믈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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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ka (Darul Azim)[1]
'''Melaka Negeri Bersejarah'''
'''역사적인 주 믈라카'''
1. 개요
말레이시아 서남부에 위치한 주. 동남쪽으로 조호르와 경계를 맞대고 있고 나머지는 느그리슴빌란이 둘러싸고 있다. 주도는 동명의 도시인데 이에 대해서는 믈라카 시를 참조. 이 곳에 위치한 해협에 대해서는 말라카 해협을 참조.
크기는 퍼를리스, 풀라우피낭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작은 주이지만, 말레이시아의 전통적인 도읍이자 지금의 이슬람 말레이시아의 시조 국가이며 말레이시아 문명 발상지의 하나이다. 즉 말레이시아의 정신적 수도인 곳.
현지인들은 "Melaka"라고 한다. 공식적인 별명은 "Negeri Bersejarah"로 뜻은 "역사적인 주 믈라카". 술탄제의 기원이다보니 가끔 "귀족의 집"이라는 뜻의 "Darul Azim"으로도 불리지만 술탄제가 폐지된 오늘날에는 그리 사용되는 별칭은 아니다. 이 이름의 기원은 믈라카 나무이다. 드물지만 "Negeri Hang Tuah"(항 투아의 집)이라는 별칭도 사용된다.
헌데 영어로는 "Malacca"라고 하는데 당장 영어 위키백과를 봐도 "Malacca"라고 되어 있다. 남한에서는 말레이어 명칭인 "믈라카"와 "말라카"가 둘 다 사용되는데 북한에서는 후자만을 사용하며 정확한 문화어 표기도 "말라까"이다. 여하튼 진짜 말레이 명칭은 "믈라카"이므로 이 문서도 "믈라카"가 되었다. 그렇지만 말라카와 말라까로도 여기로 들어올 수는 있다. 말라카 해협의 명칭도 이곳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으로 따지만 경주시, 부여군과 유사한 위상인데 일단 위치도 그렇고, 정통성이 있는 역사적 수도라는 점이 일치한다.
2. 역사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이 점령한 이래 인도양과 동태평양에 진출했던 제국주의 유럽 열강 중 말라카를 차지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아시아-인디아 무역망을 경영한 세력은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대로 말라카를 지배했던 세월은 바로 그 나라들이 이 광활한 남아시아 해양 무역 네트워크 자체를 독점했던 패권의 척도 그 자체이기도 했다.
2.1. 기원: 믈라카 술탄국
원래 믈라카는 현지 말레이인이나 "해지인"(Orang Laut)으로 불리는 이들이 살던 한적한 어촌이었다. 비록 대단한 편은 아니었지만 바다가 접해 있고 그렇다 보니 옛날사람들에게는 여러모로 지리적으로 중요했다.
이 한적한 어촌이 말레이시아의 상징으로 뜬 이유는 파라메스와라 때문. 오늘날의 싱가포르에 위치하던 테마섹 왕국의 마지막 군주였던 그가 본국을 배신하고 이 곳에 나라를 세우는데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왕조 출신이었지만 말레이인이었다. 당시 아랍 상인들과의 교류 중 이슬람이 전파되었는데 그는 이슬람으로 즉시 개종하고 페르시아어식 호칭인 "이스칸다르 샤"를 자기 호칭으로 하고 술탄으로 즉위한다. 오늘날 이슬람 말레이시아의 근본이 되는 믈라카 술탄국을 세우는데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믈라카"라는 이름은 믈라카 나무에서 유래한 것이다. [2]
그런데 시대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바도 그렇고 인터넷을 뒤져봐도 대게는 15세기 초반이라고 나오지만, 근래 발표된 또다른 논문에 따르면 13세기 후반이라고 하여 때문에 언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되진 않은 상태이다.
2.2. 포르투갈령 믈라카
예전부터 믈라카는 지리적인 이점, 인도, 아랍과의 교류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는데 파라메스와라는 이를 노렸다. 그러나 파라메스와라가 죽은 지 한참 후 서구열강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식민지화가 시작되고, 이 때 포르투갈이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1511년 믈라카를 함락시킨다. 불과 700명의 본토 병사에 300명의 남인도인 보조부대로 코끼리 20마리를 포함한 2만 명이 지키는 믈라카를 함락시켰다.[3] 결국 믈라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고 술탄국은 멸망했다.
