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역사
안산시 행정구역과 분동의 역사. 안산군 시절의 군역(郡域)도 매우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1. 원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삼한(마한) 영역 중 한 국가였다가 이후 백제에 의해 정벌되었다. 삼국시대 전기에는 백제 땅이었으며, 고구려 장수왕이 빼앗아 고구려 시대에 '장항구현(獐項口縣)'이라 불렀다. 위쪽으로는 매소홀(미추홀)현(지금의 인천광역시 미추홀시와 시흥시 북부), 북동부 경계 일부는 잉벌노현(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 경기도 광명시)과 접했다.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된 이후 진덕여왕이 장구현(獐口縣)으로 고쳤고 통일신라에서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했고 신문왕 때 장구군(獐口郡)으로 승격되었다.
2. 고려
고려 초기에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인 안산현(安山縣)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시, 화성시 동부. 수주(樹州)[1] 와 다르다.)의 속현이 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안산군(安山郡)으로 승격되었다.
3. 조선
쭉 안산군이었다. 시흥시 연성동의 '연성(蓮城)'은 조선 시대 안산군의 별칭으로, 강희맹이 조성한 관곡지의 연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지금의 시흥시 남부(정왕·군자·연성·목감)와 안산시 중서부 일대만 해당되었다. 상록구 동부는 광주목-광주유수부-광주군-광주부 지역이었고, 대부도 일대는 남양도호부-남양군 지역이었다.에 해당되었다. 1441년 목내동에서 수암동으로 읍치가 이전되었다.진산(鎭山)은 수리산 근처에 있는 수암봉이었다.
1906년 광주군 북방면(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팔곡일동·팔곡이동, 군포시 대야미동·둔대동·속달동·도마교동)·성곶면(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이동·사동·본오동)·월곡면(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수원시 권선구 입북동·당수동, 의왕시 월암동·초평동)을 편입하였다.
4. 일제강점기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으로 시흥군과 수원군에 분할 통합되어 군이 사라졌다. 9개였던 면은 3개로 합쳐졌다.
군이 폐지되기 직전의 영역으로 이건 현재 안산시가 시흥시와의 통합을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이기도 하다. 현재의 법정구역을 토대로 제작했으며 계속적인 간척으로 인해 적색과 청색에 해당하는 영역이 당시보다 더 크게 나왔다는 점에 유의바람.
5. 대한민국
도시개발 이전에는 한적한 농어촌이었다. 1990년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의 중앙역 남부는 모두 갯벌이었고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지금 지도상으론 한참 육지 쪽으로 들어가있는 성포동이라는 지명에도 포(浦)라는 글자가 있을 정도. 대규모 간척과 시화방조제의 건설로 지금은 안산 본토에서 해안 마을의 기능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대부도와 풍도 등 도서 지역에서만 그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안산 본토에 접한 수역은 시화방조제로 인해 시화호가 되었다. 시화호는 9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악명 높은 환경 오염지대였는데 9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온 결과 지금은 철새가 드나드는 관광지가 되었다.
안산선 남쪽으로는 1990년대 후반까지도 소를 키우는 농가를 볼 수 있었을 정도로 시골이었다. 이후 안산이 개발되면서 이 지역은 주택가와 공단으로 변했다. 동시에 상업 중심지도 지금의 원곡동과 초지동 근방에서 고잔동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초지동에 가면 그 증거로 1980년대 지어진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 때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 초지동 시민시장에서는 5일장이 열려 문전성시를 이룬다.
일제의 식량 수탈 목적으로 건설된 협궤철도 수인선이 지금의 안산선 터를 따라 운행하고 있었다.[2]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안산선이 들어오면서 교통이 대폭 편리해졌다. 쇠퇴하던 수인선은 1995년 영업 '''중지'''상태가 되었다. 당초 수인선을 새로 깔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으나 계속계속 미뤄지다 보니 2012년 6월 말이 되어서야 부분 개통이나마 이루어졌다. 옛날 신문기사를 보면 '''2005년 완공 예정'''이라는 말도 보일 정도. 더 자세한 내용은 수도권 전철 수인선 항목을 참조.
