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채

 









'''대한민국''' '''국무총리비서실장'''
'''국민의 정부'''
21대
조건호

'''22대
김용채'''

23대
조영장

'''서울특별시 노원구청장'''
'''민선1기'''

'''민선1기'''

'''민선2-3기'''
6대
최선길[1]

'''7대
김용채'''[2]

8-9대
이기재
[image]
金鎔采
1932년 10월 05일 ~ (91세)
1. 개요
2. 선거이력
3. 소속 정당
4.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관료이다. 종교불교다. 호는 연곡(蓮谷)이다.
1932년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5.16 군사정변 때 군사정변군 측에 섰다. 그리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민주공화당 초기 차지철의 독주를 나무라며 차지철에게 손찌검을 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에서 관료로 근무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6선거구(포천, 연천, 가평)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홍익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 29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인이 27번까지 나오면서 또 낙선했다가 1969년 당 동료의원인 김규남의 탈당 및 의원사퇴로 의원직을 승계했다.[3]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탈락되었다. 직후 동방유량의 월급사장이 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양평군 선거구에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이고 출마자가 그와 신민당 천명기 후보 둘뿐이라 무투표 당선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오치성에 밀려 공천 탈락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 기간에 서부트럭터미널을 운영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한국국민당에 입당하면서 비슷한 시기 서부트럭터미널을 매각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연천군-포천군-가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한국국민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1986년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었다. 1987년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여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 이한동 국회의원을 피해 지역구를 자신의 출신 지역인 포천군과 가까운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 지역구로 옮겨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민주공화당 원내총무에 임명되었다.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소속이 되었다. 1991년 수서 비리에 연루된 오용운을 대신하여 공화계 몫으로 대한민국 국회 건설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처음에는 당선되었다고 발표했으나 재검표 결과 민주당 임채정 후보에게 낙선하였다. 이 무렵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재검표 결과 때문에 의원직 뿐만아니라 장관직도 잃고 말았다.
1995년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1996년 1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같은 해 2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1996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합공천으로 서울특별시 노원구청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image]

2000년부터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지내다 2001년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DJP연합이 붕괴되면서 1달도 안 되어 경질되었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6선거구)[4]
민주공화당
20,337 (25.93%)
낙선
(2위)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9번)
'''민주공화당'''
-
낙선 → '''당선'''
1969.5.22 승계[5]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포천/연천/양평/가평)
'''민주공화당'''
-
'''당선'''
무투표당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연천/포천/가평)
'''한국국민당'''
'''23,694 (18.92%)'''
'''당선 (2위)'''
1987. 10 탈당
신민주공화당 합류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신민주공화당'''
'''31,150 (30.79%)'''
'''당선 (2위)'''
1991년 3당합당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민주자유당
40,433 (32.53%)
낙선 (2위)
1992.7.20 대법원 재검표
당선번복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을)
자유민주연합
33,026 (26.39%)
낙선 (3위)

1996
1996년 9.12 재보궐선거
(민선 1기 서울 노원구청장)[6]
'''자유민주연합'''
'''48,823 (53.04%)'''
'''당선 (1위)'''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63 - 1980
창당
정계 입문

1980 - 1984
정당 해산

1984 - 1987
입당

1987
탈당

1987 - 1990
입당

1990 - 1995
합당[7]

1995 - 1996
당명 변경

199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6 - 2000
입당

2000 - 2001
공공기관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

2001 - 2006
복당
정계 은퇴

2006
합당[8]

2006 -
탈당

4. 여담


  • 한국토지공사 사장 재직 시절 KBS2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출발 드림팀 한국토지공사 흙기사팀과 드림팀의 경기 대결에 출연하여 106대 드림팀 멤버 소개와 태권도 공인 8단임을 밝혔으며 겨루기 시합에서 개그맨 지상렬을 제압했다.

[1]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무효. 권한대행 이동식[2] 재보궐선거에서 당선.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1998년 3월 5일 구청장직 사퇴. 권한대행 이동식, 정태승[3] 김규남 의원은 유럽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의원직 사퇴 및 탈당을 해야 했고,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21세기에야 무죄 판결을 받으며 간첩조작사건임이 확인되었다. 집권여당의 국회의원마저 간첩으로 둔갑시키던 시대였다.[4] 경기 포천, 가평, 연천[5] 전임자 김규남 의원 민주공화당 탈당[6] 전임자 최선길 당선무효[7]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8] 해산과 동시에 한나라당에 일괄 합류