다만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는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는데 당시 오늘날의 필리핀에 해당되는 지역을 차지했던 스페인도 겪었던 문제였다. 열강들은 기독교(가톨릭)를 전도하려 했으나 주민의 대부분은 무슬림이었다. 민다나오의 경우는 주민들의 과격한 저항으로 스페인마저도 포기했을 정도였지만 포르투갈은 선교를 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지배에 성공했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식민지화에는 성공했으나 가톨릭화에는 실패했으니 절반의 성공일 뿐이었다. 브라질의 경우는 현지 원주민 문화를 거의 말살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믈라카의 경우는 믈라카 술탄국 왕실이 조호르로 도주해 살아남아 반발도 심하고 지형과 기술 때문에 진압이 어려웠으며 의외로 이쪽 문화에 감동을 느껴 오히려 현지 문화를 존중했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행정어로 당연히 포르투갈어를 사용했지만 여기서는 말레이어를 사용했다. 어쩌면은 완전한 식민지화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말라카 같은 신흥 세력의 부상에 명나라를 비롯한 이웃 열강들의 눈이 시퍼렇게 떠 있던 구대륙 식민지 중에서도 말라카같은 당대 최고의 핫스팟과 인구 밀도도 낮고, 기술력 차이도 압도적이고[4] , 근대적 의미에서 '국가'라 부를 만한 정치 체계도 없었던 브라질 같은 신대륙 식민지는 상황 자체가 판이하게 달랐다. 상술한 대로 갑작스럽게 처들어온 포르투갈에게 털렸던 말라카 술탄국은 인근 조호르로 옳긴 이후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라카를 되찾으려고 하였고, 기용할 수 있었던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능력을 총동원하여 포르투갈령 말라카 식민지를 재정복하려고 하였다. 당장 1521년, 1550년, 1567년, 1574년 하루가 멀다고 조호르 술탄국은 인근 다른 말레이계 영주들과 술탄국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포르투갈령 말라카에 공격을 가했고, 그 중 특히 1550년의 원정은 거의 말라카 함락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격퇴되었다. 게다가 포르투갈 침략 당시 말라카 술탄국은 엄연히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조선이나 베트남 비슷한 대명제국의 영향권 중 하나. 조공국이 순식간에 개털리는걸 본 명나라는 망명한 말라카 술탄이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포르투갈 사신단, 상단을 모두 감금, 억류하고 함대를 편성하여 이 듣보잡 프랑크족에게 참교육을 시전하려고 하였다[5] . 현대 홍콩 일대에서 1521년, 1522년 두차례 걸쳐 코딱지만한 포르투갈 선단을 격파한[6] 명나라는[7] 말라카 자체를 탈환하려고 계획을 새웠으나 포르투갈이 먼저 인근의 중국 이권에는 일체의 왜구 소탕에 도움을 주겠다며 백기를 들고 나오자 마카오에서 무역을 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 결국 딜을 봤다.
상황이 이러니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아무리 일반적인 이베리아 반도 식민주의 처럼 원주민들을 모두 죽여버리거나 혼혈화해서 강경한 개종과 현지화 정책을 밀려고 해도 도통 밀 수가 없었다. 제3 세력 출현에 눈을 부릅 뜬 인근 말레이계 세력들로 인한 불안정으로 인해 강제 개종을 할 수가 없었다. 16세기 후반 되어서야 말라카의 후계국인 조호르 술탄국이 포르투갈이 더 이상 말레이계 세력 상대로 확장을 하지 않으며, 인근 해적 때려 잡는 것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말라카 수복의 꿈을 접고 어느 정도 타협을 봤으나, 이 시점에서 말라카는 이미 불안한 정치적 상황과 끊임 없는 군사적 충돌, 그리고 이런 막장 상황을 틈타 들끓기 시작한 해적질로 인하여 한때 화려하기 그지 없었던 태평양-인도양 무역의 메카로서 역할을 인근 조호르 술탄국의 리아우 열도, 빈탄, 아체, 시악 등에게 뺏겨버렸다. 17세기 초반에는 오히려 조호르 술탄국과 포르투갈이 싸우던 사이 새로운 해양 세력으로 강력한 힘을 기른 이스칸데르 무다 치하 아체 술탄국의 맹렬한 공세에 둘 다 나가리 될 뻔했다가 오히려 힘을 합쳐서(...) 겨우 아체의 추가적 팽창을 막은 일 까지 생겼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네덜란드라는 새로운 변수가 말레이 반도 일대에 처들어왔다.
