현역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1985년부터 5년간 TBS 테레비의 야구 해설위원 으로 활동했다. 1987년 시즌 종료 후 요시다 요시오 후임으로 한신 타이거스 감독에 취임한 무라야마 미노루가 타격 코치 직을 제안했지만 예전에 트레이드 당했다는 마음의 앙금 탓인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무라야마의 의향과는 달리 한신 구단에서는 타부치의 복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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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스 감독 시절.
그 후 1990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이 시절의 호크스는 노무라 카츠야가 1977년 떠난 이후 1997년까지 계속 하위권만 찍던 저주받은 구단인 관계로(...)''' 그 성적에 관해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54) 결국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했고, 이후 다시 TBS 해설위원 으로 일하던 중 2002년 평소 절친한 사이이던 호시노 센이치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신 타이거스 수석 겸 타격 코치로 친정팀에 복귀하였다.[10]
[image]
한신 코치 시절(우측). 좌측은 호시노 센이치 감독.
타부치는 한신 선수들의 타격을 열정적으로 지도하며 2003년 팀을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했으며 한편으로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가르쳐 주는 반면[11] 성적이 부진하거나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선수는 냉정하게 내치는 엄격한 지도 방식 이었다고 한다. 2003년 시즌 이후 호시노가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한신 감독 자리를 내려놓자 후임 감독 물망에 오르기도 했지만 타부치는 "나는 감독감이 아니다" 라고 거부하며 스스로 한신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라운드를 떠난 타부치는 2004년 부터 TBS 해설위원으로 복귀하였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수석 겸 타격 코치로 합류하여 대표팀 감독이 된 호시노 센이치를 지원하였다. 그 외에도 2009년 한신 타이거스 OB회 제 6대 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image]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수석 코치 시절. 오른쪽은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
2011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에 취임한 호시노 센이치의 권유로 라쿠텐 수석 겸 타격 코치를 맡아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라쿠텐 타선의 침체에 대한 책임으로 그해 6월 타격 코치직을 내려놓고 2012년 시즌까지 수석 코치직만 맡았지만 결국 2012년을 끝으로 라쿠텐 유니폼을 벗었다.
2013년 시즌 부터는 TBS라디오 해설가, 스포츠 닛폰 평론가로 활동 중.
[1] 본인의 백넘버랑 같다. 참고로 오승환의 한신시절 등번호다.[2] 1975년 사와무라상 수상자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다인 노히트 노런 3회(이중 퍼펙트 게임도 1회 포함되어 있다)를 달성한 투수이다.[3] 이 사건 이후로 귀 부분까지 보호하는 헬멧 착용이 일반화되었다.[4] 스타디움 히어로 에서 T팀의 타율 0.180, 홈런 50개의 대타인 타부타(タブタ)가 타부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5] 당시 세이부는 마유미 아키노부, 다케노우치 마사시,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다 마사후미를 한신에 보내면서 타부치와 후루사와 켄지를 영입했다.[6] 역대 11위. 2012년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통산 476홈런을 기록하면서 타부치의 기록을 앞서기 전까진 역대 홈런수 10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참고로 1~11위 중 유일하게 2천안타 미달성자다. 하지만 그 말은 안타 치면 3~4안타 중 1안타는 반드시 홈런이었단 말이니 어찌보면 또 하나의 대단한 기록이다. 출루율은 타율보다 1할 높은 .361에 볼넷도 많이 얻어냈으니 요즘으로 치면 OPS 히터 소리를 들을만한 타격 스타일이었다. [7] 이 해 친구인 에나츠 유타카도 은퇴.[8] 그 덕분에 당시 세이부 감독이던 히로오카 타츠로는 재임 기간동안 팀을 2차례나 일본시리즈 우승을 시켰는데도(위의 1982~83년) 불구하고 사임해야했다(..)[9] 타부런(타부치 러닝 홈런), 한국으로 치면 '이대호 도루하는 소리'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만화.[10] 원래 호시노와 타부치, 그리고 히로시마의 레전드인 야마모토 코지는 같은 시기에 도쿄 6대학리그에서 경쟁하던 스타 플레이어였다. 프로로 진출한 이후에도 계속 교류를 해왔으며 은퇴한 지금도 일본 프로야구의 대표적인 교우관계로 유명하다. [11] 이 당시 타부치가 키운 선수로 세키모토 켄타로, 하마나카 오사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