한적한 바닷가의 시골 마을들이 지금과 같이 탈바꿈하기 시작했을 때는 1976년이었다. 경제 발전에 따라 수도권에 산업이 몰리기 시작하자 이를 흩어놓기 위해 반월국가산업단지를 개발하면서 화성군 반월면 일부, 시흥군 군자면·수암면의 각 일부를 관할하는 경기도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가 설치된 것.기사[3] 3년 뒤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는 반월출장소로, 1986년에는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하였다. 1914년 사라진 안산군의 정체성이 이때 되살아난 것이다. 시명은 반월공단과 반월출장소에서 따와 '반월시'가 될 뻔했으나, 옛 '안산군'의 역사 되살리기 차원에서 향토사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안산시'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월'이라 부를 수 있는 지역은 당시 반월출장소 내에서도 일부일 뿐이었고, 반월공단도 당시 반월면이 아닌 군자면에 있었기 때문에, 반월시가 시명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은 적절한 것이었다.
다만 반월출장소의 영향으로 '반월'이란 명칭을 쓰는 경우가 안산시 곳곳에 꽤 찾아볼 수 있으며, 안산시에 오래 거주한 사람들 중에는 간혹 안산시를 '반월'로 통칭하는 경우도 있다. 시흥시와 광명시 거주 향토예비군훈련을 담당하는 반월교장도 안산시에 있다. 이와 반대로 안산농협(수암농협에서 개칭)·군자농협·반월농협의 3개 지역농협이 안산시내에 있는데, 이건 반월출장소 이전 시대의 관성이 남았기 때문이다(시흥시 연성동·목감동까지 안산농협이, 시흥시 군자동·정왕동까지 군자농협이, 군포시 대야동과 수원시 입북동까지 반월농협이 맡고 있는 것도 같은 연유).
1994년 옹진군에서 대부도와 풍도를 1995년 당시 구 삼척군 하장면 전체를 통합하지 않고 4개리만 떼어 사조동으로 편입하면서 도농통합이 무산된 강원도 태백시의 사례처럼, 안산시 대부면이 되지 못하고 대부동으로 편입되는데 그쳐 도농통합시의 대열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 이후로 2000년에 시승격 이후 동으로 있다가 불편을 느끼자 2014년 10월에 읍으로 전환된 남양면 때문인지 2014년부터 2015년 두 차례 대부면으로 전환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찬반이 팽팽해서인지 한동안 감감 무소식이다가 2020년에 들어 도농복합시로 전환 재추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4] , 화성군에서 팔곡일리·건건리·사사리를 편입해 왔다. 이듬해인 1995년 시흥시 수암동·장상동·장하동과 화정동 일부를 편입해 오면서 현재의 영역이 확정되었다.[5]
1986년 안산시는 7개 동에 127,231명의 인구가 있었다. 하지만 10년 뒤 안산시의 인구는 약 4배에 달하는 507,952명으로 증가했다. 7개였던 동은 21개가 되었으며 출장소 1개까지 있었다.
그 뒤에도 인구가 계속 늘어나 2002년 당시 국회의원 선거구를 기준으로 상록구와 단원구를 설치하였다.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하여 진도군과 함께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2017년 7월 행정동 사1동을 사동, 사2동을 사이동, 사3동을 해양동으로 개칭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지금의 부평구, 계양구, 부천시, 구로구 중 안양천 서쪽 지역}[2] 정확히 말하자면 수인선은 중앙역과 한대앞역 사이에서 본오동 쪽으로 빠져 수원으로 가므로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3] 참고로 이거 발표한 건설부 장관이 바로 이 사람이다.[4] 주민투표 결과 안산시 50.4%, 시흥시 48.8% 등으로 안산시 편입안이 간반의 차이로 앞섰기에 대부면의 안산시 편입이 결정되었다.[5] 수암동·장상동·장하동은 시흥시 시절부터 행정동 '''안산동'''으로 묶여있다가 안산시로 넘어온 뒤에도 그대로 안산동이 되었는데, 사실 이곳은 원래부터 안산시 생활권인데다가 '''조선시대 안산군 관아가 있던 곳이었다'''(지금은 내륙 구석처럼 보이지만, 간척 사업 이전엔 바다와도 꽤 가까운 중심지였다). 시흥시가 재정의 압박으로 안산시에 떠넘겼다는 카더라도 있는데…진실은 저 너머에. 사실 재정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역사성, 생활권 측면에서 안산동 이 안산시로 편입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