2.3. 네덜란드령 믈라카
당시 유럽에서 80년 전쟁을 겪으며 이베리아 연합 아래 포르투갈과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던 스페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무역 거점인 말라카를 차지하면 이베리아 세력에게 강력한 타격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해양 제국의 기반도 쌓을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17세기 초반 말레이 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장은 강력한 포르투갈 세력과 어느 정도 타협은 봤지만 고토 수복과 복수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조호르 술탄국은 이 새로운 종류의 듣보잡 프랑크인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1606년 동인도 회사 대표 마텔리프 판 용헤와 동맹을 체결하며 아체의 위협을 물리치자 마자 다시 포르투갈에게 칼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16세기 내내, 17세기 초반까지 '''아시아 최강의 요새'''급 방어력을 자랑하며 거의 두자릿수의 인근 경쟁 세력의 정복 시도를 막아냈던 포르투갈령 말라카도 결국 이베리아 반도 제국의 약화 자체를 극복하지 못했고, 처음에는 몇차례 네덜란드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으나 결국 1641년 조호르-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 당했다. 말라카를 제외한 인근 영토 모두는 조호르 술탄에게 반납하며, 차후에도 군사적, 경제적 편익을 제공하고, 추가 영토 확장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조호르 술탄국과 쇼부를 본 네덜란드는 곧바로 믈라카를 자기 영토로 삼고 바타비아(오늘날의 자카르타)를 수도로 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편입시켰는데 한편으로는 믈라카의 발전에 도움이 되긴 했다. 왜냐하면 크고 아름다운 네덜란드령 동인도간의 정말로 크고 아름다운 무역이 경제 성장에 한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수도였던 바타비아는 물론 말루쿠(몰루카)까지도 이어지는 길고 긴 무역. 한마디로 '''믈라카에서는 경제 성장이 식민지화했다.'''
2.4. 영국령 믈라카
이 네덜란드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앞에서는 당연히 무릎을 꿇었고 믈라카는 이제는 본격적인 영국령이 되었다. 문제는 영국의 세력이 커지자 네덜란드와 분쟁이 발생했는데 결국 1824년 영화협정을 통해 시원하게 해결했다. 싱가포르를 기점으로 북쪽은 영국이, 남쪽은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것.[8]
이로써 믈라카는 풀라우피낭과 싱가포르와 더불어 신설 해협 식민지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는 믈라카 술탄제의 폐지를 불러왔다.''' 왜냐하면 이쪽 출신들은 총독제를 시행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영국령 동인도 회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왕령식민지로 개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잠시 일제의 지배를 받았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영국이 돌아왔다. 다시 해협 식민지로 복귀했으나 1년만에 해체되고, 싱가포르를 제외한 상태로 말라야 연합에 편입된다.[9] 그런데 영국이 말레이인의 상징인 술탄제를 폐지했는데 이것은 주민들의 반감을 샀다. 2년만에 말라야 연합은 붕괴되었고[10] 말라야 연방이 신설되었는데 이 때 술탄제도 부활했다. 그런데 정작 술탄제의 근원인 믈라카는 이를 적용받지 못하였고 결국 '''믈라카 술탄이라던 그 최고존엄의 기상은 영원히 무너지고 만다.''' 안습.
2.5. 말레이시아령 믈라카
1955년 첫 총선과 함께 독립이 기정사실화 되고 1957년 8월 31일을 기점으로 말라야는 독립을 쟁취하지만, 정작 후에도 술탄제는 부활하지 못했다. 1963년 9월 16일 말레이시아가 신설되었을 때도 그냥 풀라우피낭, 싱가포르, 사라왁, 사바와 더불어 총독제가 시행되는 주의 하나가 되었고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1989년 말레이시아의 역사유적지로 지정되었고 이어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6.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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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 믈라카 술탄국이 무너진 후 술탄제가 부활한 적은 ''' 없으며''' 애초에 술탄제를 부활하려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누르 잔이라는 사람이 2013년 믈라카는 "복종의 집"이라는 뜻의 "Darul Islam"이라는 별칭과 함께 술탄제로 복귀해 술탄으로 추대되면서 '''드디어 술탄제가 복귀했단다.'''라는 '''주장을 했다'''. 페락 왕실 출신인데 당초 아즐란 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나즈린 샤가 떠오르면서 밀렸던 모양. 이에 대한 홧김으로 아버지를 거역하고 술탄을 자처했으나 끝내 내려왔다고 한다. 뭐 이것도 주변에 널리 퍼진 소리일 뿐이며 진담인 지는 모른다. 페락 왕족 출신이라는 소리도 헛소리인 듯.
그런데 본인이 이렇게 스스로를 믈라카 술탄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어쩌면은 본인이 믈라카 술탄의 후손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긴 했으나 아무도 모른다. 때문에 진실은 저 너머에. 여하튼 이듬해 경찰에 생포되었고 신성한 왕실 타이틀을 가지고 지랄했으니 처벌을 받겠지만, 당장 이 사람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봐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것 같다. 왜 저렇게 발광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 설명 자체가 뭔가 요상한데, 말라카의 술탄들은 상술한 대로 포르투갈에게 말라카를 상실한 이후 옆동네 조호르로 자리를 옮겼고, 그 이후 말라카 술탄조의 혈통은 조호르가 이어 받다 18세기, 19세기에 있었던 왕위 계승 분쟁으로 몇차례 왕실이 바뀐 후 여전히 조호르에 붙어 있다. 뒤집어 말하면 말라카 본토에는 1511년 이후 쭉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직할 통치를 받았지 현지의 술탄이 새로 생긴 적이 없다. 원래 있던 말라카-조호르 왕가는 19세기에 전혀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왕통이 소멸 되었고, 말라카는 그 이후 400년 넘게 자체적인 술탄이 있었던 적이 없는데 말라카에 술탄제를 복원한다니 만다느니 하는 얘기 자체가 이상하다.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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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총독 모하마드 할릴 야콥.
1824년 영국령 해협 식민지로 편입된 것이 술탄제를 폐지하게끔 했던 발단이 되었는데 영국은 이 지역에 총독제를 도입했다. 이것은 1957년 말라야의 독립에서 1963년 말레이시아 신설 당시에 새로 가입한 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중이다.[11][12] 다만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게 있자면 과거에는 홍콩 총독처럼 총독이 실권자였는데 지금은 캐나다 총독처럼 총독은 무의미하다. 실권자는 총리이다. 현 총독은 모하마드 할릴 야콥이며 2004년에 취임했고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소속. 총리는 이드리스 하론으로 2013년 취임. 총독과 동일한 정당 소속이다.
주가 작다 보니 상대적으로 선거구의 수도 적은 편이고, 의회는 총 28석이다.[13] 근 총선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금 현재 집권당은 말레이시아 전역의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며 21석을 확보하여 의석의 총 '''75%'''를 차지하고 있다. 야당으로는 민주행동당(DAP)이 6석,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이 겨우 '''1석'''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 술탄국의 영향 때문인지 수도와 행정 수도가 다르다. 이러한 일은 술탄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에서만 존재하고 총독제를 시행하는 주에서는 전무한 사례. 일단 수도는 믈라카 시이지만, 행정 수도는 아예르크로이다. 이것은 술탄제의 영향인 지 모르겠으나 지금 술탄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에서는 전형적인 현상. 당장 슬랑오르를 봐도 수도는 샤알람, 행정 수도는 클랑. 이웃한 느그리슴빌란은 스름반(수도) - 스리므난티(행정 수도). 크다는 알로르스타르(수도) - 아낙부킷(행정 수도). 반면 총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경우를 보면 풀라우피낭은 조지타운 단 하나, 사라왁도 쿠칭 단 하나, 사바 또한 코타키나발루 단 하나. 어쩌면은 마지막 술탄이 마지막으로 남겨둔 유산일지도 모른다.
이 주가 진짜 술탄제로 부활할 것이냐는 논란이 많지만, 아무튼 '''술탄제의 근원지'''라는 점 때문에 주민들도 술탄제에 대해 의외로 호의를 보이기도 한다. 오죽하면 위의 어느 미치광이처럼 자기가 신임 술탄이니 뭐니 하며 발광하는 놈까지도 있는 걸 보면 말이다.[14]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술탄과 총독이 맡는 역할은 비슷하더라도 그 위상은 '''완전히 다르다.''' 일단 총독은 사실상 임기제한이 있는 데 반해 술탄은 걍 종신직. 또한 군주의 일종으로 세습되는 술탄과는 달리 총독은 그런 게 불가능하다. 때문에 정 술탄을 추대하려면 과거 믈라카 술탄국의 대를 봐야 하는데 지금 그 대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지 알 바 없다. 설상 끊겼다고 다른 사람을 아무나 내세우는 건 아닌데다가 그러면 난리가 날 수도.
4. 사회
총독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 중에서는 유일하게 무슬림이 대다수인 주...는 아니다.[15] 이미 두개 더 있으니깐. 그렇지만 그러한 주 중에서는 말레이인이 대다수인 유일한 주이다. 풀라우피낭은 중국인 중심이고 사라왁과 사바는 보르네오 원주민 중심인 데 반해 믈라카는 말레이인이 63%다. 참고로 무슬림은 66.1%. 2013년 통계에서는 25.3%가 중국인인데 동화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고수하는 전형적인 차이니스 말레이시안과 혼혈 현지화되어 중국인이라는 감각이 희미할 듯 한 프라나칸(Peranakan)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중 프라나칸은 "바바와 뇨냐"라는 말레이-중국의 혼합된 문화를 남겼는데 여기에 이를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인도인은 6%인데 여기 외에는 싱가포르에서밖에 볼 수 없는 치티 가 있다. 치티란 말레이화된 독특한 인도인들을 말한다.
타 지역에서는 존재조차 불분명하나 여기서만큼은 뿌리가 되는 크리스탕족이라는 특이한 인종집단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15세기 첫 식민지 개척자였던 포르투갈인들의 후손으로 현지 말레이인 및 원주민들과 혼혈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내려져오고 있는 일종의 크리올 집단이다. 치티와 마찬가지로 믈라카 외에는 싱가포르에서나 그나마 볼 수 있는 집단. 이 세상에서 통틀어 봐도 총 37,000명 뿐인 소수 민족이다. 말레이시아의 음악인 로이스턴 스타 마리아가 크리스탕 출신. 이들은 말레이화로 변형된 포르투갈어 방언을 사용한다.
오랑아슬리 계열의 트무안족도 극히 소수 거주한다.
5. 언어
말레이어가 당근 국어이자 제1언어로 사용되고, 그 뒤로는 중국어, 타밀어 등이 사용되는데 이들도 소통할 때는 영어를 사용한다. 물론 이는 말레이시아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믈라카의 위상 등을 볼 때는 이 지역 방언이 한국어로 따지면 충청도 방언 정도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믈라카 방언은 한국어로 따지면 '''서울말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오늘날 말레이시아 표준어의 근본이 믈라카-조호르 방언이기 때문인데 당연히 믈라카와 조호르가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수도권이었으니 그렇게 지정된 것 같다. 정작 각 지역의 독특한 방언들을 들어봐도 그 유명한 클란탄 방언이나 사라왁 방언은 설명이 필요 없고 다소 쉬운 사바 방언이나 느그리슴빌란 방언을 들어봐도 확실히 방언의 느낌이 크게 와 닿지만, 믈라카 방언은 들어봐도 표준어와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조호르 방언 역시 동일하며, 때문에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 보니 타 지역 사람들은 잘 모른다. 대표적인 믈라카 방언의 예는 'ekau'. 뜻은 '너(you)'이며 표준어로는 'engkau'이다. 근래에는 쿠알라룸푸르가 수도가 되고 그 쪽 말의 영향이 짙어지면서 이 방언은 무시되고 점차 사라져 가고 있지만, 단지 알아둬야 할 것은 '''말레이시아 표준어란 곧 믈라카의 유산'''이라는 것이다.[16]
6. 관광
거꾸로 말하자면 '''믈라카를 가고 싶지 않다면 말레이시아를 오는 의미가 없다'''는 것. 그만큼 믈라카는 관광 산업이 발달해 있다. 아무리 쿠알라룸푸르와 그 일대가 수도권으로 발달하고 멋지게 변화되어도 관광해 봤자 어디까지나 마천루 구경이나 하고 다니는 것일 뿐이지, 진정으로 말레이시아에 대해 배우는 데에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럴 만 한게, 원래 허허벌판 정글이었던 곳이 처음에는 탄광촌이 되었다가 갑자기 수도로 뜨게 되었으니 볼 거리가 별로 없는 건 사실.'''Melawat Melaka Bererti Melawati Malaysia'''
'''믈라카를 방문하는 것은 곧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믈라카는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근본이 되는 과거의 문명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니 관광산업이 발달하는 건 당연지사. 말레이시아의 관광지들을 쭉 봐도 '''믈라카만큼 관광지가 발달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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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처치
코타 아 파모사
구글에서 다른 주에 대해 검색해 봐도 국기, 국장, 지도 위주로 나오는 데 반해 믈라카에 대해서 검색하면 '''관광지 위주로 나온다.''' 이는 그만큼 믈라카의 관광산업이 얼마나 발달해 있나를 보여주는 것. 주로 식민지의 유산인데 믈라카를 처음으로 지배한 포르투갈의 색이 강하게 남아있다. 건축물도 그렇고, 앞의 운하도 보면 유럽적인 색이 강하다. 풀라우피낭이 영국적이라면 여기는 포르투갈적이다. 여하튼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데 고풍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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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카사 쿠바. 뜻은 "쿠바의 집"이라는 뜻인데 쿠바에 있는 게 아니라 믈라카에 있다. 물론 쿠바와는 어떠한 관련도 없고(...) 과거 영국 관리가 살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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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tten City'''
믈라카 내 최고급 콘도가 몰려있는 곳이다. 유명 브랜드 입점 및 영화관까지 운영하고 있는 Elements Mall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각광받는 지역이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개발 중인 지역이라 주변이 다소 휑하다.
7. 교통
바투브른담에 위치한 믈라카 국제공항이 유일한 관문이다. 이 공항은 믈라카뿐 아니라 조호르 북부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해 중요하긴 하지만...'''정작 이 공항으로는 갈 데 없다.''' 대게 한국인들이 쿠알라룸푸르 외 다른 지역을 갈 때는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거치면 될 것 같지만...정작 쿠알라룸푸르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데 직항을 할 '''필요 자체가 없다.''' 이건 마치 서울에서 청주까지를 비행기 타고 가는 꼴이니깐(...)
한국에서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아니, 피낭 국제공항을 거쳐서 가는 게 그나마 낫다. 그나마 유일한 노선이기 때문에... 이거 말고도 인도네시아 프칸바루의 술탄 샤리프 카심 2세 국제공항을 거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 직항이 없어,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을 거쳐야만 한다. 물론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을 거쳐서 갈 수도 있지만, 이렇게 3번씩이나 갈아타면서 '''그딴 시간낭비에 돈낭비에 에너지낭비 할 필요 없다.''' 그냥 피낭 국제공항을 거치거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또, 그것도 국제선을 거치지 말고 차라리 차 타고 가자! 공항에서 1시간 30분이면 땡이다.
옛날에는 공항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바투브른담 국제공항"이라고 했는데 흔히 불리고 더 알릴 수 있는 이름인 "믈라카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최근에 터미널을 신축하는 등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이렇게 유명한 관광지에 저렇게 공항이 작아서 어쩔련지...차라리 신공항 짓는 게 나을듯.[18]
시내에는 Panorama Melaka라는 시내버스가 다닌다. 그랩이나 택시로 돈 날리기 싫은 위키러는 이 버스를 타자.
8. 출신 인물
- 가수 지아나 제인
[1] 잘 사용되지는 않으며 공식 별칭도 아니다.[2] "브라질"이라는 이름이 생긴 과정도 비슷했다. 브라사 나무가 그 기원. [3] 포르투갈군 전사자는 28명[4] 위 교환비에서 보듯 유럽 열강과의 기술 격차는 명백했지만 신대륙만큼 넘사벽은 아니었다[5] 알버케르케의 부관이자 최초의 포르투갈 출신으로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틀려고 했던 탐험가 페르낭 피레쥬 데 앙드라데(Fernão Pires de Andrade)도 이 사건으로 억류 당하고 명나라 감옥에서 죽었다[6] 일례로 1522년의 천초만 해전에서 명나라는 300척의 병선을 동원했는데, 여기 맞서는 포르투갈 선단은 고작 6척이었다.[7] 불량기포를 비롯한 유럽에서 들어온 군사 기술도 이 충돌을 계기로 전파된 것이다[8] 그러나 영국이 싫어할 만한 이유가, 북보르네오(오늘날의 사바)의 남부 지역의 경우는 많은 지역이 싱가포르보다 북쪽에 있었는데도 네덜란드로 넘어간 것이었다. 수마트라 섬에 있던 벤쿨렌도 울며 겨자먹기로 네덜란드에게 넘겨주고 '''결국 인도네시아만 대빵 커지는 결과가 되었다.''' [9] 싱가포르가 제외된 이유는 자유무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나중에 말레이시아에 가입하여 잠시나마 한 몸이 되었지만 얼마 못 가 쫓겨났다.[10] 물론 붕괴의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다. 영국이 말라야 연합을 미국처럼 이민의 나라로 만들려 했는데 결국 말레이인들이 반발하고 인종분쟁이 빚어지면서 연합 폐기를 요구했던 게 더 큰 원인.[11] 후에 탈퇴한 싱가포르가 이를 다소 개정하여 공화정으로 전환했다.[12] 물론 앞으로도 말레이시아에 가입할 주들은 총독제를 시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단 싱가포르는 리콴유가 생전에 종종 언급했듯이 말레이시아로 복귀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데 혹시나 복귀하더라도 총독제로 복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브루나이는 술탄제이므로 술탄제를 유지하되 권력은 총리대신에게 빼앗기는 식(...)으로. 당연히 가능성은 사실상 0%이지만 만약에 대한민국이 말레이시아에 가입한다면 총독제가 시행될 것이 확실하다.[13] 참고로 가장 큰 주인 사라왁은 총 71석이고, 가장 작은 주인 퍼를리스는 15석.[14] 현재까지 풀라우피낭, 사라왁, 사바에서는 이런 사건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들은 원래부터 술탄제가 아니었기 때문. 누르 잔 말고도 술탄을 자처하며 발광했던 또다른 놈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매우 극단적인 통일주의자로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부르나이-필리핀까지 전 말레이계 나라를 합친 마필린도라는 가상의 국가의 술탄을 자처했었다.''' 물론 이 사람도 경찰의 제지 앞에서 무릎 꿇은 듯.[15] 그렇지만 66.1%로 비중이 가장 높긴 하다. 그 다음은 사바로 65.4%.[16] 조호르 방언도 근래에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그나마 고립된 동부 지역의 방언들이나 크다, 퍼를리스 쪽 방언들만 거의 보존될 뿐이다. 느그리슴빌란 방언도 수도권 방언과의 차이를 보면 경기 방언-충청 방언 정도의 차이로 다르지만 비슷한 정도라 그리 존속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페락 방언과는 경기 방언-황해 방언 정도의 차이라 그런지 존재감 자체가 없고 나름 비슷해서 소멸위기 상태이다. 사라왁이나 사바의 방언은 그 특유성과 고도의 자치 때문에 보존이 쉬울 것 같지만, 근래에는 본토화가 빨라짐에 따라 소멸위기 상태. 이미 많이 동화된 3세대 이후 부터는 표준어를 구사하지 방언에는 많이 취약하다.[17] 그래도 사라왁, 사바에는 원주민 문화 체험이나 산투봉 산 및 키나발루 산을 트레킹하는 것도 있지만 정통적인 말레이시아의 문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진짜 말레이시아와는 연관이 없었으니깐. 그러한 진짜 말레이시아의 색은 말라야 쪽에서만 볼 수 있는데 믈라카 외에는 크다 주 랑카위에서 마수리 전설에 대해서나 배울까, 별 볼 거 없다. 파항은 겐팅 하이랜드부터 카메론 하이랜드, 쿠안탄 일대에서 물놀이나 하는 게 전부라 관광일 지는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관광은 아니고, 조호르 역시도 조호르바루 쪽에서 쇼핑하는 것 뿐.[18] 하지만 믈라카는 고층 건물들도 없고 왠만한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 재개발이 사실상 불가능해 지금으로도 충분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